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80화 (280/334)

EP.281 칠장 - 절연, 인연 (8)

* * *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아니, 분명 언제나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왔었다.

이미 이리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감내하고 살아야지 어쩌겠느냐고.

“대협! 마인들의 소탕이 얼추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수고했네.”

제갈산은 조갑이 끼워진 손을 바라봤다.

피가 붉었다.

덕지덕지 날붙이 새로 살점이 붙어있다.

이런 손이다.

‘한데.’

그럼에도 다가가고 싶다.

어쩌면 그런 손을 남에게 보이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내가 이리 괴로웠다고.

이런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고.

위로 좀 해줄 수 없겠느냐고.

제갈산은 작게 웃었다.

홍선의 엄한 얼굴이 공연히 떠올라버려서.

‘돌아갈까.’

답을 주기로 했으니 가야지.

주변을 둘러보니 엉망이 되었음에도 꽤 고요하다.

이미 마인들의 처리가 끝난 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더 거리낄 것은 없다.

그래, 한 번이라도 말해보자.

생각하며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쿵―!

“큭!”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스멀스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목을 콱 틀어쥐는 감각이 전신을 헤집었다.

그리 어지러운 속을 붙잡으니 들려오는 환청은.

-네가 가면 어쩌게?

또 발길을 멎게 한다.

제갈산의 숨이 가빠졌다.

불안감이 형상을 빚는다.

머리가 지잉 울리며 풍경 위로 어느 날의 기억을 덧씌운다.

그곳엔 숨이 멎은 모친이 고요하게 누워있었다.

-또 그런 장면을 보고 싶어서?

제갈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정처없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또, 하필.

아니, 언제까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통에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관성이 되어버린 두려움이 주춤 뒷걸음질을 자아낸다.

숨이 멎은 모친의 얼굴 위로 곧 홍선의 얼굴이 겹친다.

울고있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 홍윤의 모습으로 바뀐다.

‘안 된다.’

그것은 안 된다.

어찌 구해낸 삶인데 그리해선 안 된다.

이건 달아나야 한다.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제갈 형.”

목리원이 앞길을 막아섰다.

옷깃이 베여 있었다.

전투를 하고 온 것인가?

그의 옷깃을 벨 정도라면 얼마나 강자일까.

육마는 되었을 터다.

아니, 어쩌면 장로였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승리했다는 것이겠지.

다행인 일이다.

“…고생이 많았나 보군.”

제갈산은 빙긋 웃었다.

거짓 미소를 지어내는 일은 참으로 쉬웠다.

평생을 그리 살았기에.

“나는 마무리를 돕고 오겠네. 자네는 마을로 먼저 가 있어 주시게.”

그리 말하며 제갈산을 목리원을 지나쳐 가려 했다.

이대로 달아나야지.

여기까지 도주를 도와준 목리원에게는 고마운 일이나 이젠 그와도 더 인연을 이어갈 수 없을 듯하다.

한걸음 또 내딛는 순간이었다.

“못 가오.”

목리원이 제갈산의 앞길을 또 가로막았다.

“뭐?”

“못 가오. 아니, 안 갈 것이오.”

목리원이 웃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말이나 해대면서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지.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마무리를 하러….”

“무엇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오?”

정곡을 찔린 건가.

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빠져나갈 방법은….

스릉―

목리원이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았다.

“가려면 날 쓰러트려야 할 것이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진심이었다.

*

“목아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제갈산의 표정이 사뭇 날카로웠다.

기세 또한 그랬다.

하나 적의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것은 보다 불안감에 가까운 기세였다.

꼭 어린아이가 잘못을 숨기려고 전전긍긍하는 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갈산이 그리하고 있었다.

“제갈 형을 이곳에서 못 보내겠다. 그리 말하고 있었소.”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제갈산이라는 사내를 두르고 있는 별의 진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고독한 별이 그의 목을 죄고 있었다.

성운은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베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제갈산이 성난 눈빛을 만들었다.

“진심인가?”

겁박하듯 묻는다.

그것은 꼭 상처 입은 짐승이 털을 부풀리는 행위 같았다.

“진심이오.”

답하니 제갈산의 조갑이 절그럭거렸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진대.

“…후회할 짓을 하지 마시게.”

퉁, 그가 달려든다.

성운이 검로를 그린다.

*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갈산은 목리원이 어떤 무인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작금의 강호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천재(天才).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으로 어깨를 내리눌러 버리는 천재(天災).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손을 뻗었다.

보법을 발했으며, 그의 목덜미로 기파를 쏘아냈다.

쿵!

무용함을 스스로 증명했다.

허우적거리듯 손을 휘두른다.

목리원은 무감하게 그것을 막았고, 조금도 위험하지 않은 반격을 이어갔다.

그렇기에 공방이 만들어졌다.

제갈산은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어찌 나를 막느냐고, 내가 왜 이러는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고, 분명 괴로워지는 이가 생길 것이라고.

온몸으로 그런 마음을 전해봤으나 전해지지 않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귀를 막은 것인지 목리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발악했다.

기파로 안되니 심상을 발했고, 그에 목리원이 심상을 마주발했다.

치욕적일 정도로 지도 대련을 닮은, 그런 공방이었다.

그런데,

‘이건….’

어렴풋이 무언가가 전해져오고 있었다.

쿵!

언제나 목리원의 등에 매여 있던 검이 검로를 그릴 때마다 가슴 속이 시큰거렸다.

절연성이 비명을 질렀다.

어떤 풍경이 그려진다.

몸이 기계적으로 무공을 발하는 와중에도 정신만큼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이 이윽고 달하는 곳은 새까만 공간 속, 오도카니 서 있는 어린 날의 스스로를 비추고 있었다.

“아….”

혼자가 아니었다.

그곳에 함께 있는 것이 있었다.

지나쳐 자신에 의해 스러졌던 이들이었다.

*

무공은 비단 폭력을 이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련은 그런 가르침을 본으로 삼는 무공이었다.

비급은 더욱이 그랬다.

여성운이 남긴 심득은 실존하는 무엇도 베지 못하는 검이었다.

그저 마음속의 빗장을 베어 그 속을 드러내는 검이었다.

그러니 목리원은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갈산이 심상을 발하여 온전히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 그 속에 웅크려 있는 것은 그저 어린 소년이었다.

언제나 웃으며 스스로를 숨기던 의형의 속에 있는 것은 그런 소년이었다.

외로움에 떨고 이별에 아파하며 상처를 두려워한다.

그런 것들을 마주하지 못해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제게만 잘못이 있다 생각하여, 무엇도 짊어지지 못하는 소년의 몸으로 무거운 것들을 잔뜩 짊어지려고만 한다.

목리원은 사실 그게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방법은 뻔했다.

무공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심상은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리원은 내보였다.

검을 휘두르며 약점을 내비치는 것은 어불성설임이라, 몸이 아닌 마음의 약점을 그에게 보였다.

그것은 별에 관한 것이었다.

천살성이 성련의 인도에 따라 흘러나온다.

절연성과 맞닿는다.

쿵!

그 순간 제갈산의 공세에 망설임이 깃든다.

아니, 애초에 존재했던 망설임이 형상을 바꾼다.

말로 하지 않아도 닿는 것이 있는 법이다.

제갈산에겐 분명 닿았을 것이다.

별이 그에게만 잔혹한 것은 아니었음을.

홀로 짊어질 필요는 없음이오, 또한 이런 별을 타고나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어느덧 공세의 망설임이 사라진다.

제갈산은 더욱 폭풍처럼 목리원을 몰아쳤다.

목리원은 그 모든 것을 받아냈다.

울분이었다.

제갈산이 쏟아내는 것은.

또한 원망이었다.

조갑의 시린 기파에 맺혀 있는 것은.

그럼에도 그가 후련하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리라.

다 쏟아낸다면 그 짐을 대신 짊어져 주리라.

그 어떤 신묘한 묘리와 검로도 드러내지 않았다.

진심을 토해내는 상대에게 어울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진심이다.

성련은 이끄는 별이므로 그리 토해내는 것들이 잘 흘러가도록, 투박한 길을 열어주기만 했다.

그리하고서야 끝이었다.

“흐으….”

제갈산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눈물을 툭 떨궜다.

그러더니 물었다.

“…왜 그랬나.”

“무엇을 말이오?”

“왜 이런 걸 보여주나. 왜, 왜 내가 가져야 할 것을….”

제왕성을 짊어질 때처럼, 또한 교의 업을 대신 짊어져 줄 때처럼.

이번 역시 목리원은 제갈산에게서 절연성을 떼어냈다.

그 무게가 성련에 들러붙었을 뿐이었다.

목리원은 답했다.

“제갈 형의 것이 아니었소.”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애초에 제갈 형의 것이 아니었소. 이런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어야만 하오.”

고독에 잠겨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주인이 있어야 한다니, 그것은 너무 슬픈 일이 아니던가.

설령 하늘이 점지했다 해도 부당한 일이라 외쳐야만 했다.

“그러니 내가 가져간 것뿐이오.”

“어째서?”

목리원은 빙긋 웃었다.

그런 질문을 위한 답이 이미 존재했기에.

“나는 협객이지 않소.”

또한.

“제갈 형의 아우이지 않소.”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협객으로서 누구보다 어려운 길을 가기 위해 빼앗은 것이오. 제갈 형의 별을 내가 도둑질했소.”

제갈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이제껏 그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후련함과 조금의 죄책감, 그리고 슬픔.

타인은 구할 줄 알면서도 스스로는 구하지 못했던 못난 의형은 목리원이 본 중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그에 목리원은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많소.”

홍선과 홍창, 홍윤 뿐만 아니라 그가 구했던 수많은 이들을, 그가 만나고 싶어 했던 수많은 이들을 만날 것이다.

앞으로 그리 살 것이다.

그는 별과 절연하여, 겨우 인연을 맺으며 살 것이었다.

제갈산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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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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