소설리스트

천살검협-292화 (292/334)

EP.293 막간 - 끝 없는 싸움 (1)

* * *

-가끔은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죠. 자연스럽고 허술한 분위기를 낸다던가.

당문에서의 일을 처리하던 중 연애 후 혼인에 들어섰던 하녀가 했던 말이었다.

당화서는 그녀의 혜안에 크게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훌륭하구나.’

목리원의 반응이 사뭇 흡족하기 그지없다.

물론 오랜만에 본 것도 있고, 새로 조합한 독의 효용이 뛰어남도 있겠지만 이런 분위기적인 변화가 지분이 없다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렴, 오늘따라 유독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기새처럼 재잘대는 모습으로 알 수 있지 않나.

문득 떠오르는 것은 무한으로 돌아온 후 들었던 목리원에 관한 평이다.

-부쩍 어른스러워졌지. 나 참 7년 전의 그 묵룡이 이리 의젓해지니 시원하기도 섭섭하기도 하오.

-너무 멋있지 않나요? 의지가 되더라구요.

-묵룡 대협이 이젠 허투르게 웃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더구려. 멀어진 느낌이라 섭섭하오.

개뿔이, 변하기는 뭐가 변했나.

여전히 이리 아이처럼 웃으며 수줍어하는 꼴을 보니 당화서의 속에 묘한 우월감이 차올랐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목리원의 진짜 모습을 오로지 자신만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말이오. 이번엔 소아가 그리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그랬군요.”

당화서는 말하며 목리원의 손을 슬쩍 쥐었다.

그러자 목리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조금 뜨거워졌다.

‘음, 잘 듣고 있구나.’

찌르르 울리는 기분이겠지.

그냥 독이 아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독기와 접촉하는 순간 그 효용이 극대화되어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독이었다.

달빛 아래 마루의 분위기가 조곤조곤하다.

희미하게 푸른 달빛이 그의 붉어진 얼굴을 사뭇 가려주는 것이, 특히 야릇했다.

당화서는 간질간질한 마음에 입술을 뗐다.

“소협, 한데 얼굴이 조금 더 붉어지셨습니다.”

하며 목리원의 이마에 손을 얹는 순간이었다.

“하읏…!”

계집아이 같은 목소리를 흘린 목리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피, 피로가 차올랐던 모양이구려! 소저! 나는 자러 가겠소! 좋은 밤 되시오!”

“자, 잠깐! 소혀….”

“그럼 이만!”

타다닥! 목리원이 경공까지 발휘해가며 사라졌다.

당화서는 허망하게 그가 떠난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쯧 혀를 찼다.

“아직 멀었군.”

너무 강한 자극이었던 듯하다.

*

대관절 왜 이리 속이 울렁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목리원은 전날 밤을 되새기며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괴롭게 하는 기억이 있었다.

-하읏…!

당화서의 손이 닿은 순간 절로 입에서 튀어나온 계집아이 같은 신음이었다.

목리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체 그 사내답지 못한 신음은 뭐란 말이냐!’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 참담하게 다가왔다.

이제 나이가 스물다섯이다.

다시 강호로 나오며 언제나 호쾌하고 진중한 협객이 되겠노라 다짐했건만!

남들 앞에선 서투른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리도 노력했건만 그 순간! 하필 제일 중요할 때 실패해버렸다!

그렇게 되어버리니 모든 것이 당화서의 계략임을 모르는 목리원은 정체성의 혼란까지 겪었다.

사실 자신은 여인에게 휘둘리며 행복해하는 몹쓸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언젠가 마일석이 했던 말처럼 계집아이들 치마폭에나 둘러 쌓여 살 몹쓸 사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목리원은 머리를 싸맸다.

지금 집무실 한가운데 앉아있는 것은 정파 무림 대표 고수도 아닌, 무림맹 용봉단의 단주도 아닌 그저 사랑 앞에 혼란스러워하는 한 사내였다.

딱 단원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목리원은 그런 순간을 살았다.

“단주님! 회의 가실 시간이에요!”

“아, 벌씨 시간이….”

화들짝 놀란 목리원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곤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럼 다녀오마!”

하며 목리원은 전각을 나섰다.

그렇기에 듣지 못했다.

“단주님 혼자 끙끙대지 않았어?”

“몰라, 또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하여튼 묘하게 푼수 같단 말이야.”

단원들은 생각보다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암만 숨기려 해 봐야 그놈의 푼수 끼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닮고 싶은 인물 1위로 강호협객전의 검협을 꼽는 목리원은, 아직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엔 많이 모자란 청년이었다.

*

단주로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바쁘다.

설령 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따르지 않는 용봉단이라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당화서였다.

아무렴, 지금 용봉단의 행정 체제를 확립한 게 그녀인데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여하튼 그런 것들을 아는 만큼 당화서는 목리원에게 꽤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달리 말해, 그의 빈틈을 파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건 좀 더 간편하게 처리할 방법이 있습니다.”

사천에 들른 동안 밀린 일과 앞으로의 일도 몰아서 다 처리하고 온 참이다.

한껏 여유로워진 당화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목리원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일과가 끝난 이후면 특히 그랬다.

일감을 장원으로 들고 오는 목리원의 모습은 꼭 시름시름 앓는 화초 같아서 가만 두고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 외면해야 한다.

그 따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당화서는 굳이 따지자면 반대쪽이었다.

“자, 이리 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 그래도 되겠소?”

“안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서 주시지요.”

목리원이 조금 더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랐다.

마치 어미를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떨어져 있는 매 순간을 불안에 떨었으면 했다.

죄책감은 없었다.

솔직히, 7년이나 방치한 목리원의 잘못이 아닌가.

벌을 받을 때가 된 것이다.

“대, 대단하오! 소저는 어떻게 그리 빠르게 일을 처리하오?!”

목리원의 동경 어린 눈빛은 좋은 응원이 되고 있었다.

힘이 가득 차오르니 당화서의 작업 속도는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일을 끝내고 목리원에게 맡겨둔 나머지 일까지 빼앗아 끝낼 지경에 이르렀다.

“단주는 나인데 내가 한 게 없구려.”

목리원이 살짝 시무룩해졌다.

당화서는 너그러이 웃으며 목리원의 어깨를 쓸었다.

“소협의 일이 저의 일입니다. 저희는 연인이니까요.”

“앗….”

목리원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 그렇지. 연인…!”

목리원이 어깨를 폈다.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금새 안색을 회복했다.

당화서의 눈이 부릅 뜨였다.

‘저항했단 말이냐?!’

조금 더 사내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열망에 목리원이 열기를 공력으로 흩어낸 것이었다.

하나 당화서가 알 리가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그간 꾸준히 하독 당한 목리원이 어느새 독에 내성을 가지게 되었다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고 중의 대형 사고였다.

문제는 명확했다.

‘초월지경!’

그놈의 초월에 이른 신체가 본디 생겨선 안 될 내성을 만든 것이겠지.

초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당화서는 그리 결론 내렸다.

방도를 강구하게 된다.

‘독의 양을 늘려야 하나?’

아니, 그래봐야 언젠가는 내성이 생길 테고, 그때는 지금보다 더 하독이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새로운 독의 조합?

…이도 언젠가는 한계가 와버린다.

어떤 식으로 조합하던 한정된 목적을 위한 독은 그 재료도 한정되는 법이다.

목리원의 속도라면 늦지 않은 시기에 그 재료들의 내성을 갖추게 되겠지.

핑핑 머리가 돌아갔다.

하나, 조급함이 차오르니 결론은 결국 한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내성이 생기기 전에.’

자빠뜨려야겠군.

당화서의 눈빛이 타올랐다.

*

‘요즘은 참 갈수록 힘들구나.’

목리원은 근래 들어 점점 말을 듣지 않는 몸에 참 곤란함이 차올라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다기보단 감정이 싱숭생숭해지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당화서와 함께 있을 때만 그런 현상이 이니 목리원도 이제는 알았다.

그녀를 향한 감정, 혹은 그녀를 향한 욕구가 속에 내재 되어 있다는 것을.

괜히 부끄러워졌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관계에 상대의 육신을 먼저 원하는 이 참을성 없는 몸뚱어리를 가지고 어찌 협객이라 할 수 있겠나.

이는 당화서도 크게 실망할 일이 분명했다.

‘아암! 사랑이 아닌 성욕에 지배당하는 것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그저 음탕한 색마 혹은 짐승일 뿐이다!’

라며 목리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 말을 당화서가 들었다면 크나큰 분노나 자괴감을 느꼈겠지만 다행히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목리원에겐 참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단주님! 표국에서 서신이랑 표물이 배송됐어요!”

“응?”

남궁소아가 집무실로 들어와 작은 상자 하나와 밀봉된 서신을 건넸다.

목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받아요. 저는 그럼 이만.”

“어딜 가느냐?”

“모용진이 사고쳐서요.”

“어이쿠, 수고하거라.”

“네.”

흉흉한 기색으로 남궁소아가 빠져나갔다.

목리원은 서신을 먼저 열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백련교주?’

단지선에게 온 서신이었다.

꽤 긴 편지였으나, 핵심을 요약하자면 그랬다.

-지난 일의 보답으로 환약을 몇 개 준비했습니다. 혈류를 맑게 해주고 독기를 빼주는 효능이 있으니 챙겨 드십시오.

건강식품을 보냈으니 먹어라.

목리원은 작게 웃으며 기꺼이 상자를 열었다.

손톱 크기의 붉은 환약이 가득하다.

한 알을 집어삼키니 과연.

“오?”

뭔가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다.

그에 크게 기꺼워하는 목리원은 몰랐다.

단지선이 보낸 이것이 해독제의 성분이 강한 약이라는 것을.

초월에 이르렀다 한들 독에선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혹여 당화서의 속셈에 목리원이 당할 것을 고려해 이를 보냈다는 것을.

함락시키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싸움은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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