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0 칠장 - 절연, 인연 (7)
* * *
역시 즐겁다.
검과 검을 나누는 이 순간이.
생과 사의 틈새에 있는 아슬아슬한 협로 속에서 춤추는 이 순간이.
그리하여 번뜩이는 영감, 깨달음, 그것들의 개화와 낙화가.
천둥처럼 몰아치는 숨결이.
“잡았다!”
그리하여 걸음을 내딛길 경지가.
쩌저적!
패웅추는 강기를 깨달았다.
검붉은 마기가 피딱지처럼 환도 위로 들러붙어 목리원을 향해 짓쳐 들었다.
물론 유용하진 않았다.
불완전하다. 부질없으며 또한 추했다.
그렇기에 쾅! 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패웅추는 더 나은 수를 향해 나아갔다.
“이런…!”
목리원의 얼굴 위로 경악, 그리고 낭패 어림이 떠올랐다.
그조차 즐거워 패웅추는 크게 웃었다.
“왜 그러나! 웃어라!”
다시 한번 강기를 빚어냈다.
전보다는 온전하다.
하나 역시 모자랐다.
쩌어어엉!
깨져나감에 패웅추는 목리원의 강기를 살폈다.
그가 내보일 수를 예측한다.
공력을 수발하는 방식을 추론하고 적용하고 덜어낸다.
그 과정이 곧 온전함의 발판이 된다.
그런 일의 반복이었다.
영감이 스승이었고, 목리원이 교재였다.
“역시 너밖에 없다!”
목리원 밖에 없었다.
그 지긋지긋한 무료함을 깨부숴줄 상대는.
전력을 다해 부딪혀 이겨내고 싶은 벽은.
또한 그리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는.
향상심에 불이 붙는다.
승부욕이 비명을 지른다.
즐거워 미칠 것만 같았다.
처음 경쟁과 승리를 깨닫던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아,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무언가를 뛰어넘기 위해 나 자신을 깎아 내지르는 감각은 이리도 짜릿했었지.
생존본능 따위를 짓밟아버리는 찰나의 쾌락이 패웅추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것이 형상으로 나타나니, 패웅추의 환도 위로 씌워진 강기는 삐죽삐죽 엉망진창으로 날이 선 채로 굳었다.
그게 가장 완성된 형태였다.
“알겠다! 이거였다! 이게 완성이었어!”
패웅추의 안광이 소름 끼치도록 붉게 타올랐다.
그의 미소가 번들거림을 짙게 만들었다.
좌수와 우수를 동시에 뻗어내니 목리원이 일자로 검을 내리긋는다.
채애앵!
드디어 맞물린다.
힘씨름이 시작되었다.
“어떤가! 이제 내가 네놈의 상대로 적합한가!”
조잡한 승인욕구를 풀어내고.
“…이해할 수 없구려.”
그의 찌푸려진 얼굴에 보상받는다.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단 말이냐!”
“어째서 그런 힘과 재능으로 마도에 힘을 쏟는 것이오?”
“우스운 질문!”
이유는 하나가 아니겠는가.
“가장 본질적인 투쟁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네놈과 싸우기 위해선 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
하늘이 그리 정한 것이 아닐까.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시시껄렁한 대의를 위해 살라니, 그것은 패웅추에게 죽어 숨을 쉬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 단호히 거절하며 마기를 폭사한다.
콰아앙!
땅거죽이 다 뒤집혔다.
*
믿을 수 없는 재능.
언제나 그런 말을 들어왔던 목리원이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번만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정녕 가능한 일인가?’
패웅추의 검이 성장하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검로의 날카로움, 기의 폭발적인 순환, 그리고 강기의 벼려짐까지 모든 것이 목리원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형태로 성장하고 있었다.
검이 무겁다.
기세에 숨이 막힌다.
몸이 부하에 비명을 내지른다.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재능.
투쟁으로서 피어나는 인간 본연의 가능성.
목리원은 이것을 알았다.
살아생전 딱 두 번, 이런 인종을 만났다.
말해 무어 할까.
천마 이선, 그리고 검성 목선오였다.
과한 평가라고 하기엔 그의 존재와 성장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매 검초마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내는 이런 무아지경은 부정을 불가하게 만드는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언젠가 자신의 스승과 그 원수처럼 자라날 것이다.
처음이었다.
타인의 성장에 잡아먹히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하나!”
채애앵!
기껍게 웃으며 환도를 몰아치는 패웅추와 눈이 마주쳤다.
천살성의 살로가 열렸다.
그러자 길이 보였다.
하나,
끼기긱!
그곳으로는 검을 밀어 넣지 않았다.
패웅추도 목리원이 그리한 걸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만든 그가 말했다.
“…방금 무엇을 한 게냐.”
“무얼 물으시는지 모르겠군.”
“살로가 있었다. 네놈은 나를 이길 수 있었다. 한데 그리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분명 그러했다.
환도와 환도 사이의 작은 극점.
그곳으로 검을 찔러넣었다면 패웅추의 목젖을 관통할 수 있었다.
하나, 그리 이겨서는 안 됐다.
“나는 아직 7년 전을 기억하오.”
목리원은 패웅추와의 악연을 떠올렸다.
처음 만난 날, 그리고 오늘의 습격은 그 궤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패웅추는 목리원이 천살성에 이끌리길 바랐다.
이번 양동의 습격을 감행한 것은 교의 명령 이외에도 자신이 분노하길 바라는 패웅추의 마음이 있음을 목리원도 알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살귀로서 투쟁하길 바라였고, 그것은 목리원이 바라는 바와 동떨어진 이상이었다.
목리원은 7년 전 그날 협객의 검으로 패웅추를 이기겠노라 말했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그의 성장이 두렵다는 이유로, 또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하여 협객의 검을 버려 살귀의 검으로 그를 베어 넘긴다면 그것은 정녕 옳은 선택인가?
틀렸다.
목리원이 알기로 무엇도 증명하지 못하는 살행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과 진배없었다.
“나의 검은 협객의 검이오. 그리하기 위해서만 드는 검이오.”
“….”
“살검으로 당신을 이겨도 내가 이긴 게 아니지. 그저 천살성이 당신을 이긴 것이 될 뿐이오. 나는 나의 검으로 당신을 베어 넘겨야만 하오.”
그 순간의 패웅추는 목리원의 눈을 헤집듯 고요하게 노려봤다.
이윽고 맞닿은 검이 떨어졌다.
목리원과 패웅추는 정확히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나 기수식을 취했다.
패웅추가 씨익 웃었다.
“썩을 고집이군. 하지만 나쁘지 않다.”
못내 흥겹다는 목소리였다.
그는 실로 짙은 기꺼움을 느끼고 있었다.
본능만 남은 살귀의 검을 바란 일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보다 목리원이라는 인간 자체의 검에 조금 더 흥미가 생겼기에.
꺾이지 않고 돌아와 아직도 같은 말을 해대는 그의 꼴에 그 협객의 검이 무엇인지 궁금해졌기에.
“그러하다면 증명해봐라. 내가 넘어야 할 검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묵색의 기파가 목리원의 몸을 휘감듯 유동했다.
“마인으로서의 당신을 혐오하오.”
목리원의 검 끝에 시린 별이 맺혔다.
“하나, 무인으로서의 당신에게는 경의를 표하오.”
그것은 어떤 초식의 기수식이었다.
패웅추는 저 초식을 알았다.
7년 전 처음 있었던 승부에서 그가 최후로 내지른 일 검이었다.
“유성칠검의 3식 십이지검(十二支劍). 이것은 그런 이름이오.”
“결자해지로구나.”
기꺼이 받아주겠노라.
카앙!
패웅추는 환도를 맞부딪혔다.
그러자 그 사이로 작은 마기의 환이 맺혔다.
그 기운이 두 자루의 환도에 스며들었다.
마환투(魔丸投).
그날의 수법을 환도로 재현한 것이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패웅추만이 아닌 목리원도 느끼는 기시감이었다.
사사로운 수법을 넘어 오로지 일 검으로 승부를 보리라.
전처럼 애매한 결은 맺지 않으리라.
그리 서툴던 시절은 둘 모두에게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쿵―!
묵직한 굉음과 함께 공간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혹자는 결투에 서사를 입힌다.
누군가는 과정의 중요함을 부르짖는다.
또 어떤 이는 결투의 끝에서 검의 역사가 세워짐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런 허물을 벗겨 단 하나의 진실을 이르니.
“커헉!”
결투엔 승자와 패자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의 패자는 패웅추였다.
털썩, 그가 무릎 꿇었다.
가슴에 긴 자상, 한쪽 팔은 잘려 나갔다.
뼈속까지 갈린 깊은 상처이니만큼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미 주요 장기가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하나 패웅추는 그 일을 썩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 번뜩이는 별빛 속에서 어떤 경지의 흐릿한 형태를 보았기에.
“무엇이냐.”
고개를 들어 목리원을 바라봤다.
납도하며 숨을 길게 몰아쉬는 그는 태산과 같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에 미세한 상흔이 아주 그에게 닿지 못한 것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엇이냐니.”
“마지막 일 검이 무엇이냐 물었다.”
초식을 묻는 게 아니었다.
기의 수발 같은 기교의 영역을 일컫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보다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검엔, 그것이 담아낸 것엔 너무나도 반짝이는 어떤 추상이 존재했다.
패웅추는 답을 갈구했고, 그에 목리원은 답했다.
“말했잖소. 협의라고.”
검색
패웅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목리원이 포권을 취했다.
“좋은 승부였소. 무인으로서 잠드시오.”
그리고 돌아서 떠나간다.
경공을 발한 탓에 목리원의 신형은 너무나도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나 패웅추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숨이 스러지는 순간까지 곱씹을 뿐이다.
“협의라….”
눈을 감는 순간, 그의 입가엔 썩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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