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50화 (250/334)

EP.251 이부 사장 - 단주 (3)

* * *

용봉단의 전각은 느지막한 아침이 되어서야 한 자리에 모였다.

단주의 집무실이었다.

그곳엔 목리원이 어울리지도 않는 근엄함을 두른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 다들 모였으니 교육을 시작하자꾸나. 오늘 배울 것은 잠행의 기초, 변장에 관한 것이다.”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듯 진중한 목소리였으나 단원들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목리원의 얼굴, 정확히는 입술에 난 자국이 한창때인 소년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까닭이었다.

꼭 손톱으로 꾹꾹 눌러 찍은 듯한 상처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손톱으로 입술을 찍을 이유가 없으니 저 흉의 정체가 쉬이 상상된다.

‘잇자국인 것 같은데.’

남궁소아의 눈이 좁아졌다.

암만 봐도 잇자국, 그것도 꽤 세게, 오랫동안 찍어야 나오는 자국이었다.

남궁소아가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둘째 조카가 생긴 날, 남궁진천의 입술에 꼭 저것과 비슷한 상처가 있었으니 경험을 기반으로 추측을 해낸 것이다.

입술에 난 잇자국,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입맞춤…!’

당화서가 얼마나 성격이 불같은 여걸인지는 이 강호에 정평이 나있지 않던가.

그런 여인이 저 순둥순둥해 보이는 목리원과 만났으니….

화악―!

남궁소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뿐만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에 있던 강서휘도, 그리고 그 옆자리에 있던 언혁도 새빨간 얼굴이 되어 있었다.

특히 언혁이 심했다.

무슨 사내놈이 사내의 입술을 저리 뚫어지게 보는지, 그냥 보는 것도 아니고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보는지.

알만하다. 평소에 만사 귀찮은 척은 다 하면서도 주위 일에 꽤 관심이 많은 놈이었으니 입술의 흉이 생긴 경위를 떠올리고 있겠지.

남궁소아는 문득 언혁이 경멸스러워졌다.

인중이 늘어난 게 음흉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다.

‘내가 저런 놈이랑 같다고?’

비슷한 상상을 한 제자신도 경멸스러워짐에 남궁소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비워냈다.

“하여, 너희들이 유념해야 할… 듣고 있느냐?”

목리원이 이제야 단원들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하나, 그 기색도 오래가지 않았다.

백경오가 나섰기 때문이다.

“단주님.”

“응?”

“입술에 흉은 뭡니까?”

끔뻑끔뻑.

목리원의 눈이 깜빡였다.

그는 잠시 제 입술을 매만지다, 이내 ‘아차!’ 하는 표정을 띄워 올리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그러니까…!”

얼굴이 대단하긴 참 대단하지, 저리 당황하고 있는 모습조차 그림같았다.

어딘가 보호욕을 자극하는 면도 있었다.

와중, 목리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집무실을 달려 나갔다.

“오늘 교육은 여기까지!”

쾅!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도주였으나 그를 책잡는 이는 없었다.

“저거 그건가?”

백경오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주어가 빠진 질문을 건넸고, 그에 남궁소아와 강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진은 언혁에게 말했다.

“잠룡, 인중이 늘어났다.”

“무무무무무무슨 소리지?”

언혁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지, 어떻게 입술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단원들 앞에 섰단 말인가!

이게 다 당화서 때문이었다!

오전의 식사 때 이리 눈에 들어오는 부위는 조심해 달라고 더 확실히 이르는 건데!

…라고 후회해보지만, 다시 돌아간다 한들 강하게 말할 자신은 없었다.

목리원은 오전의 일을 되새겼다.

-소, 소저. 그래도 다음부턴 보이는 부분은 조심해서….

-보이는 부분은, 맞습니까?

-그, 그렇소….

-그럼 안 보이는 부분에 하라는 것이군요. 제가 바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요? 소협의 의도와 제 이해가 일치한 것이라 봐도 되겠는지요?

그 말을 하던 당화서의 눈이 왜인지 무서웠다.

정확히 어떤 면이 무서웠느냐 물으면 확실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본능이란 것이 있지 않던가?

여기서 답을 잘못하면 큰 화를 입게 되리란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던 것이다.

무어라 해야 할까, 그녀의 앞에 서면 꼭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기분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여하튼 확실히 말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온 게 지금이다.

목리원은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는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묵룡! 마침 찾았는데 거기 있었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복도 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 금검 대협!”

이젠 내각주가 된 권표월이었다.

싱긋 웃는 모습에 목리원 또한 반가워져 웃었으나, 그 순간 권표월의 표정이 바뀌었다.

“…자네 입술에 그건 뭔가?”

아차!

목리원은 흡!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물론 늦은 반응이었다.

이제와 그리한다 한들 권표월은 목리원의 흉을 다 봐버린 상태인 것이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그, 그것이….”

“연인 사이 아닌가. 내 이해는 하네. 물론, 맹 내에서 그런 흉을 대놓고 보이는 것은 조금….”

“유념하겠소….”

목리원은 변명할 말이 없었다.

권표월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던 까닭이다.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고 분위기는 어색해진다.

목리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한층 더 붉어졌다.

권표월은 그런 목리원을 흘긋 살피다, 이내 큼큼 헛기침하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일단 용건이 있어서 찾았네만.”

“…말씀하시오.”

“금일 회의가 있다네. 맹의 단주와 대주들이 모이는 그 회의 말일세.”

목리원의 고개가 벌떡 들렸다.

얼굴 위론 황망함이 떠올랐다.

“그, 그게 오늘이었소?”

“미리 공지를 하긴 했네. 자네도 비무회 탓에 바빴겠지. 혹시 모르고 있을까 하여 온 것인데 정답이었나보군.”

권표월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회의가 어렵진 않을 걸세. 당문주에게 들었겠지만 그저 일상적인 보고와 단기간 맹의 지침을 결정하는 자리이니 말일세. 그냥….”

목리원은 권표월의 시선이 자신의 입술을 향하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만 같았다.

“….”

“…그리 알고 있으시게. 난 다른 일이 있어서.”

권표월은 도주를 택했다.

목리원은 허망한 얼굴로 오도카니 복도에 서있었다.

1각을 그리 있었다.

*

진원단주 동강불괴 견동.

맹에서 그리 불리는 사내는 오늘 한껏 기쁜 얼굴로 회의실을 향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목리원과 같은 자리에서 공무를 보기 때문이 아니던가.

평소라면 죽어도 싫을 회의였다.

이젠 무림맹주가 된 조부 탓에 기대나 염려를 섞은 시선이 매 순간 꽂혀 숨이 막혀오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리라.

그 숨 막히는 공기가 한결 편해지리라.

견동은 사적인 자리에선 목리원을 추종하는 모임의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오늘 일은 분명 모임의 큰 안주거리가 되겠지.

이미 떡밥도 뿌려놓았다.

-내일이면 맹의 회의구려. 단주와 대주들이 모이는 회의인데….

-뭐, 뭣! 단주도 모이는 회의라면 혹시…!

-왕 아우, 진정하시게! 그리고 견동이 자네는 좀 자세히 얘기해보고!

-거 곽 형도 성급하시기는, 진정하고 들어보시오. 별 건 아니고….

견동의 염소수염이 씰룩거렸다.

눈은 초승달 모양으로 접히고 있었다. 적운대주 강찬이 봤다면 또 약골처럼 웃고 있다며 뒤통수를 갈길 표정.

하지만 강찬도 없겠다, 견동이 눈치 볼 이유는 없었다.

‘흐흐, 그 인간들 부러워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배가 다 부르구만!’

같은 모임의 구성원이라곤 하나 누군가를 추종하는 자리라면 꼭 있는 신경전이 있었다.

모임장인 곽칠 같은 경우엔 목리원과 있었던 일화를 사골 육수로도 못 써먹을 정도로 우려먹으며 친분을 과시했고, 왕삼은 그가 처음 무림에 나왔을 때부터 행적을 쫓았다며 그리도 목리원에 관한 정보적 우위를 자랑했다.

그런 사이에 끼여 견동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저 무림맹에 속해있어 오가다 볼 일이 있다는 게 유일한 자랑이었던지라 두 사람에게 밀리는 느낌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양상이 오늘부터 뒤집히는 것이다.

적어도 목리원이 단주로 있는 한, 그의 행적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하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견동은 큰 돈 주고 구한 십 년 하수오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회의실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목리원을 마주했다.

“묵룡 대협!”

견동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목리원은 손으로 입술쪽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답했다.

“아, 진원단주시구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소.”

“그렇지요! 같은 맹에 있어도 이리 볼 일이 없으니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아! 그것보다 이것 받으시지요. 비무회 우승을 축하드리는 선물입니다. 별 건 아니고 십년 하수오 한 뿌리입니다.”

입술이라도 튼 것 같은데 다른 걸 가져올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무인한테 영약만한 게 또 어디 있겠나.

견동은 헤헤 웃으며 하수오를 건넸다.

목리원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직후,

“아, 이 귀한 걸! 감사히 받겠소! 뭔가 보답을 드려야 할 텐데….”

견동은 봐버렸다.

“어?”

목리원의 입술에 있는 이빨자국을.

그 의미를 모르기엔… 견동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앗!”

목리원이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이, 이게… 그러니까…!”

변명하려는 듯 얼굴을 붉히는 목리원을 보며, 견동은 왜인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갑작스레 그가 미워지는 기분이었다.

‘묵룡 대협….’

어찌 그리 행복하실 수가 있소?

이렇게까지 행복하길 바란 건 아니오.

패배감에 몸을 떠는 견동의 나이는 올해로 서른하나.

그는 아직 미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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