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2 이부 팔장 - 감숙, 해후 (10)
* * *
굴은 일자로 뚫려 있었다.
그곳을 가로질러 움직인 목리원은 웬 거대한 장원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마인들과 정종의 무공을 익힌 이가 함께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중원에 우호적인 이들은 아니리라.
그런 판단에 검을 뽑았고, 백 단위가 넘는 무인들과의 전투가 그리 시작되었다.
위기는 없었다.
목리원은 그 스스로가 자신한 대로 이미 초월에 올라 일가를 이른 무인이었으며, 상대하는 이들은 최고가 초절정인 초월 아래의 무인들이었던 까닭이다.
적을 전멸시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목리원은 그들을 모두 무릎 꿇리고 장원의 문을 박차고 나가서야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금오 상단?’
들어본 이름이었다.
*
목리원이 금오 상단 전체를 홀로 정리하고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단원들이 금선우를 포박해 공동으로 돌아가자 우선자는 단번에 이 일의 배후를 눈치채고 무인들을 움직였다.
비단 공동 내부의 움직임만으로 끝낸 것이 아니었다.
감숙 무림맹 지부를 동원해 공동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허무하리만큼 깔끔했다.
금오 상단이 그간 마교의 주구로서 살아온 역사를 밝혀내는데, 총 사흘이 걸리지 않았다.
“상단주가 선우의 단전을 복원하기 위해 그들의 손을 빌렸다덥니다.”
우선자는 알아낸 내용을 예의 정자에 앉아 목리원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한창 천하상단이 세를 불릴 시기의 일인 듯합니다. 그때 이미 마교의 손에 금오 상단 전체를 넘겨버린 게지요.”
“…악의 뿌리가 깊구려.”
“그들이 중원으로 향하는 마인들의 교두보가 된 셈이지요. 이제까지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게 부끄럽기만 할 뿐입니다.”
마냥 말뿐인 겸양은 아니었다.
실제로 우선자의 낯빛엔 꽤 깊은 회한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 그의 탓이 아님은 자명하다.
목리원은 조심스레 말했다.
“누구도 몰랐을 것이오. 천하상단이 15년간 중원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때가 되어서야 알지 않았소? 그들의 용이주도함을 장문인의 탓으로 돌릴 이유는 없소.”
우선자는 그 말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낯빛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걸 더 티 내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였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여하튼 이곳에서의 일은 밝혀진 이상 저희 공동이 온 힘을 다해서 뿌리까지 뽑아내도록 하지요. 대협께선 이제 떠나려십니까?”
“그래야지. 이리 빨리 끝날 줄은 몰랐지만 임무가 끝난 차에 더 있을 이유는 없지 않겠소.”
“만남이 짧아 아쉽군요.”
“연이 된다면 또 볼 것이오.”
“그렇겠지요.”
우선자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우존자의 암자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
백경오는 마지막으로 스승의 암자를 정돈했다.
이부자리를 곱게 개어두고 청소를 끝마쳤다.
바닥은 윤이 날 정도가 되었으나 생활감은 더 없어졌다.
그 사실이 조금은 아파 왔고, 이내 아물었다.
마당 한가운데 선 백경오는 지그시 웃으며 절을 했다.
‘이만 다시 가보겠습니다.’
스승의 뜻을 이제야 이해한 우둔한 제자가 되어 죄스러울 뿐이다.
이리 칠상권을 펼칠 수 있게 되었음을 혹 그곳에선 알고 계실는지.
부디 그러기를 바라며 백경오는 한참이나 절을 한 후에 몸을 일으켰다.
가슴은 조금 후련했다.
이때까지 해묵어 있던 괴로움이 전보다는 조금 더 가셔있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그에 괜스러운 개운함을 느끼며 뒤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얌마! 이제 출발해야 하니까 빨리 와!”
어느덧 단원들이 그곳에 있었다.
외친 것은 특히 성이 나있는 남궁소아였다.
그리 긴 시간을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저리 성질인지.
“거참 인내라곤 모르는 족속이구나.”
라고 말하니 곧장 긁힌 남궁소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백경오는 무시한 채로 지나갔다.
남궁소아가 발버둥쳤고 단원들이 막았다.
“차, 참아!”
“비켜! 비키라고! 오늘 저놈이랑 나 둘 중 하나는 죽을라니까!”
“어휴, 또 난리네.”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사뭇 유쾌하다.
그다지 신경쓸 일 없는 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덧 이리 마음속에 파고든 듯하다.
인연이라, 역시 모를 일이지.
“왔느냐.”
목리원은 봇짐을 맨 채로 현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우선자가 자리해 있었다.
백경오는 우선자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엔 무서운 사람이었고, 또 언젠가는 원망스러운 사람이었던 그가 이제야 그저 인간으로 보인다.
사실 그 또한 우존자를 잃었던 사람 중 한 명일 뿐일 텐데 그땐 왜 그리도 원망하기만 했을까.
그런 마음에 무심코 입을 열게 된다.
“언젠가 또 들르겠습니다.”
“음…?”
우선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백경오를 한참이나 바라봤고, 그 끝에서야 잔잔하게 퍼지는 미소를 그려냈다.
목소리는 조금 젖어들어 있었다.
“…그래, 언제고 다시 오너라. 공동을 너를 기꺼이 반길 것이니.”
“그간 신세 졌습니다.”
백경오는 포권을 취했다.
우선자 또한 그에 마주하여 포권을 취했다.
이후에야 백경오는 목리원에게 이를 수 있었다.
“돌아가지요. 맹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꽤 낯간지러웠다.
목리원은 그런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기생오래비처럼 웃으며 답했다.
“그래, 가자꾸나.”
둘,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넷의 단원은 그리 걸음을 옮겼다.
*
감숙에서 무한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올 때보다 빨랐다.
실질적인 시간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나 분위기가 가벼워 그리 느껴진 것에 가까웠다.
아무렴, 닥친 급한 불을 끄고 백경오의 분위기 또한 평소보다 누그러졌으니 오죽 그랬겠는가.
물론 누그러졌다 해도 다른 단원들의 속을 뒤집는 언행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단주님, 그냥 쟤 축출하면 안 돼요?”
남궁소아가 가장 극성이었다.
어찌 부단주라는 직위에 그리도 책임감이 강한지 단원들이 헛짓거리를 할 때마다 목리원보다 뒷목을 잡는 게 그녀였다.
사실 목리원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인지라 헛웃음만 나왔지만, 그런 말을 해봐야 이 아이의 속만 더 상하게 할 것이니 말은 아끼는 중이었다.
여하튼 그리하여 겨우 맹의 본단에 도착.
“나는 잠시 보고를 하고 올 테니 쉬고 있거라.”
“넵!”
단원들은 이제야 임무가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에 한결 편해진 얼굴로 쏜살같이 전각에 들어가 버렸다.
목리원은 그 모습에 또 쿡쿡 웃음을 흘리다 내각으로 향했다.
“오, 묵룡! 수고가 많았네. 소식은 들었어. 큰 일을 했다지.”
내각주 권표월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보고서는 이동 중에 이미 작성을 끝내둔 상태.
전처럼 일에 치여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일찍이 완성한 것이었다.
그것을 권표월에게 건네고 그간 밀린 소식이나 잡담까지 하다 보니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그럼 나도 슬슬 가보겠소. 내각주께서도 수고하시오.”
“그래, 푹 쉬시게.”
목리원은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내각을 나와 기지개를 켰다.
“끄응…!”
맹이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지겠지만 용봉단은 더욱 한가해질 것이다.
애초에 특수임무를 목적으로 만든 단이니 통상적인 업무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볼까.
목리원은 맹을 나서 걸음을 옮겼다.
향하는 곳은 무한에 위치한 당문의 장원이었다.
아직 당화서는 없겠지.
사천의 일로 바빠 움직이지 못했던 게 바로 저번 달이다.
조금 허하기야 하겠으나 어쩌겠나.
마음을 가다듬고 장원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목리원의 몸이 멎었다.
눈이 크게 뜨였다.
“소저?”
“오늘 임무를 마치고 오리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중을 나와 있길 잘했군요.”
당화서가 싱긋 웃었다.
간편한 복장에 머리도 자연스레 풀어 헤친 모습이라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아니, 그보다도 너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움이나 그리움이 단번에 치솟았다.
목리원의 입꼬리가 빙긋 솟아올랐다.
그것은 분명 단원들이나 다른 맹의 사람들에겐 보여주지 않는 순박한 미소였다.
“표정만 봐도 알겠군요. 자, 이리 오십시오.”
“너무 오랜만이오!”
와락 목리원이 당화서를 끌어안았다.
당화서는 후후 웃으며 목리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저 없으면 어찌 살려 그러십니까. 겨우 한 달을 못 봤을 뿐인데요.”
“소저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소?”
“글쎄, 어떨는지.”
섭섭한 말을 하기에 목리원이 눈을 좁혔다.
그러자 당화서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짙게 만들었다.
“눈을 왜 그리 뜨십니까?”
“섭섭하게 말을 했잖소.”
“장난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하며 당화서가 목리원의 뺨을 쓸었다.
목리원은 왜인지 손길이 닿은 부분이 타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니, 그뿐만 아니었다.
‘음, 벌써 더워질 시기인가.’
왜 이렇게 열기가 치솟는지, 괜히 더워져 떨어지려 했으나 당화서가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지막히 말했다.
“저도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진심이다.
목리원이 아는 것은 딱 그것뿐이었다.
그렇기에 한껏 웃을 수 있는 것이리라.
‘약이 잘 듣고 있구나.’
당화서가 당문의 금지에서 새로운 독의 조합법을 알아왔음은, 목리원이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는 문제였다.
당화서는 아주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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