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7 이부 이장 - 후기지수 (4)
* * *
이제 셋이 모였다.
강서휘의 면담까지 끝마치니 마침 점심을 먹을 시간대라 목리원은 이미 도착한 아이들을 인솔해 식당으로 향했다.
숙수는 당화서의 배려로 당문으로 갔던 저번 기수의 숙수를 다시 데려온 상태다.
식사가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반응도 좋았다.
“와, 진짜 맛있네요.”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남궁소아였다.
강서휘 또한 기꺼운 얼굴로 식사를 이어갔고, 언혁은 티 내지 않으면서도 가장 부지런하게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목리원은 그 광경에 흐뭇함을 띄워 올렸다.
‘그래, 이리 함께 지내다 보면 금방 사이가 가까워질 것이다.’
저번 용봉단을 생각하면 어땠는가.
‘소저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나는 약과지!’
짝을 이뤄 포목점 부부를 노리던 제갈산과 혜운, 틈만 나면 사고를 쳐대던 사고뭉치 남궁진천, 조용한 듯하면서도 처리하기 곤란한 수준의 사고를 뻥뻥 터뜨려대던 일운.
그들을 생각해보면 이 아이들은 꽤 귀여운 수준이 아니던가.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부터가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낸 결의였다.
그리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던 중이었다.
“단주님, 다음 단원이 도착했습니다.”
이번 역시 맹의 경비가 알려왔다.
“아, 고맙소! 내 마중을 다녀올 터인데 너희는 어쩌겠느냐?”
“뭐 이쁘다고 마중까지 나가요? 그냥 밥이나 마저 먹을게요.”
“으음, 그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은 듯하구나.
목리원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전각의 입구로 나갔다.
그러자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포권을 취했다.
“묵룡대협을 뵙습니다. 모용가의 모용진이라고 합니다.”
주먹 위로 가득 새겨진 굳은살, 어딘가 난폭하게 느껴지는 기도.
그리고 각진 얼굴은 목리원의 기억속에 있던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형태였다.
‘권왕님을 닮았구나.’
지난 정마대전에서 명을 달리했던 권왕 모용걸, 청년은 그 노인을 꼭 닮아있었다.
듣기로는 손자라고 했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지그시 웃으며 말하자 모용진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어찌 예의 바른 기색이 보인다.
별호도 삭룡(削龍)인 주제에 이제까지 본 중 가장 좋은 첫인상이다.
왜인지 느낌이 좋다.
그런 마음에 목리원은 곧장 모용진을 집무실로 이끌었고, 섣부른 판단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저는 복수의 화신이 될겁니다.”
“응?”
“마교를 이 땅에서 지워버릴 겁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쿵―!
모용진은 집무실의 바닥에 무릎을 꿇은 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목리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공을 가르쳐주십시오.”
이게 뭘까, 목리원은 잠시 고민했다.
대충 복수, 마교 따위의 단어로 모용진이 하는 생각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권왕 모용걸의 복수를 위해 마교와 싸우고 싶다는 뜻일 터였다.
하지만 뒷말은 영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너는 권법을 수련하는 이가 아니더냐?”
목리원은 검수였다.
물론 권에 관한 조예가 있긴 하나 그건 초월에 이르며 어렴풋이 손에 쥔 일류 수준의 깨달음일 뿐이었다. 실제로 사용할 일도, 필요성도 없는 수준의 얕은 깨달음인 것이다.
모용진도 오대 세가 출신이라면 검수에게 권을 배우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없음을 알 것이다.
한데 어째서 이런 질문을…
“버리라 하신다면 권을 버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얘가 왜 이럴까.
눈에서 기파라도 쏘아져 나올 것 같다.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말에 맥락이 없다.
하는 말은 다 복수와 관련된 말이다.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진 않았지만 글쎄.
‘음.’
목리원은 작게 한숨을 터뜨렸다.
“일어나거라. 나는 네게 검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권왕님께서 그런 것은 원치 않으셨을 테니까.”
모용진의 몸이 움찔했다.
목리원은 작게 미소 지으며 모용진을 일으켜 의자에 바로 앉혔다.
목리원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엉뚱함 따위를 벗겨내면 모용진의 태도가 이해는 되기 때문이다.
아무렴, 복수에 미쳐 살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잘 알지 않던가.
목선오의 숨이 끊어지던 순간, 그 자리에 목리원이 있었다.
점점 옅어지는 숨소리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은 꼭 몸 전체를 다 불사르는 화마와도 같아 좀처럼 꺼트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을 좀먹었고, 몸을 좀먹었다.
분명 그날 목선오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비동에서 봤던 선조들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목리원은 망가졌을 것이다.
“왜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냐?”
묻자 모용진이 답했다.
“원수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 나쁩니까?”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에 집어삼켜지는 것은 나쁘다.”
모용진은 알쏭달쏭한 얼굴이 되었다.
목리원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가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것이 먼저 떠난 자의 의지와 부합하는지, 그리고 그 복수로서 진정 이루는 것이 본인에게 이로운지를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구태여 한 마디를 덧붙여 말하자면 그랬다.
“내가 아는 권왕님은 마냥 복수를 이루기 위해 권을 버린다면 크게 안타까워하실 듯하구나.”
“….”
“그분은 스스로의 무학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던 분이니 말이다.”
모용진은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며 고민한다.
그러다가 길게 숨을 내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겠지요. 조부님께선 권이야 말로 모든 무학의 극치에 있다고 하셨으니.”
움찔, 그 말에 동감할 수 없었던 목리원은 손끝을 떨었다.
하지만 반박할 분위기가 아니라 애써 참아내며 말을 이어 들었다.
“검 따위에 기대려고 한 제가 바보 같습니다.”
검수를 눈앞에 두고 그게 할 말이 맞느냐?
또 울컥했다.
“진정한 복수는 주먹질로 해야 하는 법. 예, 대협께 가르침을 받았군요.”
모용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리원은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사내답게 주먹으로 해결하겠습니다. 도구는 계집이나 쓰는 것이니.”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결의를 다지는 것에 목리원은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런 마음이 들면 안 되지만, 이런 생각이 들면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7년 전 걸왕 마일석에게 이미 들은 적이 있던 말이었다.
-멀쩡한 무기 두고 주먹질하는 놈들은 대체로 정신에 하자가 있는 법이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걸왕님.’
노인의 지혜가 또 한 번 목리원을 진리로 이끌었다.
옳았다.
권법가는 대체로 정신이상자가 분명했다.
눈치도 없는 것 같고.
목리원의 속에 권법 혐오가 굳건히 자리한 순간이었다.
*
넷이 모인 식당은 소란스러웠다.
직전 모용진과의 면담으로 정신력이 조금 깎인 목리원은 멍한 얼굴로 천장의 얼룩을 셌다.
그러다 문득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아직 하나가 남았구나.’
이 끔찍한 면담이 다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단원은 용봉지회의 우승자다.
광룡(狂龍) 백경오.
무려 별호에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딱 봐도 머리 아픈 친구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내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목리원이 입을 열자 단원들의 시선이 몰렸다.
목리원은 그에 조심스레 질문을 덧붙였다.
“백경오라는 아이에 대해 알려줄 수 있겠느냐?”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정확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런 생각으로 건넨 질문에 다 같은 답이 돌아왔다.
“미친 놈이요.”
“어… 미친 놈입니다아….”
“잘생긴 미치광이?”
“악독한 마두입니다.”
마지막은 모용진이었다.
그의 말에 남궁소아가 반박했다.
“넌 네 마음에 안 들면 다 마두라고 하더라.”
“닥쳐라 땅딸보.”
“야, 너 비무장으로 따라나와.”
남궁소아가 남궁진천 했다.
모용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러고보니 용봉지회에서 남궁소아가 모용진을 이겼다던가.
‘이 녀석.’
강자와의 싸움을 기피하는 구나!
뿌리 깊게 자리하기 시작한 권법 혐오가 목리원에게 그런 결론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앞선 때처럼, 맹의 경비가 목리원에게 말했다.
“마지막 단원이 왔습니다.”
“…알겠소.”
목리원은 긴장을 삼킨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다녀오마.”
“힘내세요.”
왜 응원하는 거니.
목리원은 묻고 싶었다.
하나 남궁소아는 답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소득없이 전각의 입구로 향했고, 목리원의 몸이 덜컥 멎었다.
“대협을 뵙습니다.”
라고 말하는 청년 탓이었다.
그의 몸을 멈춘 이유는 곱상하게 생긴 외모도, 싱글싱글 웃는 낯짝이나 또래에 비해 높은 경지도 그의 어딘가 이상한 복식도 아니었다.
그 외에 목리원을 자극하는 하나의 요소가 청년에게 있었다.
쿵, 쿵.
목리원의 심장이 뛰었다.
가느다란 눈 속, 백경오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날뛰는 것이 있었다.
‘별이다.’
별이 속삭인다.
성련의 의지가 넌지시 알려온다.
“대협?”
광룡 백경오.
그에게도 별이 깃들어 있음을.
적색으로 타오르는 귀기 어린 별이,
‘투천성(鬪天星).’
투귀의 별이 그와 함께 하고 있음을.
“대혀어어업…?”
광룡 백경오, 목리원은 그 별호의 유래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음화 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