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2 칠장 - 절연, 인연 (9)
* * *
“뒷정리는 내가 하겠소. 제갈 형은 마을로 가보시구려.”
목리원은 그리 말하곤 빠르게 자리를 떠나갔다.
제갈산은 아직 멍했다.
정확히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해방감에 속이 텅텅 빈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
‘사람들은 이런 맑은 정신으로 살아왔구나.’
이제껏 살아온 삶이 뇌옥에 갇혀 날뛰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제갈산은 살아생전 타인과 관련된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사고가 마비되는 기분을 느꼈다.
왜인지 모를 불안감과 과거의 그림자가 겹치며 몸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꼈다.
한데 지금은 그런 게 없었다.
너무나도 맑은 정신에 너무나도 가벼운 몸이 어색한 기분을 일게 한다.
이제껏 구해온 이들을 되새긴다.
그들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쁨만이 가득해진다.
제갈산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목 아우.’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
이 못난 인간을 대신해 그 짐을 짊어져 준 호인을 어찌 대해야 할까.
영 고민이 떠오르는 일이었다.
제갈산은 그에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여하튼, 참….”
그야말로 협의지사라, 또한 객처럼 떠나가는 사람이라.
협객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없는 듯했다.
천살의 업을 짊어진 협객.
제갈산은 이제야 목리원을 조금은 이해했다.
*
마인들의 습격이 슬슬 소강되는 차였다.
갑작스런 마인들의 등장에 불안해하던 주민들 또한 한숨을 돌리며 주변인의 용태를 살피는 그런 순간.
제갈산은 다시 한번 홍선과 마주하고 있었다.
“다녀왔소.”
그 말을 내뱉으며 생경함을 느꼈다.
돌아왔다는 말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진 까닭이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홍선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그녀는 제갈산의 몸 곳곳에 나 있는 상처를 보며 한껏 가슴 졸이는 상태였다.
그 모습이 못내 앙증맞았다.
지금 그녀가 살피는 상처는 적에게 당한 상처가 아닌, 목리원에게 당한 상처인 까닭이다.
즉, 옅은 자상이었다.
“괜찮소. 이래 봬도 무인이오.”
“어찌 무인이라 해서 상처가 괜찮을 수 있겠나요. 어디 보세요.”
하며 홍선은 굳이 사양을 받지 않고 상처를 돌보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갈산의 속에 있는 어떤 여인을 향한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런 그리움 위로 다른 감정을 덧씌우는 형태였다.
이런 마음이 이상함을 스스로도 알았다.
기이한 성벽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 같은 엄하고 포용력 있는 모습이 속을 설레게 했다.
넘쳐흐르는 감정이 있어 제갈산은 다가온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런 일이 이젠 두렵지 않았다.
“읏!”
홍선이 놀라 흠칫함에 제갈산은 입을 열었다.
“그간 찾지 않은 것은 걱정 때문이었소.”
“그게 무슨….”
“나와 엮이는 이들이 대체로 불행했었소. 그게 걱정됐소.”
많은 것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속내를 털어놓아야만 이해를 바랄 수 있다는 마음에 얼버무린 말이었다.
그럼에도 홍선은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다.
그녀의 어조가 잔잔해졌다.
“…그랬습니까.”
“그랬고, 이젠 아니오.”
제갈산은 홍선을 살짝 밀어냈다.
이제야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작게 웃고 있었다.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이젠 더 피해 다닐 이유가 없어졌소.”
그 말에 홍선이 입술을 벙긋했다.
그러다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감사하다는 말은 하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들었소.”
“건너서 전해드릴 수 없을 정도의 감사입니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구려.”
“금칠로는 모자란 일을 하셨어요.”
절절함이 느껴졌다.
또한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제갈산이 느끼기엔 그랬다.
그것은 제갈산의 장난기를 일게 했다.
하여 제갈산은 장난스레 말했다. 조금의 진심을 숨겨서.
“그러면 말이오.”
“예.”
“자주 찾아와도 되겠소? 당신을.”
가슴팍에 얹어져 있던 홍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당황.
말의 의미를 뒤늦게 파악한 것인지 입술이 뻐끔거렸다.
“그, 그게 무슨… 아니, 잠시….”
“제대로 내 말뜻을 파악한 것 같소.”
키득키득 제갈산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반응이 사뭇 기꺼웠다.
홍선은 어버버하는 꼴로 한참이나 말을 흘리다 겨우 단어라 할 것을 내뱉었다.
“그게, 저는, 평민에 미망인에, 애도 있고….”
앙탈 수준의 거절이었다.
결국 다 변명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절연성의 주인, 제갈가의 가주, 다음 세대의 강호를 이끌어갈 대인 중 하나.
그런 점을 떼어내야만 보이는 하나의 진실이었다.
“오히려 좋소.”
그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가장 흥분하는 사람이었다.
탁!
제갈산이 홍선의 손을 맞잡았다.
홍선이 바짝 굳어 토끼눈을 만들었다.
시선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연신 핑글핑글 돌아간다.
“그, 그으….”
“부인께선 참 아름다우시구려.”
타인의 부인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결합해 전하며 샘솟는 배덕감을 어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망설임에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의 어머니, 그리고 한 사람의 여인.
그 간극에 제갈산이라는 이름 석 자를 새기고 싶다.
그런 욕망에, 제갈산은 드디어 솔직해질 수 있었다.
“자주 찾아뵙고 싶소. 그러다 더 참을 수 없게 되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두고 싶소.”
“아니이…!”
“허락받은 줄로 알겠소.”
“엄마?”
홍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홍선의 치맛자락을 당겼다.
제갈산은 훤칠하게 웃으며 홍윤에게 말했다.
“아버지라고 불러보련?”
“이, 이 미친 사람이!”
짜악!
홍선이 제갈산의 따귀를 갈겼다.
“어흑!”
제갈산은 불끈불끈했다.
*
사고의 수습을 마친 목리원은 한숨을 돌리며 마을 외곽에 앉아 있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제갈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그를 부르던 목리원은 이윽고,
“제갈 혀…!”
헤실헤실 웃는 그의 뺨에 난 손바닥 자국을 발견했다.
쩌저적, 목리원의 몸이 굳었다.
눈은 좁아지고 있었다.
뭔가… 뭔가 기분이 나빴다.
“…제갈 형?”
“아, 목아우.”
제갈산은 한껏 후련한 얼굴로 목리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목리원은 연유 모를 역함에 그와 거리를 벌렸다.
분명 홍선을 만나고 온 것일 텐데 저 뺨의 자국은 뭘까.
아니, 제갈산이라는 인간을 생각해보니 싫어도 떠오르는 추측이 있었다.
에이 설마, 그런 생각까지 해봤으나 불안한 예감은 또 틀리지를 않는다.
“미망인이라는 거, 참 좋지 않나?”
제갈산이 우수에 찬 눈으로 먼 산을 바라봤다.
목리원은 문득 생각했다.
정말… 정말 하면 안 되는 생각이지만.
‘이 인간의 별을 떼어놓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존재해선 안 되는 괴이의 목줄을 풀어버린 것을 아닐까.
중원에 대한 죄책감이 엄습했다.
*
마을의 정리가 다 끝난 차였다.
홍선은 포목점으로 돌아가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했다.
그걸론 안 되니 괜히 걸어둔 천들을 몇 번씩이나 털고 정리하고 그리해도 안 되니 장부 정리까지 하며 머리를 식히려 했다.
다 무용했다.
-자주 찾아뵙고 싶소. 그러다 더 참을 수 없게 되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두고 싶소.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도저히 지워지질 않는다.
아니, 도리어 선명해진다.
사내의 커다란 손, 낮은 목소리, 오똑한 콧대나 가느다란 눈매 따위가 함께 머릿속에 그려지는 까닭이었다.
“엄마!”
홍윤이 폴짝 뛰어 홍선의 품에 안겼다.
그 순간 부끄럽게도.
‘제갈윤….’
퍼엉!
홍선의 머리 위로 김이 솟았다.
“엄마 아파?”
“아, 아니야…!”
“아픈 거 같은데?”
“으응, 아니야아아….”
힘없이 고개를 도리질 치자 홍윤이 울먹거렸다.
어찌 이리 효심이 깊은 딸인지 이런 순간은 곤란했다.
둥둥 품에 안고 몇바퀴 돌자 그제야 진정하는데, 차라리 진정시키지 말 걸.
“근데 그 아저씨가 아빠야?”
“그건…!”
무어라 말해야 할까.
홍선은 바로 답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여인이 어찌 두 명의 지아비를 두겠는가.
물론! 첫 남편은 사랑해 혼인한 것이 아니라 한들 천륜이라는 게 있지 않나!
이게 얼마나 지탄받을 일인지 벌써부터 선명하단 말이다!
‘하,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것은 윤이의 교육에 좋지 않은 게 아닐까?
아니, 제갈산이라면 꽤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주지 않을까?
적어도 아이가 모자람 없이 자랄 수 있도록은 해주지 않을까?
스스로의 마음을 마주하기 차마 부끄러운 홍선은 홍윤을 핑계삼으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도리어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고 봐야겠지.
“유, 윤아.”
“웅?”
“아빠 필요하니…?”
“난 엄마만 있으면 되는데!”
“어, 어?!”
이걸 기뻐해야하나 슬퍼해야하나.
홍선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삐죽 솟고 있는 와중이었다.
“누나! 윤아!”
동생 홍창이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안색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마인의 습격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안 다쳤어?!”
그리 돌아온 홍창은 헥헥 숨을 내쉬며 홍선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 나니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왜 그래?”
왜인지 이상했다.
얼굴을 왜 저리 붉고 시선은 왜 하늘을 향해 있는 것인지.
웃는 꼴은 또 왜 저렇게 주책맞은지.
“응?”
“삼촌! 나 아빠 생겨?”
“으응…?”
홍창은 홍윤이 내뱉는 말의 맥락을 짚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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