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37화 (237/334)

EP.238 이부 이장 - 후기지수 (5)

* * *

성련신공의 숨겨진 비급은 무술이라 이르기엔 어폐가 있는, 일종의 명상법에 관한 서적이었다.

도가에서 이르는 도문이나 불가에서 이르는 불문 따위의 것을 더 닮아있다 말하면 될까.

특별히 공력을 더해주지도 않고 검술의 정교함을 더해주지도 않는 의미 그대로의 명상법인 것이다.

그것이 가지는 하나의 공능이 있었다.

비급은 심상 세계를 더욱 단단하고 넓게 다지는 방법을 목리원에게 일러주었다.

목리원은 비급의 인도에 따라 어둔 하늘 위로 별자리 몇 개가 있던 심상에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하늘이 내린 운명의 별을 비추는 길이었고, 그 별들을 서로 연결하는 길이었다.

그렇기에 별을 가진 이만이 비급에 손을 댈 수 있었다.

비급에 스스로의 별을 뉘여, 다른 별과의 연결점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연결점은 곧 이끌림이었다.

목리원이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백경오의 운명을 점지한 것은 어찌 당연하다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멍한 기색으로 백경오와 마주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목리원은 흠칫 놀라며 목을 쓸었다.

그리 표정을 가다듬은 후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미안하구나. 내 잠시 딴생각이 떠올라서. 단주 목리원이다.”

백경오의 눈이 끔뻑거렸다.

투쟁을 향한 끊임없는 욕구에 시달리는 투천성 치곤 꽤 얌전한 태도였다.

“…광룡 백경오가 맞느냐?”

답이 없기에 그리 되묻자, 백경오가 뒤늦게 “아”하는 소리를 내며 답했다.

“아, 예. 백경오입니다. 사문이랄 건 딱히 없고… 고아라 가문을 말하지도 못하겠군요. 여하튼 잘 부탁드립니다.”

싱긋 웃으며 내뱉는 말엔 여유로움과 자부심, 그리고 일말의 오만이 묻어있었다.

사문이 없음과 가문이 없음이, 그리했음에도 용봉지회의 우승자가 된 것이 자신감의 근원일 터다.

목리원은 이해했다.

“일단 들어가겠느냐?”

“예, 그리하도록 하지요.”

백경오는 실실 웃는 낯짝으로 목리원을 따라 전각에 들어섰다.

*

면담은 여태까지 중 가장 짧았다.

백경오는 부드러운 태도로 목리원이 묻는 말에 성실히 답을 이었고, 그 결과 필요한 사실들을 모두 기재하기까지 긴 시간을 쓸 일이 없게 된 까닭이다.

와중 목리원의 속에 의구심을 틔운 것은 들려온 소문과 그가 품은 별과는 상반되는 묘하게 얌전한 성정이었다.

미치광이라는 평가완 달리 참 얌전하다.

투천성을 이고 있다면 당연 드러나야 할 난폭함이 보이지 않는다.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그럼에도 의외인 부분이라 목리원은 속에 생경함을 띄워 올리며 그를 관찰했다.

그것은 다섯 단원을 모두 모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 너희끼리는 서로 이미 알고 있는 사이 같으니 내 소개만 간략히 다시 하마. 용봉단의 단주를 맡을 목리원이다.”

“와아~.”

남궁소아만이 작게 호응해줬다.

백경오는 다른 단원들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실실대고 있었다.

“혹 내게 궁금한 것이 있느냐?”

백경오를 예의주시하며 그리 말한 순간이었다.

“하나 있긴 합니다.”

마침 백경오가 손을 들었다.

“단주는 얼마나 강하십니까?”

실실대는 낯짝으로 물어오는 것은 무력 수위에 관한 것이었다.

장난스러운 질문.

하지만,

‘…이것이었군.’

목리원에겐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질문이었다.

정확히는 이번 역시 심상이 반응했다고 해야 할까.

희끄무레한 안개 너머로 보이던 백경오의 성정이 심상의 도움을 받아 온전히 드러나고 있었다.

‘탐색을 위한 질문이다.’

백경오는 투기를 발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이미 투기에 절어있었다.

다만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에 그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고양잇과 맹수가 사냥감을 탐색할 때 몸을 낮추는 걸 들 수 있을까.

경지의 차이가 있음을 안다.

절대적인 무력의 격차가 있음을 안다.

한데도 은연 중에 싸움을 향한 기대감을 드러낸다.

목리원은 그 사실을 깨닫고 눈을 좁혔다.

‘곤란하구나.’

문제였다.

투천성은 대대로 그 무모한 성정 탓에 장수하지 못하는 별이었다.

저 성정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임무 중 사고가 터지리라.

단원으로 들어온 이상 목줄을 채워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 광룡. 너와 비교해서 얼마나 강한지를 묻는 것이 맞느냐?”

“예.”

“그럼 답해주마. 검을 뽑을 필요도 없다. 진각을 밟을 필요도 없다. 선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로 이기는 게 가능하다.”

내뱉는 말은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하나, 역시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그리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푸핫…!”

백경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아무렴, 다른 단원들도 이것만은 허풍이 아닐까 하는 눈초리를 하고 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목리원이 스스로의 기도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초월에 이르며 행할 수 있게 된 기교였다.

검왕 남궁혁이나 권왕 모용걸 같은 이들은 스스로의 기도를 온데간데 뿌리고 다니지만, 목리원으로선 그 속에 벼려진 살기가 남을 해 할 가능성이 있기에 필요한 때가 아니면 대부분은 숨기면서 지내는 것이다.

물론 그걸 고작 절정에 머물러 있는 후배들이 알 턱은 없을 터였다.

심지어 백경오조차 완벽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투천성의 특징이었다.

일단 싸움만 하면 되는 별이니, 상대의 기도를 파악하는데 무딘 면이 있는 것이다.

“증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상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목리원은 싱긋 웃었다.

의도한 대로 가고 있으니 좋았다.

“대련이라도 하겠느냐?”

그 물음은 백경오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다섯이서 동시에 덤비는 것을 허하마.”

쩌적, 단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이 역시 의도된 반응이었다.

목리원은 전날 당화서와 제갈산이 일러준 말을 되새겼다.

-일단 패고 시작하십시오. 용이니 봉이니 하며 어린시절부터 떠받들어진 것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강해 남의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래, 누님 말이 맞네. 대표적인 예가 저기 있지 않나.

-도발인가?

-아니오. 남궁 형은 영이랑 놀아주고 계시구려.

-….

두 사람의 말은 참으로 옳았다.

“단주님 많이 변하셨네. 예전엔 안 이러셨던 것 같은데.”

남궁소아가 자존심 상한 얼굴로 삐뚜름하게 웃었다.

흑봉 강서휘는 조용히 도 위로 손을 얹었다.

삭룡 모용진은 주먹을 말아쥐었고, 잠룡 언혁은 “하아, 어쩔 수 없나” 하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백경오는,

“와.”

아주 신난 얼굴이었다.

마치 원하던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 같은, 그런 얼굴.

*

용봉단의 전각에서 가장 큰 연무장은 제 1 연무장이었다.

1기 용봉단에선 남궁진천이 독점하듯 썼던 연무장으로, 이따금 대련이 필요한 순간이면 가장 애용되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에 2기 용봉단의 단원들이 거리를 벌린 채 목리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목리원은 검도 다 풀어 구석에 뉘어둔 채로 가만히 서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정말 후회 안 해요? 저희 진심으로 합니다?”

“그래, 부담 갖지 말거라.”

목리원의 부드러운 태도는 사람의 화를 돋구는 면이 있었다.

남궁소아는 한 손엔 창을, 다른 한 손엔 검을 쥔 채였다.

등 뒤로는 도가 매여 있다. 허리춤엔 비도가 몇 자루를 찬 채였다.

그녀의 무장이었다.

남궁가의 비급 중 무기술만을 쏙쏙 빼어와 그녀의 입맛대로 사용하다보니 이리 무장이 무거워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단원들은 대체로 무장이 가벼웠다.

언혁은 소태도 두 자루였다. 강서휘는 도였고 백경오는 검, 모용진까지 가면 무장조차 없는 맨 주먹이다.

각기 다른 자세, 다른 무장으로 둘러싸고 있지만 표정만큼은 하나같이 굳어있었다.

그들은 진심을 다할 작정이었다.

이기지 못한다는 것? 알고 있다.

애초에 경지의 차이나 경험의 차이가 다르지 않나.

목적은 목리원이 그가 호언장담한 일을 번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암만 그래도 후기지수의 왕인 용봉이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손끝으로만 상대해 이긴다니, 무시해도 너무 무시를 했단 말이다.

“단주님 보법이 얼마나 신묘한지 볼 수 있겠네요.”

흑봉 강서휘가 비아냥거렸다.

직후였다.

탁!

다섯이 동시에 목리원에게 덤벼들었다.

곧 죽어도 용봉이다.

게다가 몇 년간 비무회에서 서로의 무공을 겨뤄본 사이다.

이들에게 합을 맞추는 일은 숨을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치명적이고 빈틈없는 합공이 사방에서 목리원을 향해 짓쳐 들었다.

보법을 사용하지 않고선 막을 수 없다.

그런 확신이 그들의 속에 차오른 순간이었다.

“그럴싸하구나. 겉으로는.”

목리원이 한 손만 뒷짐을 풀며 검지 끝을 슬쩍 휘둘렀다.

“가르침을 주마. 명심하거라. 합공은 합을 맞추는 자의 투로를 피해 공격을 욱여넣는 게 아니다.”

그러자 공간을 이루는 기류가 뒤틀리며 단원들의 무기가 서로 부딪쳤다.

“합을 맞추는 이의 투로조차, 서로 이용하는 게 합공이다.”

쾅!

그들이 행한 공세 중 무엇도 목리원에게 닿지 못했다.

그저 얽히고 설키며 서로의 투로를 막아서며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다.

“끄악!”

“이 미친…!”

2기 용봉단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목리원이 어떤 무인인가’라는 명제에 관해서였다.

목리원이 한창 활동하던 당시 그들이 너무 어렸기에 모르는 것이었다.

“다시 해보거라.”

묵룡 목리원.

그 무인이 적들에게 끔찍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확인해 가르쳐주마.”

경이로울 정도의 안력. 그리고 살기 감지 능력.

찰나를 끊임없이 늘려 실현 가능한 모든 투로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비현실적인 전투법.

그것이 바로 그가 두려운 이유였다.

목리원은 그 몸이 반응할 수 있는 정도의 공격이라면, 설령 백 명이 동시에 짓쳐 든다 해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반격에 특화된 무인이었다.

“왜, 다시 오라니까.”

그 말이 내뱉어진 순간, 처음으로 백경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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