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5 이부 팔장 - 감숙, 해후 (3)
* * *
우선자는 공동파 한가운데의 정자에 앉아 차를 달이고 있었다.
목리원이 다가가자 그의 고개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예, 여기는….”
“공동산의 정기가 가장 짙은 자리에 이 공동파를 세웠지요. 개중 또 가장 정기가 정순한 자리에 이 정자를 지었고.”
목리원은 그 말에 기파를 퍼뜨렸다.
확실히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맑은 기운이 가득했다.
“이리와 앉아 차부터 드십시오.”
목리원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백색의 찻잔을 받아 들었다.
따스한 기운이 가득했다.
“단원분들은 쉬고 계십니까?”
“그렇소. 긴 여정이 있던 만큼 일단 휴식이 필요할 듯하여.”
말하면서도 목리원의 목 끝에 계속 걸리는 질문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백경오에 관한 것이었다.
정황상 백경오와 공동파 사이에 연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백경오는 그걸 말해줄 것 같지 않으니 우선자에게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맹의 문제로 온 만큼 일 얘기를 먼저 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영 백경오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곤란하던 순간이었다.
“경오가 잘 지내는 듯해 다행스럽습니다.”
흠칫―
“…경오 말입니까?”
“예, 광룡이라 부르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틀렸습니까?”
틀리지 않았다.
그저 가장 질문하고 싶었던 일을 상대 쪽에서 먼저 말해주니 놀랐을 뿐이었다.
목리원이 입술을 뻐끔거리자 우선자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와 연이 있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그걸 말하고 다니지 않은 듯하더군요. 하긴, 이리 눈앞에서 보고도 모른 체를 해버리니 원.”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겠소?”
“그걸 말하고 싶어 운을 뗀 것이니 당연합니다.”
우선자의 시선이 찻잔을 향했다.
그는 가라앉은 낯으로, 다만 말을 이었다.
“경오는 제 사형이셨던 우존자의 제자입니다.”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야! 백경오!”
남궁소아의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백경오는 흘긋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느새 짐 정리를 끝낸 것인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뭐냐.”
“뭐냐? 넌 짐 정리 안 해?! 오후엔 다시 조사하러 내려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여유부리고 있을 거야!”
백경오는 코웃음을 치며 버럭 화내는 남궁소아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남궁소아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았으나 백경오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난 잠시 산책 좀 다녀온다.”
“뭐? 야! 기다….”
“찾지 마라. 때 되면 알아서 올 테니까.”
휙!
그대로 백경오는 담장을 뛰어넘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돌아온 산이지만 그 풍경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아무렴, 이 산길을 올라가는 과정이 그리도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련할까.
덕분에 길을 잃는 일은 없었다.
담장 4개를 휙휙 뛰어넘어 산비탈길로 올라 구부정한 나무 사이로 132 걸음, 그리 나오는 내울가를 지나 커다란 쌍둥이 바위를 넘어서면 낡은 암자 하나.
그곳에 다다르니 들꽃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누군가가 계속 관리를 해왔던 것인지, 암자는 방치되었을 것이 분명한 13년동안 과거 모습 그대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흐려졌다.
백경오는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경오야! 오늘 수련도 준비되었느냐!
호탕한 노인네의, 짓궂은 목소리가 연신 귓가를 간질였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임에도 말이다.
*
백경오는 고아였다.
부모에게 버려진 것은 아니고, 당시 감숙을 들쑤셔댔던 파궐문이라는 흑도에 의해 부모를 잃은 쪽이었다.
파궐문의 패악질이 얼마나 심했느냐는 그들이 죽여댄 양민의 수가 천 단위를 넘어감으로 다 설명하는 게 가능하리라.
기본적으로 점조직.
그 규모 또한 상당하여 오랜 시간 감숙의 악몽으로 군림했던 그들인지라 소탕이 쉽지 않은 게 문제였다.
여하튼, 백경오가 우존자를 만난 것은 4세.
파궐문에 의해 마을 전체가 폭삭 무너진 난리통에서 차게 식은 부모의 몸 밑에 깔려 백경오가 숨을 잃어가던 와중이었다.
“아해야! 괜찮느냐!”
파궐문을 쫓던 우존자가 백경오를 구해낸 것이었다.
우존자는 부모의 몸을 깔아 누르던 건물 잔해를 헤집고 부모의 시신까지 고이 눕혀둔 후 백경오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점혈.
이어 그를 품에 안고 달리며 외쳤다.
“잠시 기다리거라! 내 너를 의원에게 보여줄 터이니!”
숨 쉬는 일조차 힘들었다.
백경오의 기억상으로는 흰머리가 지긋한 거구의 노인이 다급한 얼굴로 뜀박질을 했고, 자신은 그의 품속에서 흐릿하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감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길 그 점혈은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백경오는 의원에게 다다라 몸을 정양했고, 그제야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공동파의 절악권 우존자다. 아해야, 너는 이름이 무엇이더냐?”
백경오는 그제야 노인의 행색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소매가 찢어진 도복에 산적처럼 덥수룩하게 난 흰 수염, 가시처럼 삐죽삐죽 솟은 흰머리와 장독대처럼 불뚝 튀어나온 커다란 배, 거구.
그날의 백경오는 우존자의 솥뚜껑만 한 손에 겁을 먹었었다.
우존자는 그런 백경오를 안심시켰다.
“으허허! 겁먹지 마라! 나는 악을 멸절하는 일에만 주먹을 휘두르니!”
그의 말을 신뢰할 단서는 많지 않았다.
그저 험악한 중에도 초롱초롱했던 눈빛이 백경오의 경계심을 낮춰줬다.
이름을 말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경오, 백경오요.”
“경오라! 사내다운 이름이구나!”
한순간에 천애 고아가 되었고, 또한 그 과정이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어 당시의 백경오는 반쯤 폐인에 가까웠다.
사실상 정신이 멀쩡했다 한들 그 어린 몸뚱어리로 홀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 터였다.
중원은 그런 땅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경오야, 내 맥을 짚으며 봤는데 네 근골이 참으로 훌륭하더구나.”
우존자는 달리 말해, 백경오의 은인이었다.
“갈 곳이 없다면 내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생면부지의 어린아이를 제자로 받는 일이 그리 간단할 리가 없었다.
암만 근골이 좋다 한들, 공동파에서 그가 가진 지위를 생각해보면 더욱이 그랬다.
그럼에도 우존자는 그 순간 백경오를 선택했다.
그가 댄 이유는 하나였다.
“인연이 나를 네게로 이끌었을진대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하겠느냐!”
그는 참 막무가내였다.
*
“막무가내였지요. 사형은.”
우선자가 차를 호로록 마시며 말했다.
목리원은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물었다.
“그렇다면 경오는….”
“예, 사형의 제자로 들기까지 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장로들의 반대가 특히 극심했지요. 아무래도 미리 사형의 제자로 점지해둔 아이들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큰 문파는 대체로 그렇다고 들었소.”
“예, 저도 마찬가지로 말렸습니다. 솔직히 경오의 근골이 뛰어나다 한들 공동에서 고르고 고른 기재만은 못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투천성… 그 아이에게 내려진 별이 있긴 하지만 당시엔 아무도 그런 걸 몰랐으니 어련했겠습니까.”
우선자의 말은 옳았다.
백경오의 근골은 수재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가 후기지수 중 최강으로 꼽히는 이유는 투천성이다.
오가는 모든 수에서 투로를 읽어내고 빈틈을 물어뜯는 경향성.
인간보다 짐승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구현하는 변칙적인 수.
그런 것이 있어, 백경오가 강한 것이다.
“그저 속가 제자로 받자. 아니면 삼대 제자들 사이에 끼워 함께 키우자. 모두가 그리 말했으나 사형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끝까지 경오를 제자로 들이겠다고 난리를 치고 그걸 못하게 하니 도리어 조건을 내건 게 아니겠습니까?”
“무슨 조건이었소?”
“파궐문을 홀로 멸절하겠다덥니다. 2년동안 그 꼬리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파궐문을.”
우선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미소엔 그리움 따위가 묻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성공했지요. 사형은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분이셨으니.”
어느새 우선자의 찻잔이 비었다.
그는 빈 찻잔을 물끄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쯤 되니 장로들도 학을 떼며 사형을 포기했습니다. 경오는 결국 사형의 직계제자가 되었고요. 그 양반 고집은 이 정도면 충분히 아시겠지요?”
목리원은 작게 웃었다.
우존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스승이 떠오른 까닭이다.
고집 하나로 들여선 안 될 아이를 들였다는 점이 특히나 그랬다.
“좋은 분이신 것 같소.”
하고 말하니 우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너무 좋은 사람이었지요. 그게 문제였습니다.”
“음?”
“경오의 투천성이 발현한 것이 아이가 6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이야기가 나왔다.
목리원은 긴장을 삼키며 집중을 더했다.
우선자의 미소가 조금 씁쓸해졌다.
“그것 아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안타까움이었다.
“투천성을 타고 난 이는 초식을 쓸 수 없습니다.”
목리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음화 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