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9 칠장 - 절연, 인연 (6)
* * *
저질러버렸군.
품속에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홍선이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치솟음과 동시에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아니, 상황이 안 좋은 것을 도리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 계시오. 나는 사람들의 대피를 도와야 하니.”
곧장 경공으로 자리를 떠났다.
느껴지는 마기가 꽤 여럿이다.
하지만 목리원 혼자서도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구태여 도우러 가거나 하진 않았다.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되리란 생각으로 부지런히 움직였고 그렇게 어느정도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킨 이후였다.
“호, 혹시 제갈 가주님이 맞으십니까…!”
이런, 시선이 끌린 듯하다.
하필 인근에 맹의 지부가 있던 것이 문제였다.
무림맹의 무인들 중 자신을 실제로 본 이가 몇 존재했던 것이다.
“잠시 아우와 외유를 나온 중 사고가 터졌군. 금방 수습될 테니 사람들을 잘 추슬러주게.”
“아우라면….”
“묵룡 말일세.”
“아!”
무인들의 얼굴 위로 희망이 번지기 시작한다.
제갈산은 작게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이름은 희망의 이름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다.
“빨리 움직여주시게.”
그리 말하고 제갈산은 돌아섰다.
인파 사이를 파고들어 혼란 속에서 사라질 요량이었으나….
“잠깐!”
탁!
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홍선에게.
*
목리원은 마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익숙한 마기였다. 게다가 이런 불시의 습격 또한 왜인지 기시감이 들었다.
꼭 이 마기의 주인이 모르는 이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
이윽고 그것이 들어맞았다.
“왔나. 묵룡.”
씨익 웃는 봉두난발의 사내가 있었다.
다부진 체격과 수염이 듬성듬성한 턱, 귀기 어린 눈빛은 여전했으나 그 외의 많은 것이 달라져있는 사내였다.
“…패웅추.”
권마 패웅추.
한데 이제 그를 권마라고 부를 수 없을 듯하다.
그는 깔끔한 흑색의 장포에 더해 칼자국이 남은 양손에 두 자루의 환도를 쥐고 있는 채였다.
“7년만이군.”
“보고 싶었다. 이대로 강호에 영영 나오지 않는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로.”
“우리가 언제 그리 애뜻한 사이가 되었는지.”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이만큼 애뜻한 것이 또 없지.”
패웅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리원은 물었다.
“검은 뭐 하러 두 자루씩이나 드셨소?”
“그러는 자네는?”
“난 번갈아 쓰오.”
“나랑은 다르군. 내 무공이 칼 두자루를 다 쓰는 무공이거든.”
휙휙 환도를 풍차처럼 돌린 패웅추가 이윽고 자세를 잡았다.
“어떤가, 전과 다른 점이 느껴지나?”
“칼을 두 자루씩이나 휘둘러 대는 놈들중 강한 자를 못 봤소.”
말하며 언혁에게 조금 미안해졌지만 목리원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저것은 과함이다.
하나 패웅추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알 일이지.”
화악!
마기가 그의 몸 위로 너울거렸다.
포악한 기운이 한껏 공간으로 뻗쳐 나왔다.
“자, 시작하자고. 우리가 살의 외에 나눌 것이 무에 있나.”
한결 같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 들을 말이 꽤 있는 줄로 알건만 이대로 답해줄 생각은 없는 듯하다.
“금방 끝내드리지. 이제 우리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스릉―
목리원이 흑야를 뽑아 패웅추를 향했다.
휙, 바람이 이는 소리가 짧게 스쳐 지나간 후,
쩌어어어어엉!!!
충격이 공간을 휩쓸었다.
*
제갈산은 제 손을 붙잡은 여인의 하얀 손을 바라봤다.
굳은살이 배고 곳곳에 흉이 져 있는 어머니의 손이었다.
거대한 장원의 안주인까지 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활력이 느껴지는 손.
누군가와 참 닮아있는 그것을 차마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오랜만이올시다.”
하는 수없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넨다.
홍선의 얼굴 위로 흐린 기색이 떠오른다.
“계셨지요? 계속.”
“무엇을?”
“돌봐주고 계셨음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요. 저도 제 동생도.”
티나게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 여인이 눈치가 좋은 걸까.
“어째서 찾아와주시지 않으셨나요?”
“왜 찾아가야 하오?”
“네?”
홍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제갈산은 조금 모질게 말했다.
“말했잖소. 그저 변덕으로 도와준 것이라고.”
그 변덕이 조금 길게 이어진 것이다.
아무렴, 더 가까워질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고, 그러하기에 자신에겐 너무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그것이 무너지길 원하지 않았다.
“좋은 어머니가 되어 달라 말했수다. 그 말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게 궁금했던 것이었고.”
제갈산의 시선이 아이, 홍윤을 향했다.
그제야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가 참 어여쁘구만.”
잘 씻기고 잘 입히고 잘 먹인 태가 나는 얼굴이다.
낯선 어른을 보고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아이의 성장이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이뤄졌다는 뜻이었다.
그것이면 족하다.
족하거늘.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홍선이 엄하게 말한다.
움찔하게 된다.
그녀의 어조가 꼭 아이를 혼내는 어투라, 제갈산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눈꼬리가 삐죽 솟아있다.
입이 굳게 다물려 있으며 눈은 부릅 뜨여 있다.
습관과 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진지해져야 할 순간이 되면 제갈산은 회피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 역시 그랬다.
“거짓말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보통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하겠다고 7년이나 뒤를 봐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홍연이 손을 더 꽉 쥐어온다.
“은공께선 사람의 눈을 마주하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실을 말하며 그리하셨죠.”
무슨 우습지도 않은 논리란 말인가.
헛웃음을 터뜨려 봤으나 영 그녀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질 않는다.
어찌 한번 본 사람을 그리 신뢰하는 것인지.
고작 그 인연 하나로 이렇게 질기게 달라붙으려 하는 것인지.
인연이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속을 괴롭게 만드는 것인지.
홍선의 호의가 참 기쁘고도 곤란했다.
이미 놓았다고 생각한 미련은 다시금 몸을 내리눌러 온다.
문득 목리원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 어떡하실 것이오?
어떻게 살 것이냐 묻는 것에 답하지 못했다.
제갈산은 그저 떠돌며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한다.
그런 생각이었으나, 돌이키니 그렇다.
‘내키지 않는다.’
사실은 사람들과 섞여 살고 싶다.
그들과 연을 맺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짐을 반복하며 그 인연의 실을 엮어 세상을 거닐고 싶었다.
그런 바람이 있었다.
그게,
“다시 말해주세요. 어째서 만나러오지 않으신 건가요?”
엄한 목소리에 돌연 샘솟는다.
제갈산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다물었다.
겨우내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 순간,
콰아아아앙!
-끄아아아악!
마을 어귀에서 폭음과 진동이 일었다.
대비해있던 사람들이 놀라 몸을 움츠리는 와중, 제갈산은 홍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다녀와야겠군.”
“은공!”
“이젠 내가 누군지 알잖소. 걱정일랑 마시오.”
도망칠 수 있어서 다행인 걸까.
아니, 아니다.
“답은 다녀와서 하도록 하지.”
언제까지고 도망만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제갈산은 뒤돌며 말했다.
“금방 다녀오지.”
싱긋, 그가 족제비처럼 웃었다.
*
“크하하!”
패웅추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환도를 휘둘러댔다.
목리원은 여유롭게 그를 피하며 착실히 패웅추의 몸에 상흔을 새겨갔다.
두 개의 환도를 다루는 기묘한 무공은 확실히 검로가 제한된다는 단점을 보완할 정도의 패도적인 묘리가 가득했다.
패웅추의 경지가 초절정 끝자락이다.
섣불리 일수에 끝내겠다고 검을 쑤셔넣었다간 도리어 상처 하나가 생길 수도 있음은 자명한 사실.
실낱같은 틈도 배제하기 위해 깎아먹는 검술을 구사하던 중이었다.
쿠우우웅!
마을쪽에서 진동이 일었다.
목리원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패웅추를 바라보니 거리를 벌린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내 목적이야 네놈 하나다만은 교가 그걸 허락해주지 않는 게 아니더냐. 내 어찌하겠어. 양동을 해야 내보내 주겠다는데 예이~ 알겠습니다~ 하는 수밖에.”
“…내가 생각이 짧았구려.”
사아아―!
목리원의 기파가 첨예하게 버려지기 시작했다.
검위에 새겨진 묵색의 별이 이윽고 쩌저적 굳어지며 강기를 형성했다.
조금의 부상 정도는 감수하더라도 이제는 확실히 끝을 맺고 마을 쪽으로 합류해야 한다는 판단.
그에 패웅추가 길게 미소지었다.
“재미없게 굴기는. 내 어찌 다시 만난 네놈인데 그냥 놓아주겠느냐.”
쩌어엉!
패웅추가 두 자루의 환도를 서로 부딪혔다.
불똥이 튄다.
검붉은 마기가 그 위로 타오른다.
“보인다. 보여!”
못내 기껍다는 듯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은 광인의 것이다.
완벽한 열세임에도 그조차 그의 유쾌함을 덜어내진 못하는 듯 보였다.
미치광이를 상대해줄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목리원은 기수식을 취했고, 그대로 패웅추에게 쏘아져나갔다.
그렇게 검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이것이구나!!!”
쩌어어어엉!!!
두 자루의 환도가 목리원의 검을 내리찍었다.
그 위로 타오르듯 굳어지는 것은,
‘…강기?’
강기였다.
불완전하나, 그럼에도 확실한 강기.
“자! 더 보여다오!”
패웅추가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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