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4 칠장 - 절연, 인연 (1)
* * *
용봉단이 무림맹에 돌아온 지도 1주일이 지났다.
목리원은 새삼 단장의 무게를 다시 한번 실감하고 있었다.
‘무슨 보고할 내용이…!’
이렇게나 많단 말인가!
임무 하나를 끝내니 서류 지옥이다.
임무 경비에 관한 사사로운 보고부터 시작해 일자별 임무 현황, 그리고 당문에 간 후로 각 단원들을 어찌 배치했는지 따위의 전략적인 내용까지 모두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하면 되지 않느냐?
안 된다.
지옥이었다.
왜냐하면 목리원은 그 모든 과정을 하나도 점검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각 좀 하고 움직일 것을!’
식사에 얼마를 썼는지조차 다 기억하지 못해 머리를 끙끙 싸매며 그리 서류에 푹 빠져 살기도 바쁘건만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주, 오늘 대련도 잘 부탁합니다.”
백경오의 대련이 있었다.
다른 단원들의 관리도 급했지만 이 문제보다 더 급한 게 또 없었다.
백경오의 투천성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투기를 해소해주지 않으면 뇌수까지 미치는 투기 탓에 어디서 사고를 칠지 모르니 이 부분에서만큼은 직접 나서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쿵!
“끄흑!”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다시 일하러 가보마!”
“옙…!”
주기적으로 투기만 해소해준다면 백경오보다 얌전한 단원이 또 없었다.
하루의 큰 일과를 마친 목리원은 슬슬 끝을 보이는 보고서 작성에 눈물을 머금었다.
‘아, 소저!’
이제야 깨닫소!
이래서 소저가 항상 일독에 빠져 산 것이었구려!
목리원은 새삼 7년 전 당화서가 느꼈을 무게를 실감하곤 눈물을 한껏 머금었다.
그런 중이었다.
“용봉단주, 맹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이오.”
참모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목리원은 힘이 턱 풀리는 기분을 느끼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뒷모습이 사뭇 처량했다.
가장의 무게였다.
*
거의 몇 주만에 보는 단주와 대주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지난 7년간 새로 부임해 어색한 얼굴도 더러 존재했다.
물론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목리원의 모든 신경은 아직도 남겨둔 보고서에 몰려 있었다.
하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은 각 세가의 동향이오.”
진행자인 진월단주 견동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리원의 고개가 들렸다.
‘세가의 동향이라.’
무림맹 측에선 당연히 파악해야할 정보긴 했다.
애초에 백도 무림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만큼 유력한 세력의 동향은 필수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으니.
“얼마전 당문주의 실종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소. 다들 들으셨겠지만 우리 용봉단주께서 힘내주셨지.”
견동이 느끼하게 눈빛을 보내왔다.
다른 단대주들은 박수를 치며 그런 목리원을 환호했고, 목리원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겨우 그들의 시선을 흘려넘기기에 바빴다.
그런 중에도 보고는 이어졌다.
“하북 팽가는 근래 하북 내에서 작은 비무제를 열고 있소. 세력의 규합이라기보단 7년 간 가라앉았던 지역의 사기를 높이는 것에 주안점을 맞춘 듯하오. 모용세가는… 권왕께서 타계하신 이후로 아직 침잠해 있던 듯하구려.”
모용진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체로 멍청한 짓을 일삼긴 하지만 수련만큼은 이가 갈릴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었지.
이따금씩 슬퍼하는 모습도 보였다.
역시 세가 전체가 그런 것일까.
“다음은 남궁가.”
목리원의 집중도가 확 올라갔다.
검치 남궁진천.
이제 그리 불리는 그는 곧장 안휘로 돌아가 경지의 안정에 힘쓰겠다는 의사를 보였었다.
뭘 하고 지낼까.
“검료… 검치 대협께서 민생 안전에 힘쓰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흑도 탄압에 나섰소.”
?
“대외적인 인식을 타계하겠다는 의도로 보이오. 아무래도 남궁가가….”
견동이 말을 아꼈다.
다른 단주와 대주들도 그다지 크게 다른 반응은 아니었다.
목리원은 이해했다.
‘검만 쓰는 바보 집단.’
남궁세가는 검왕 남궁혁이 한창 강호를 주유할 때 그런 인식이 강했었다.
그것을 현 가주가 어느정도 타계했으나, 그놈의 청룡비무제가 다시금 과거의 인식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검룡, 등장.
사람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 있던 청룡비무제 결승 비무대 한가운데서.
그것도 정적이 짙게 깔린 중 또박또박.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실책이 맞았다.
‘남궁형 의견은 아니겠지.’
딱 봐도 창성검 남궁운 대협이나 가주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평생을 남궁세가의 인식을 쇄신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임을 목리원도 모르지 않았다.
어찌 이리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참 사람을 유쾌하는 구석이 있는 인간이군.
목리원은 큭큭 웃음을 흘렸다.
“자, 다음으로는 제갈세가요.”
목리원은 반가운 기분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나, 들려온 말에 표정은 금방 굳어버렸다.
“제갈 가주가 칩거에 들어갔다 하오.”
기이한 말이었다.
*
애초에 지리적으로 무림맹이 있는 무한과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산이 같은 호북으로 묶여있는 만큼 맹과 제갈가의 교류는 꽤 활발한 편이었다.
그런만큼 기관진식이나 전략에 눈이 밝은 제갈가의 핵심인사들은 맹의 중역으로 일하다 퇴역하는 일이 잦았을 정도였다.
제갈가는 맹의 명백한 우군.
무림에 지배적인 인식 중 하나였고, 제갈가주의 칩거에 이리 많은 이목을 집중하는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물론 목리원에겐 그 일이 다르게 다가왔다.
‘제갈 형이 칩거라….’
왜인지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제갈산의 성정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을 법하다 하나, 결국은 그의 별이 문제였다.
절연성.
인연을 끊어 주인을 고독으로 밀어 넣는 별.
그리하여 홀로 더 반짝이길 원하는 별.
제갈산은 그 별의 주인이었다.
이미 그 별로 잃은 것이 존재해 자책속에서 살아본 사내였다.
혹여 또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치솟는 와중 마침 내각주가 된 권표월이 목리원을 호출했다.
“음, 제갈가로 잠시 다녀와 줄 수 있겠나?”
“제갈가라 하면 역시 제갈형의 일이오?”
“그렇네.”
권표월은 한숨을 쉬며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가주의 사사로운 칩거에 이리 맹이 나서는 것도 우스운 일임을 아네. 하나 알지 않은가. 맹의 입장에선 제갈가가 꽤, 아주 많이 신경 쓰인다네. 그들이 우리의 우군으로 있으니 제갈가의 암운이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단 말이지.”
목리원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이유를 알 필요가 있네. 한데 그런 이유로 맹의 무인까지 파견해 왜 칩거하고 있느냐 묻자니 그것도 모양이 이상하지 않나? 꼭 감시한다는 인상을 줄 수가 있단 말일세.”
“이해하고 있소. 집단의 입장이란 것이 있으니.”
“그리 말해주어 고맙네. 여하튼, 그런 중 자네가 있어서 부탁하는 것일세.”
권표월은 서찰 하나를 내밀며 목리원과 눈을 맞췄다.
“대외적으로 자네는 휴가를 맞은 걸일세. 마침 연인인 당문주도 사천에 있는 중이니 받은 휴가를 쓸 겸 의형인 제갈가주를 만나러 갔다. 소문은 그리 퍼질 것일세.”
그런 것까지 신경쓰는 것이 정치겠지.
목리원은 서찰을 받아들며 답했다.
“이 서찰을 제갈 형에게 전해주면 되는 것이오?”
“그의 기관진식에 대한 지식이 남다름은 우리 맹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자문이 필요한 진법인데 하필 이런 시기에 안 좋은 일을 겪으셨으니.”
마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권표월의 표정은 그만큼 곤란해보였고, 또한 걱정스러웠다.
한때 같은 맹에서 동거동락한 사이이니 그 나름의 정이 있는 것일까.
목리원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에 지그시 웃었다.
“걱정마시오. 내 잘 다녀와보지. 마침 서류 작업을 미룰 핑계가 생겨서 이리 반가울 데가 또 없구려!”
“아, 휴가는 서류를 제출한 뒤에 가시게.”
“….”
역시 안 되나.
목리원은 작게 탄식했다.
*
결국 밤을 샌 서류작업을 겨우 끝내고서야 목리원을 출발하실 수 있었다.
“단주님이 휴가라고요?”
남궁소아가 끔찍하다는 듯 질린 안색으로 말했다.
“그럼 저는 어떡하고요?”
‘저희는’이 아니라 ‘저는’.
저 말의 저의를 알 것만 같았다.
목리원은 괜히 먼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단주로서 잘 부탁하마. 경오 대련 상대는 꼭 해주고.”
“단주님? 저 부단주로 임명한 적 없다면서요?”
“오늘부터 부단주다.”
“싫은데요?”
“명령이다.”
“허허….”
남궁소아가 넋이 나간 듯 헛웃음을 흘렸으나 목리원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단원들에게도 알려져선 안 될 암중 임무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럼 다녀오마!”
다른 단원들에겐 서면으로 알려둔 상태.
목리원은 경공을 발하며 바로 담을 뛰어버렸다.
“단주니이이임!!!”
등 뒤에서 남궁소아의 절망에 찬 비명이 들려왔지만 지금 귀기울여봐야 속만 아릴 터.
‘홀로 다니는 건 또 오랜만이구나!’
목리원은 제갈산에 대한 걱정이 피어나는 중에도 참 오랜만에 가지는 혼자만의 시간에 작은 속시원함을 느꼈다.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북으로 달려 융중산.
“이곳이 제갈세가…!”
운무에 휩싸인 거대한 산맥이 그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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