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74화 (274/334)

EP.275 칠장 - 절연, 인연 (2)

* * *

목리원은 용중산의 자태에 크게 감탄을 흘렸다.

웅장함 따위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융중산은 그리 높지 않은 평탄한 지대의 작은 산이다.

목리원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산을 이루는 풍광의 고즈넉함이었다.

세월이 물씬 묻어나는 장원의 외관이 근처 초목과 어우러진다.

연녹의 얇은 나무와 함께 현판과 담벼락, 그리고 돌담 따위가 하나 된 형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 경계를 더욱 흐릿하게 만드는 안개가 있어 왜인지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해야 할까.

이곳이 제갈세가.

바로 앞 양양현을 지배하는 호북의 호족이자 무림 오대세가 중 하나의 본채.

이제껏 세가의 본채라곤 당문밖에 가보지 않았던 목리원에게 이는 꽤 기껍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정지, 누구십니까.”

안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리원은 그 순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안개가 진법이었구나!’

이리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세가의 장원 전체에 기감을 흐리는 안개가 둘려 있던 것이리라.

목리원은 서서히 열리는 현관 너머 걸어나오는 이를 바라봤다.

이윽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이오. 총군사.”

“총군사라니… 음? 묵룡 대협?”

그는 7년 전 무림맹에서 총군사 직을 맡았던 제갈가의 혈계.

제갈무연이었다.

세월이 세월이었던 것인지 팔자주름이 슬슬 그려진 얼굴.

그것이 이윽고 놀란 모양새를 취하기 시작했다.

“대협이 어찌 여기까지… 아, 맹의 일입니까?”

역시 무림맹에 있어본 사람이라 금방 아는 걸까.

목리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휴가차 나왔소. 맹의 용건도 있음은 부정할 수 없겠구려.”

“이해합니다. 아니, 그보다 이리 찾아오실 거면 미리 기별이라도 주실 것을. 낯선 이가 진법에 걸려 무슨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듯 제갈무연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세워두는 것도 실례겠지요. 일단 안으로 드십시다.”

“환대에 고맙소.”

목리원은 포권을 취하곤 그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들어선 제갈세가는 고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오가는 사용인들과 무인들 모두가 애써 고요함을 자아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의아해 목리원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조금 많이 조용하지요.”

제갈무연이 넌지시 입을 뗐다.

“작금 세가 상황이 조금 그렇습니다. 혹시 산이에게 저희 세가의 일을 들은 일이 있으십니까?”

“일이라면….”

“산이와 전 부인에 관한 얘기 말입니다.”

아, 그 얘기였나.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에서 들었소.”

“이후 어찌 되었는지도 들으셨는지?”

계모와 관련 일족들을 모두 축출해냈다던가.

이 또한 강호로 나올 적 들은 기억이 있어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무연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피바다였습니다. 근처 호족들 대부분이 그 여자와 연관되어 있던 만큼 축출 과정에 꽤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지요. 그 과정에서 산이가 독한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태상가주께서도 그런 산이를 굳이 말리지 않았지요.”

“…그랬소?”

“예, 그래서 가문의 사람들이 산이를 꽤 무서워합니다. 혹여 눈 밖에 나면 7년 전처럼 뎅겅 썰리지 않을까… 그런 공포 속에 살고 있지요.”

몰랐다.

무림맹에서 다시 만난 제갈산은 목리원이 아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조금은 장난스럽고 유쾌하며 정이 많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연하다.

그런 그가 사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니, 목리원은 직접 눈으로 보고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공연히 주변을 살피게 된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곳곳에서 피어나고 다시 저문다.

제갈무연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목리원은 그 시선들을 살피며 물었다.

“제갈 형이 칩거에 들었다는 말을 들었소.”

“칩거라고 해야 하나, 외부 일정을 모두 무시하고 있긴 합니다.”

“만날 수 있겠소?”

“일단 연락을 넣어보긴 하겠습니다. 저도 자주 얼굴을 보고 있진 못해서.”

“으음….”

“일단 이쪽으로.”

제갈무연이 한 장소를 가리켰다.

그 순간 목리원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곳은….”

숨이 다 막힐 정도로 짙게 기운이 뭉쳐있는 공간이었다.

반발력이라 말하는 게 옳을까? 작은 별채였는데, 그 공간에 가까워질수록 공력이 억제되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진법이다.

“태상가주님이 머무는 곳입니다. 아시다시피 7년 전 전쟁 이후 몸이 불편해지셔서.”

“…그렇구려.”

그를 지키기 위한 진법이란 것인가.

목리원은 무심코 이 진법을 뚫는 상황을 떠올려봤다.

‘몰래 다녀오긴 힘들겠군.’

저곳을 뚫으려면 제갈가 전체를 상대로 싸울 각오를 해야 했다.

그 정도로 엄중한 진법이었다.

진왕 제갈벽을 지키기 위한 진법으론 꽤 안성맞춤.

그런 생각이 목리원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일단 인사부터 나누시지요. 저는 산이에게 말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알겠소.”

제갈무연이 떠났다.

목리원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화아아악!

그 순간 퍼져나가는 기파, 그리고 종소리.

짜르르르―

청명한 종 수십 개가 동시에 잘게 울리며 공간의 침묵을 일깨웠다.

“누구인가?”

별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무뚝뚝하고 나른한 어조였다.

목리원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진왕님을 뵙습니다. 무림맹 용봉단의 목리원이라 합니다.”

소속을 밝히는 방편이 낫겠지.

답하고 가만 서있길 잠시, 드르륵 소리와 함께 별채의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사내의 인영이 드러났다.

“음, 자네가 온 건가.”

진왕 제갈벽.

그리 불렸던 사내다.

꽤 마른 몸에 스스로는 거동할 수 없어 바퀴 달린 의자에 몸을 뉘인 채다.

공력은 선천진기를 제외한 어느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건강 상태 또한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와중에도 하나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으니 안색이 참으로 평안해 보인다는 것.

7년 전의 그를 기억하는 목리원으로선 꽤 도드라지게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맹에서 사람이 올 줄은 알았네만 자네일 줄은 몰랐군. 들어오시게.”

시비가 제갈벽의 의자를 끌었다.

목리원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별채 내부를 보니 길이 평탄하다. 장애물을 다 치워 제갈벽이 움직이는데 방해될 요소를 배제한 것이 한눈에 보였으며 곳곳에는 시비가 각자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저들이 제갈벽의 생활을 돕는 이들이리라.

“소식은 들었네. 청룡비무회의 우승을 축하하네.”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드니 그가 미소 짓고 있었다.

이 또한 목리원으로선 놀랄 표정의 변화였다.

제갈산과의 관계가 호전되어서일까, 그가 지고 있던 짐을 놓아서일까.

무공을 잃었으나 전보다는 행복해 보이는 것이 꽤 다행스레 여겨지는 차였다.

목리원은 문득 그를 보니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 입술을 떼어냈다.

“아, 혹시 걸왕님과 연락이 닿으십니까? 폐관을 마치고 나오니 잠적하셨다는 말만 들려와서….”

전대 무림맹주 사백운을 만나러 갔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이상의 소식을 들려오지 않아 건네는 질문이었다.

그래도 제갈벽 역시 마일석의 지인이 아닌가.

혹시 단서가 있을까 싶어 기대감이 솟았지만, 안타깝게도 금방 꺾이고 말았다.

“잘 모르겠군. 떠나기 전 얼굴을 보긴 했으나 행선지는 듣지 못했네.”

역시 그런가.

목리원의 입가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무공도 고강하고 본디 개방 출신인 만큼 굶어 죽을 일은 없을 인간이지만 괜히 걱정됐다.

‘대체 소식도 없이 어딜 가 계신 건지 원.’

하며 안타까움을 토해내던 목리원은 이내 기색을 수습했다.

그리하며 그가 안내한 자리로 가 정좌했다.

시비가 차를 내왔는데 그 향이 꽤 좋았다.

제갈벽은 그제야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온 목적이 산이와 관련된 것이 맞는가.”

“아, 예.”

“다행이군.”

제갈벽이 찻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근래 고민이 많아 보였네. 한데 내겐 좀처럼 속을 드러내질 않아.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말일세.”

목리원은 가만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다 겨우 입술을 떼어내 물었다.

“혹, 절연성과 관련된 일은 아닐는지요.”

“그리 생각하나?”

“…저는 그렇습니다.”

“역시.”

역시?

하고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자네였군. 혈사때의 천살성.”

흠칫, 목리원의 몸이 떨렸다.

시선이 삐걱이며 제갈벽을 향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흘렸다.

“보통은 그리 바로 별에 관한 고민이리라 판단을 내리지 않네. 그 흉악함을 직접 겪은 이가 아니라면.”

첫 번째 실수, 제갈벽이 그것을 짚었다.

그리고 이어 두 번째 실수가 드러났다.

목리원이 실수한 것은 아니었다.

“7년 전, 천살성의 아이에 관한 일을 들은 적이 있었네. 걸왕님께선 그 아이와 아주 친밀한 사이인 것으로 보였고.”

청해 때의 일인가?

역성대법을 해석하던 때 도움을 준 것이 제갈벽이란 것은 목리원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를 알아낸 듯했다.

쿵, 쿵.

목리원의 심장이 뛰었다.

하나 불안감은 기우였을까.

“뭘 놀라고 그러나. 이를 책잡을 것이었으면 이미 7년 전에 했을 텐데.”

제갈벽이 피식 웃었다.

순간 안도에 몸의 힘이 확 풀리는 중, 목리원은 허탈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제갈 형 웃는 얼굴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제갈벽의 미소가 사뭇 장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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