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7 이부 팔장 - 감숙, 해후 (5)
* * *
기억을 되짚어 그 목소리를 되새기니.
“야, 반푼이.”
그날 괴롭힘을 자행했던 꼬맹이는 세상물정 모르는 화초였다.
곱게 다려진 도복과 멀끔한 얼굴, 허리에 찬 목검은 반듯했고 표정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일찍이 철이 들었던 백경오는 꼬맹이를 상대해봐야 본인만 손해이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관되지 않으려 했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큭…!”
아이의 악의는 집요하다.
순수하기에 정도를 모르고 또한 순수하기에 죄의식을 모른다.
그저 우존자의 자리를 빼앗긴 것같다는 기분만으로 사람을 그리 비참하게 굴렸으니 말이다.
백경오의 육신은 나날이 병들어갔다.
걷어차이고, 목검으로 얻어맞고, 땅에 머리가 처박히고 또한 아이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강제로 퍼먹는 일도 참아야 했다.
그런 일을 홀로 감내했다.
우존자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 탓이었다.
다행인 점은 그들의 괴롭힘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까지 미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달리 말해 상처를 숨기는 일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응? 오늘은 왜 또 그리 꼬질꼬질하게 있느냐. 이 스승이랑 씻으러 가기라도 하게?”
“아직 청소를 덜 했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크하하! 그래, 다녀오거라!”
우존자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스승이 아닌 게 더욱 큰 도움이 되었다.
여하튼, 그렇게 참았다.
참을 수 있을 줄 알았고, 실제로 꽤 오랫동안 참는 데 성공했다.
단 하나, 그들이 역린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백경오는 절대 사고를 치지 않았을 것이었다.
“부모님이 흑도한테 죽었다며? 그때 같이 죽지 왜 구질구질하게 살아있어?”
히죽 웃는 얼굴로, 그 꼬맹이는, 그놈은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을 내뱉었다.
“살아서 민폐나 끼치면 좋아? 우존자님 뒤에 숨어 있으니까 세상이 네 것 같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리 틀리지 않은 비유였다.
그놈의 말을 듣는 순간 죽으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 했던 부모님의 얼굴이, 스러져가는 숨과 식어가는 몸뚱이의 감각이 다시금 엄습했으니 말이다.
현실과 괴리되는 감각이 몸을 덮쳤고,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기에 비명을 내지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뜬 순간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사, 사려져….”
“미아…. 자모해써….”
“꺼으, 우웨에엑!!!”
주먹은 피로 흥건했다.
눈앞엔 꼬맹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다리가 분질러져 있었고 누군가는 팔이 꺾여 있었다.
그런 것보다 더욱 심각한 상처를 지닌 놈이 있었다.
항상 앞장서던 놈.
공동의 대제자 후보 중에서도 단언 뛰어났던 놈이었다.
“그르륵….”
피거품을 문 채로 기절해있는 꼴은 꼴사나웠으나 그게 통쾌하진 않았다.
단전을 부숴버렸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책을 피할 수 없다.
즉,
“스승님….”
우존자의 이름에 먹칠을 해버렸다.
*
사태의 심각성이 보통이 아님은 자명했다.
다름 아닌 대제자 후보 여럿이 폐인이 된 사건, 그중 단전이 부서져 다시는 무공을 쓸 수 없게 된 이도 있었고, 하필 그게 기수에서 가장 재능있는 아이였다.
사고를 우존자 선에서 끝낼 수 없는 것이다.
그날은 밤늦은 시간 장문인 우선자가 암자를 찾아왔었다.
“사형,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게 어디 경오의 잘못이더냐.”
“사형!”
“이놈아!”
우존자는 호통을 쳤다.
“사건의 경과를 이미 다 들었다. 먼저 괴롭힘을 자행한 것은 그 아이들이다! 아느냐? 경오의 몸에 아직도 상처가 가득하다! 깊게 흉이 파고들었는데 그걸 제때 처치하지 못해 평생 흉이 남게 생겼다! 한데도 너는 그 어린 것들의 편을 들 것이더냐!”
잘못을 따지자면 그 아이들의 죄가 맞았다.
우선자도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나 인륜과 거리가 있었다.
“아시잖습니까. 선우가 어느 집 아이인지.”
백경오가 폐인으로 만든 선우는 감숙에서도 그 이름이 드높아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상단의 자식이었다.
막 천하상단이 태동하여 세를 불리는 와중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상단의 자식.
그런 집안의 적자를 문파에 맡겼는데 폐인이 되어 돌아온 꼴이란 말이다.
외부적으로 마찰이 좀 심하겠는가.
실제로 당시 선우의 집안인 금오상단에선 책임의 소재를 물어 백경오의 단전을 폐할 것을 요청해왔다.
“…제 실책입니다. 하지만 사형, 일이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우선자의 슬픔에 잠긴 목소리와 우존자의 침음은 백경오의 속에 깊게 박혔다.
깊은 절망감을 선사해주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하여 백경오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죄뿐이었다.
우선자가 떠나간 직후 백경오는 우존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나서, 그래서 죄송해요.”
“경오야.”
“죄송….”
“무엇이 죄송하다는 말이냐!”
그 호통에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스승님…?”
“세상 누가 피해를 입은 이에게 죄를 묻더냐! 누가 악인을 옹호하는 일을 옳다 말하더냐! 너는 무엇도 죄송해선 안 된다!”
백경오는 난생 처음 우존자의 눈물을 봤다.
“내가 미안한 일이지! 네가 그리 힘들어하고 있을 줄도 모르고 마냥 멍청하게 서있었던 내가 죄인이다!”
우존자는 그리 말하며 백경오를 끌어안았다.
스승과 제자가 똑같은 얼굴로 서로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우존자는 말했다.
“이 스승이 다 알아서 하마! 너는 아무런 걱정도 말거라!”
그는 끝까지 어버이였다.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그런 어버이.
*
“내 단전을 폐하겠소.”
금오상단으로 찾아간 우존자가 한 말이었다.
“제자의 죄는 곧 스승의 죄요. 내 단전을 폐하는 것으로 대신 죄를 짊어지겠소. 미안하오.”
그는 공동의 최고수라는 스스로의 가치를 대가로 백경오를 구하고자 했다.
모두가 그의 뜻을 말렸다.
하지만 고집불통 우존자는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으로 이 일은 끝내주시오.”
하며 우존자는 금오상단의 상단주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의 단전을 부쉈다.
공동의 거목은 그리 무너지고 만 것이다.
“스승님!”
뒤늦게야 소식을 들은 백경오는 황망함에 외쳤다.
우존자는 웃을 뿐이었다.
그것이 백경오를 더욱 슬프게 했다.
“어째서…!”
“경오야.”
우존자의 솥뚜껑 만한 손은 더 이상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의 미소엔 뒤늦게 몰아친 세월이 깊게 박혔다.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지 우존자는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반푼이가 아니다.”
“그런 얘기가…!”
“초식을 못 쓰면 뭐 어떠냐. 사고 한번 쳤으면 뭐 어떠냐? 네 나이대 애들은 다 사고 한번씩 친다. 나도 그랬다. 초식? 그게 없이도 나 잘났다 하는 장로놈들 제자를 다 두들겨 패주지 않았더냐.”
그것은 분명 백경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게 만드는 말이었다.
“너는 이 절악권 우존자의 제자 백경오다! 가슴을 펴라! 몇 번이고 일어나라!”
그는 백경오가 울다 지쳐 쓰러지는 순간까지 그를 끌어안았다.
그것이 백경오가 기억하는 마지막, 우존자가 건강했던 모습이었다.
아직도 잊지 못할 그의 모습은 그러했다.
*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목리원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존자께서는….”
“사형께선 나이가 나이였던지라 몸이 더 버티지 못하셨습니다. 공력으로 세월을 피해 갔으나 그게 끝나니 그새 병들어버리셨지요.”
“아….”
“4년을 더 못사시고 타계하셨습니다. 그날 경오는 공동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우선자가 비어버린 찻잔을 매만졌다.
“찾으려 해도 할 수 없었지요. 나중에야 경오가 용봉지회에 나서 광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만 알게 됐습니다. 찾아가지 못했지요. 염치가 없어서.”
그의 고개가 더욱 깊이 떨어졌다.
“…못난 탓입니다. 다 제가 못난 탓이었지요.”
무어라 섣불리 위로의 말을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제자를 위한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것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스승의 죽음이 얼마나 아프게 다가올지 목리원은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백경오라는 인간의 과거.
그가 살아온 과정과, 이리 커오면서 느꼈을 응어리의 편린.
목리원은 마찬가지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침묵이 정자를 휘감았다.
*
백경오는 괜히 속을 심란케 하는 지난 일을 털어냈다.
그리하고선 우존자와 함께 살았던 암자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곳곳에 아직 그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젠 다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또 속이 아프다.
괜히 마음이 시큰거리는 것에 백경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 우존자의 침상에 든 순간이었다.
‘…!’
병든 우존자의 수발을 들었던 자리.
개어진 이불 위로 꽤 최근에 놓아둔 듯한 빳빳한 서신이 봉해져 있었다.
곧장 백경오는 서신을 낚아채 풀어헤쳤다.
그 순간 백경오의 숨이 멎었다.
[은원을 풀 때가 되었다. 홀로 와라.]
라는 짧은 문장과 함께 서신 속에 동봉되어 있던 것이 있었다.
금오상단의 장자인 선우가, 백경오가 폐인으로 만들었던 그 선우가 공동에 있을 적 목검에 달고 다녔던 수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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