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8 칠장 - 절연, 인연 (5)
* * *
아,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이제야 세상의 빛을 무사히 봤구나.
목리원은 어미의 품에 안겨 웃는 아이의 모습에 절로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홍선.”
“음?”
“저 여인의 이름이라네. 그때의 남동생은 홍창이라는 이름이었지.”
“아….”
그런 이름이었나.
목리원은 여인을 자세히 살폈다.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밝았다.
그때 제갈산의 품 안에서 떨던 여인은 임산부답지 않게 초췌한 몰골이었으나 지금은 잘 먹고 다니는 건지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었다.
옷차림도 참 정갈하다. 아이도 노란 옷을 잘 입혀둔 것이 참 어여뻤고 그것보다 두 사람의 미소가 더 어여뻤다.
“우리가 구한 미소라네.”
제갈산이 말했다.
문득 목리원은 속이 참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이내 목리원은 그의 말을 정정했다.
“제갈 형이 구한 미소지. 나는 별 수 없이 따랐었소. 그때는.”
“그랬나?”
“제갈 형이 말장난으로 날 흔들지 않았소. 처음엔 말이오. 나는 제갈 형이 저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려고 그 장원에 들어가는 줄 알았소.”
“날 뭘로 보는 건지 의심스럽네만.”
“유부녀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색마로 아오.”
“틀리지 않군.”
큭큭 제갈산이 웃었다.
장난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뿌듯함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목리원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오?”
“기반을 잃고 안휘를 떠난 이들이 아닌가. 포목점을 한다는 말이야 들었는데 영 눈에 밟혀 그간 여러 도움을 줬었지.”
“만나서 인사는 나누었고?”
“….”
뒤에서 몰래 도와온 게로군.
알만했다. 절연성을 염려한 것이겠지.
더 가까워졌다간 저들이 별의 해를 입을까 노심초사했겠지.
이 미련하고 정 많은 의형이라면 분명 그리했으리라.
“왜 인사 한번 나누지 않았소. 그 정도는 괜찮았을 텐데.”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는 법일세. 뭐든 처음이 어렵다지 않나? 그 처음을 넘고 싶지 않았네.”
“아직도 그런 마음이오?”
“….”
이번 역시 제갈산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목리원은 사뭇 그에 대한 동정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연을 바라는 일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삶을 목리원은 모른다.
천살성은 그 기질을 숨긴다면 사람과의 만남만큼은 허락해주니 말이다.
누군가의 안녕을 빌기 위해 그 사람의 인생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보려 했으나, 또한 공감해보려 했으나 목리원은 절연성의 주인이 느끼는 절망감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와줄 수 있겠나?”
“어째서요?”
“앞으로 또 얼마나 도와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때가 아닌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고민이 있으면 들어주고 싶어 그러네.”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치미는 중에도 목리원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제갈산의 기색은 사뭇 간절했다.
*
객잔을 나서 곧장 포목점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멀찍이 거리가 있었음에도 홍선은 목리원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그를 알아보고 눈을 큼직하게 떴다.
“대협?”
벌떡 일어나며 내는 한껏 놀란 목소리를 보니 사람을 착각한 것도 아닌 듯했다.
만난 것이야 그 난리 중 찰나였을 텐데 어찌 이리 단번에 알아보는 걸까.
새삼스러움이 느껴져 목리원은 생긋 웃었다.
“나를 알아보시는구려.”
“어찌 잊겠나요! 저희 은인이신데!”
홍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딸을 안아 들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목리원을 바라보다, 이내 입을 ‘헤’하고 벌리며 풀린 얼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쁘다아….”
목리원이 킥킥 웃었다.
와중에도 홍선만 어수선했다.
“어찌 여기로 찾아오셨나요? 이럴 줄 알았으면 대접할 준비라도….”
“되었소. 마을에 들른 중 아는 얼굴이 보여 잠시 들른 것일 뿐이오.”
그 말에 그제야 홍선이 조금은 진정했다.
하나 완전히 마음을 놓은 것은 또 아닌 듯 보였다.
영 호흡을 되찾지 못하는 꼴으로 목리원을 보다, 저 멀리 다른 곳을 두리번 거리던 그녀가 이내 물었다.
“혹, 그분은 함께 오지 않으셨나요?”
그분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 되려 의심스러운 상황이겠지.
목리원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제갈 형이 이곳에 있다오.
저 건너편의 객잔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그저 말을 내뱉으면 끝나는 일이나 목리원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제갈산이 제갈가의 가주라는 것조차 모르니 말이다.
“홀로 왔소. 일렀던 대로 지나가다 보여 들른 것일 뿐인지라.”
“아….”
옅은 탄식이 목리원의 속을 콕콕 찔렀다.
거짓말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꼭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내 대신 전해드리지.”
“아뇨, 직접 해야 하는 감사예요.”
“음?”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이젠 알아요. 그분이 누구이신지.”
홍선이 목리원을 바로 마주했다.
“대협께서 그 묵룡, 그리고 그분은….”
“잠깐, 그걸 어찌 아신 것이오?”
놀라 묻자 홍선이 답했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요. 이리 일면식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동네에 포목점을 차렸는데 놀라울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어요. 이곳 주민들 모두가 친절했고 개중엔 제갈가와 거래를 틔워준 분도 계셨죠.”
아, 그랬던 건가.
“모를 수가 없죠. 더해 당시 안휘를 들썩였던 것이 용봉지회임을 알구요. 암만 무림에 무지하다 한들 이리 젊은 고수분들이 하필 거기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나요? 아직 생각해요. 대협들께서 저를 굳이 도와주신 이유는….”
홍선이 지그시 웃었다.
“…호의였을 거라고. 여러분 말로는 협의가 되겠네요.”
괜히 속을 간질이는 말이 튀어나왔다.
목리원의 입술이 진정하지 못하고 연신 달싹였다.
홍선이 말했다.
“차마 도움받은 입장에서 직접 찾아가진 못했어요. 더 도와달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면 어찌하나 하구요. 그래도 말은 꼭 전하고 싶었는데….”
“엄마?”
아이가 홍선의 뺨을 쓸었다.
홍선은 아이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조금 아쉬움이 묻은 미소였다.
“…윤이에요. 홍윤. 대협들께서 구해주신 아이가 이만큼 자랐어요.”
그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목리원은 그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탈한 미소는 덤이었다.
‘제갈 형.’
아무래도 이 사람들에게 더한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소.
목리원은 그리 홍선과의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
제갈산은 돌아온 목리원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의 이름은 홍윤.
남동생인 홍창은 표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던가.
더 도와줄 일이 없는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지.
그들이 온전히 자립했음을 뜻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 알아봐주어서 고맙네.”
“저들이 제갈 형을 알고 있소.”
“그러한들 어쩌겠나.”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만인데.
뒷말은 삼켰다.
공연히 도와준 목리원의 수고로움을 펌하하는 일이 될 것 같다는 이유였다.
제갈산은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거면 되었네. 괜히 눈에 밟히는 것 하나가 없어진 게 아닌가.”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리원의 안타깝다는 듯한 기색이 영 고맙고 부담스럽다.
“목아우, 그리 보지 마시게.”
킥킥 웃은 제갈산은 말했다.
“기쁜 일이지 않나. 그냥 웃어주시게.”
여기서의 일은 이곳으로 끝맺은 것이다.
이제 다시 떠나볼까.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제갈산은 잠시 생각을 이었다.
구해주었던 다른 이들이 어찌 지내는질 보고 다녀도 될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어디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 시간이나 때워도 되겠지.
그리 생각을 이어가려던 중이었다.
“제갈 혀….”
쿵―!
진동이 일어났다.
마을 전체가 다 울릴 정도의, 저 외곽에서부터 퍼져나오는 진동이었다.
제갈산과 목리원의 숨이 멎었다.
이 힘, 진동, 그리고 공력에서 느껴지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했으므로.
“마기!”
목리원이 벌떡 일어나 마을 외곽을 바라봤다.
이것은 마기였다.
그것도 범상한 마기가 아닌, 지독한 수준의 마기다.
어찌 갑작스레.
그것도 하필 오늘 이 자리에서.
설마 이놈의 절연성이 또 일을 친 걸까.
제갈산이 덜컥 당황하여 굳은 순간이었다.
“제갈 형!”
목리원이 그를 일깨웠다.
“나는 저쪽으로 가보겠소! 제갈 형은 사람들을 대피시켜주시오!”
그리 말한 목리원은 답도 듣지 않고 마기가 울려오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제갈산은 잠시 멍했다.
그 끝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달려 나간 곳이 있었다.
“이보시오!”
“은공…?”
바로 맞은편, 포목점에서 우는 홍윤을 끌어안고 있던 홍선이었다.
“여기 계셨….”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대피부터 합시다! 어서!”
제갈산은 홍선과 홍윤을 안아든 채로 경공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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