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39화 (239/334)

EP.240 이부 이장 - 후기지수 (7)

* * *

당문의 장원 깊숙한 곳엔 오로지 당화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에 습도와 온도 등의 요건이 정밀하게 맞춰져 있는 이 공간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두개골, 그리고 한 권의 서적.

7년 전 걸왕에게 전해 받은 것들이었다.

당화서는 지그시 눈을 감고 향을 피워 올렸다.

망자가 된 이를 향한 예우였다.

먼 곳에 오래 머물 일이 있으면 꼭 이런 방을 만들어 그녀를 기리는 것이 일과가 된 지도 벌써 7년.

아직 목리원에겐 이것들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말해야 할 순간을 잡는 것이 쉽지 않덥니다. 아마, 7년이나 지나버린 이유겠지요.”

내뱉는 것은 후회의 말이었다.

차라리 이것을 전해 받았던 7년 전 그날 모든 사실을 말해버렸다면 어땠을까.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어땠을까.

이제와 말하자니 그간 숨긴 것이 미안함이 되고, 그렇다고 계속 숨기자니 마음의 짐이 된다.

당화서는 알았다.

틈을 찾겠지만, 오늘도 여느 날처럼 목리원에겐 유골과 서적에 관한 것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꼭… 다시 만나실 수 있도록 용기를 내어보겠습니다.”

모자간의 상봉을 가로막는 것은 결국 이기심이었다.

그런 사실이 당화서로 하여금 적잖은 자괴감을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긴 숨을 흘려낸 당화서는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 방을 나선 순간이었다.

“가주님, 목 대협이 찾아오셨습니다.”

소향의 보고였다.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집무실 쪽을 향했다.

목리원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곤 환한 미소를 그려냈다.

“아, 오셨구려!”

당화서는 마주 웃었다.

“면담은 잘 끝내고 오셨는지요.”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

닷새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목리원의 일과는 이제까지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바빴다.

오전에 일어나 개인 수련, 용봉단의 전각으로 향해 단원들을 살피고 곧장 당화서에게 업무와 관련된 교육을 받는다.

그리하면서도 청룡비무제를 준비해야 하니,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일과에서도 특히 시간을 많이 뺏기는 일이 있었다.

“대련 신청입니다.”

바로 광룡 백경오와의 대련이었다.

첫 대련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대련을 요청하는 이 단원은 참으로 끈질긴 면이 있어, 공력이 바닥나 더는 걸음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싸움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걸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뭐가됐든 향상심은 무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소양 중의 하나였고, 그걸 떠나서도 백경오는 투천성을 타고나 차오르는 투기를 건전하게 발산 중이지 않던가.

단주로서도, 성련의 문주로서도 이 대련은 피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래, 오늘도 1 연무장으로 가면 되겠느냐?”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도착한 1 연무장.

시작된 대련은 일방적인 양상이었다.

목리원은 여전히 검을 뽑아 들지 않았다.

걸음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만 바뀐 점은 하나.

“이젠 손가락 세 개까지 왔구나.”

검지만 쓰던 목리원이 손가락을 세 개는 쓰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해야 이 양상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백경오는 발전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와 세 개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목리원이 백경오를 상대하며 더 세밀한 공력의 조절과, 다양한 형태의 기공을 발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대련이 끝나자 백경오는 포권을 취했다.

첫날엔 그래도 굳은 표정도 보이더니, 이젠 실실 웃는 낯을 한 순간도 거두지 않는다.

패배의 과정을 즐기고 있다는 반증이다.

목리원은 웃으며 물었다.

“자, 내 걸음을 옮기게 할 수 있겠느냐?”

도발이었다.

백경오는 이런 류의 도발을 향상심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무인이라 건네는 말이었고, 돌아온 답은 그랬다.

“2주면 한 손 전체를 쓰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느리지 않느냐?”

“그것도 빠른 것이지요. 저는 절정이고, 단주께선 초월이지 않습니까.”

“비무는 경지 놀이가 아니란다.”

“경지만 차이가 났다면 이러지 않았겠지요.”

차분한 반박에 목리원은 쿡쿡 웃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은 처음이라, 이 과정조차 꽤 즐겁게 다가온 까닭이다.

‘나중엔 정말 무관을 차려도 되겠어.’

후학을 기르는 일은 생각보다 목리원의 적성에 맞았다.

차오르는 감상을 흘려낸 목리원은 말했다.

“기세는 좋다. 감각도 예리하며 이따금씩 펼쳐지는 의외성 있는 초식도 훌륭하다. 하지만 역시 무공이 문제구나.”

“새로 배우란 말씀이십니까?”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백경오의 무공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는 순간순간의 감각에 의지해 조잡한 초식을 치명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 의외성이 도움이 되고 있다곤 하지만, 저것은 초절정의 경지로만 가도 통하지 않을 수법이었다.

실제로, 천살성을 통해 살기를 감지해 싸우는 목리원조차 초절정에 이르는 적을 상대할 적부터는 초식을 사용했으니 말을 다 한 것 아니겠나.

이미 배운 무공을 활용하여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것은 백경오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싸움에 대한 감각을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투천성이니, 그도 목리원이 만든 만련이검과 같은 검술을 지어낼 수 있으리란 말이다.

목리원은 그런 점을 설명했다.

백경오는 턱을 쓸며 심도 있게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리 대련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이보게~ 백 아우 있는가~!”

흠칫, 들려온 목소리에 백경오의 몸이 떨렸다.

연무장에 들어서는 것은 제갈산이었다.

“음? 제갈 형?”

“아, 목 아우도 있었구만! 내 저 친구에게 볼 일이 있어서.”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내내 실실 웃던 백경오의 낯짝이 거무죽죽해진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중, 제갈산이 족제비같은 미소를 지으며 백경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데려가도 되겠는가?”

“무슨 일로 그러시오?”

“내 이 친구와 함께 도모할 일이 있어서 그러지.”

“제갈 가주님, 저는….”

“어허.”

제갈산은 검지를 입술 앞에 가져다대며 쉿 소리를 냈다.

“사내의 입은 무거워야 할 때도 있는 법일세.”

목리원이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제갈산이 그대로 백경오를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무어라 해야 할까, 목리원이 보기에 끌려 나가는 백경오의 뒷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와도 같았다.

*

연무장을 나오니 슬슬 저녁 시간이라 식당으로 향했다.

백경오를 제외한 단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아, 단주님 오셨네요.”

강서휘가 가장 먼저 목리원을 발견하고 말했다.

이어 다른 단원들도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식사들 하거라.”

당화서에게 배운 것이 있었다.

상급자로서 무게감이 필요한 법이고, 그런 무게감은 작은 행동이나 태도에서 나오는 법이라고.

마음 같아서야 단원들과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으나, 그리했다간 불편함을 자아낼지도 모르기에 목리원은 따로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어서 식사를 끝내고 나가야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단주님 이리 와서 같이 먹어요.”

남궁소아가 말했다.

고개를 슥 돌려보니 다른 단원들도 동조하는 분위기다.

찌잉, 감동이 차오른다.

목리원은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곤 단원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그래, 다들 오늘 하루는 어찌 보냈느냐?”

와중에도 무게를 잡아야 한다는 점은 꼭 기억하고 묻자 일상적인 답들이 돌아왔다.

남궁소아는 오늘 남궁진천과 조카를 만나러 갔다.

강서휘는 맹을 구경하러 다녔고, 모용진은 권법 수련에 하루를 지새웠다.

언혁은 제 입으론 하루 종일 잠만 잤다고 말했으나, 목리원은 알았다.

‘음! 온종일 수련했구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텐데 어찌 저렇게 평온한 얼굴을 하는지.

목리원은 무인으로서 언혁에게 대견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쌍수검을 썼었지.’

언혁의 무기는 두 자루의 소태도다.

쌍수검은 근육의 유연성이나 초식 간의 연결이 아주 중요한 무기로, 그에 따른 이론적인 공부가 필수적으로 동반될 텐데 그에 관해선 다른 노력을 하고 있을까.

순간 떠오른 의문에 언혁을 지그시 바라보던 중이었다.

“단주님, 이제 내일이네요.”

“아, 음?”

“응? 16강이요. 단주님도 출전하시잖아요.”

남궁소아의 말에 목리원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아!”

벌떡 목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비무가 내일이었다.

단주로서의 업무를 배우느라 시간 감각이 흐려져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목리원은 얼굴이 새하얘져선 뛰쳐나갔다.

“내 식사는 나중에 따로 하마! 너희들끼리 먹고 들어가거라!”

비무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은 게 뒤늦게 생각나 목리원이 떠나간 자리.

남은 단원들은 눈을 끔뻑였다.

와중 남궁소아가 중얼거렸다.

“단주님, 무게를 잡긴 하시는데 좀… 어딘가 서투르지 않아?”

단원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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