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85화 (285/334)

EP.286 이부 팔장 - 감숙, 해후 (4)

* * *

“응? 이게 안 된단 말이냐?”

백경오는 우존자의 의아함이 서린 목소리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공동에서도 가장 기초에 속하는 권법 초식을 시연하며 했던 말이었다.

때는 6세, 백경오가 제게 투천성이 깃들어있음을 깨달은 나이이고, 단전을 만든 나이였다.

“하체를 단단히 지탱한다. 상체를 곧게 펴고 주먹을 정면으로 내지른다. 이게 끝이 아니더냐.”

우존자가 턱을 쓸며 말했다.

하지만 백경오는 그리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효율적인 움직임이 있잖아요.”

왜 굳이 불필요한 동작을 섞어야 하는가.

스스로 떠올린 것인지 별이 이끈 것인지 모를 의문이 그에게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었다.

거부감.

주먹을 내지르는 과정에 있어 불필요한 허초를 섞어야 함에 몸이 극렬한 혐오를 내보였다.

감정을 추스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님은 본능의 영역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날아가듯 주먹을 뻗어 상대를 짓이겨야 성이 풀린다.

그 과정에서 상처 입어도 괜찮다.

싸움이란 게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처절하게 비명 지르는 것이 곧 투쟁이란 말이다.

어린 백경오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우존자는 말을 들으며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아니, 안타까움보단 동정심이었을까.

“그래, 그리 생각하더냐.”

솥뚜껑만 한 손이 머리를 쓸었다.

“하지만 경오야. 우리는 투사가 아니다. 도인이지.”

악을 멸하는 일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잔인하게 굴 수 있는 것이 우존자였다.

하나, 그런 우존자라 한들 언제나 속에 새기고 있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무공은 마음의 수양이다. 모든 형(形)과 식(式), 그리고 그 속의 의(意)는 수양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에 쓸모없어 보인다 한들 놓아버려선 안 되는 것이다.”

머리로는 그의 말을 알 수 있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준 은인의 말이다.

그것을 온전히 납득할 수 없음에 백경오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느껴야 했다.

우존자는 그것마저도 감싸 안아줬다.

“…죄송해요.”

“괜찮다. 경오야.”

그는 투천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초식으로 수양을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면에서 그를 돕고자 했다.

달리 말해 백경오를 놓지 않았다.

하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형.”

우선자는 당시 막 장문인이 되었었다.

문파의 가장 높은 사람.

백경오가 인지 속에서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리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못 하는 사람이었다.

“장로들의 반발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그 인간들이야 매번 투정만 부리지 않더냐.”

“그런 얘기가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백경오는 오성이 뛰어났다.

주변의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 좋았으며 또한 직접적이지 않은 말에서 진의를 찾아내는 능력이 좋았다.

우선자와 우존자의 말을 몰래 엿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입지를 깨달을 수 있었단 말이다.

“사형의 진정을 이어받을 새로운 제자를 들이라는 명이 있습니다.”

“되었다.”

“이대로 사형의 깨달음이 실전되는 것이 공동파 전체에게 해가 됨은 저도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누구든 깨달을 것이다. 나는 그리 대단한 수양을 쌓은 사람이 아니야.”

“사형!”

우선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당시 우존자는 공동의 제일이었다.

그가 혈천교의 혈사에서 쌓았던 무명은 절대 미비한 수준이 아니었고 동시에 그가 정리한 칠상권의 깨달음은 그 하나만으로 위대한 재산이라 할 수준이었다.

칠상권은 공동의 절기다.

그것을 익히고 탐구하여 후대에 더 나은 형태로 전수하는 것은 문파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업 중 하나였다.

더불어 기본이 내가중수법인 칠상권은 완벽한 초식의 이해가 없다면 그 진의를 다 발휘하지 못하는 무공이었다.

한데 그걸 이어받을 백경오가 초식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라니.

촌극도 그런 촌극이 없지 않나.

하여 제자를 새로 받아야만 하는 상황.

우존자는 끝까지 그를 거절했다.

“내 제자는 경오 하나다.”

고집불통.

“그러니 새로운 제자를 들이란 말은 말거라.”

절악권 우존자는 그런 사내였다.

*

사랑하는 이가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적지는 않겠지만 백경오는 확실히 아니었다.

“사부님, 제자를 더 들이시는 게 어때요?”

백경오는 자신 탓에 우존자가 곤란해지는 일이 너무 싫었다.

초식도 제대로 전수 받지 못하는 반푼이 탓에 갈등을 겪는다니, 목숨을 구해주고 길러준 그에게 얼마나 큰 민폐란 말인가.

백경오는 계속 그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이 욕심임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하지만,

“싫다!”

우존자는 생각이 달랐었다.

“경오야! 스승과 제자라 함은 곧 부모와 자식과 같은 법이다. 한데 어찌 자식이 못났다고 다른 자식을 들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이더냐!”

그날의 그는 드물게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분명 초식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못난이다! 그럼에도 내 자식이다! 이 우존자는 절대 자식의 모자람을 허물로 삼지 않는 남자다!”

한마디 한마디가 속에 파고든다.

의도한 말일지 아닐지를 생각하는 일조차 죄스러운 선언이었다.

백경오는 그날 눈물을 흘렸다.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우존자에게 고마웠던 까닭이다.

“알겠느냐! 이런 당연한 일도 모르고 스승을 욕보였으니 오늘은 면벽수련이다! 가서 벽 앞에 앉거라!”

누런 이를 환히 보이며 웃는 모습이 어찌나 든든했던지.

백경오는 끅끅 숨이 끊겨 나오는 중에도 벽으로 향해 머리를 기대 울었다.

“사내는 그리 쉽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제자 문제는 더 말하지 말거라!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그는 비단 위로뿐만 아니라 해결책까지 생각해둔 상태였다.

다시 그날을 돌이키길, 그의 방법은 참으로 그럴싸했다.

백경오의 실수만 없었더라면 정말 완벽했을 것이다.

*

“사형은 문파에서 고른 아이들에게 무공만을 따로 교육해주기로 했습니다.”

우선자가 말했다.

“나쁠 것 없는 일이었지요. 애초에 장로들이 원한 것은 사형의 깨달음이 그대로 묻히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랬소?”

“예, 정확히 경오가 9살이 되던 날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문파에서 대제자 후보로 거론되던 아이들이 사형에게 교육을 받았지요.”

목리원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 속에서 우선자는 조금 더 편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였습니다. 사실, 그렇게 되었어야 했습니다.”

“되었어야 했다는 말은… 결국 잘 안 되었다는 뜻이겠구려.”

우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씁쓸함이 얼핏 보였다.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저의 죄였지요.”

후회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으로 경오가 얼마나 특이한 위치에 있었는지는 이해가 되시지요?”

“그렇소. 확실히 특이한 자리에 있긴 하구려.”

“그것이 다른 아이들에게 편애로 보인 듯합니다. 아이들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요. 경오가 초식을 쓰지 못함은 이미 문파 전체에 잘 알려진 상황일진대 사형께서 그 아이를 놓지 않았으니까요.”

“내 자리를 빼앗겼다.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단 것이구려.”

무림에서 그다지 드물지 않았던 일이기에 목리원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각 문파의 최고수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은 다음대 문파의 주역으로 낙점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하물며 혈사를 막 지났던 당대엔 어떻겠는가.

구파씩이나 되는 명문 정파의 직전 제자다.

아이들이라 해도 그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 아이들이 경오를 괴롭히기라도 한 것이오?”

묻는 말에 우선자는 끅끅 웃었다.

“시작은 그랬습니다.”

“시작은… 이라?”

우선자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의아해하는 목리원에게 되려 질문했다.

“투천성. 그걸 타고났다는 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아.

목리원은 단번에 깨달았다.

포악하기로 따져도 별 중에선 수위에 꼽히는 게 투천성이다.

초식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쳐도 별이 주는 이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별이 주는 단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역으로 그 아이들을 두들겨 팼다거나…?”

“그랬으면 다행이지요.”

우선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경오도 참았습니다. 사형을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아이들의 괴롭힘이 더욱 심해져 갈수록 경오도 참는 일이 힘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투천성이 폭주했습니다. 그 결과, 괴롭힘을 자행했던 아이 중 두 사람이 폐인이 되었습니다.”

“…!”

“장문인이 되어 놓고도 미리 그런 걸 알지 못했던 저의 죄겠지요.”

우선자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목리원은 입술을 벙긋거리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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