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35화 (235/334)

EP.236 이부 이장 - 후기지수 (3)

* * *

언혁의 안색이 점점 이상해졌다. 갈수록 대답은 짧아졌고, 고개도 점점 아래로 향하는 것이 낯가림이나 몸상태의 불량은 아닐까.

목리원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곤 말했다.

“그래, 첫날이니 이정되면 되겠구나. 가서 쉬겠느냐?”

“옙.”

언혁이 게으름뱅이 잠룡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빠릿빠릿하게 일어서 집무실을 나섰다.

목리원은 흐뭇한 얼굴을 했다.

‘역시 부지런한 친구구나.’

오해는 더욱 깊어져만갔다.

그렇게 잠시 앉아있으니 금방 남궁소아가 들어왔다.

“잘 부탁드려요!”

맞은편에 곧은 자세로 앉아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참으로 밝다.

언혁과는 다르게 이미 안면도 있는 사이라, 면담에 부담스러운 점은 없었다.

“그래, 이미 아는 내용은 넘어가고 물으마. 무공은 역시 검이더냐?”

남궁세가이니 당연히 검이겠지.

필시 가르쳐줄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물었으나,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아뇨? 무기 안 가리는데요?”

부릅, 목리원의 눈이 뜨였다.

남궁소아는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어깨를 으쓱하며 연신 말을 이었다.

“제 별호가 무봉(武鳳)이잖아요? 이게 왜 생겼어요. 무기 안 가리고 아무거나 써도 다 잘하니까 붙은 별호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일갈하고 싶었다.

본디 무학이라는 것은 한 가지 길을 깊이 파고 들어가 그 극의를 봄으로써 겨우 만류귀종의 실마리를 잡는 법일진대, 이 절정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설피 그를 흉내내고 있다니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소엔 크게 드러나지 않는 목리원의 기벽이 있었다.

바로 무기의 우열에 관한 토론을 할 때면 만능 검 주의자가 되어 검 이외의 모든 무기술을 깔보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제갈산에게 얼마나 놀림을 받았던가.

하나, 그럼에도 좀처럼 낫지 않는 기벽이라 목리원은 여전히 검에 진지하지 못한 것을 상당히 아니꼽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애니까.

그래도 남궁진천의 동생이니까.

목리원은 심호흡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래도 주력 무기 하나는 확실히 파고들어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그 간절함은 닿지 않았다.

“어째서요? 저는 다 잘쓰는데?”

목리원은 혈압이 확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이 오만함.

이 자신감.

그리고 이 뻔뻔함.

‘아! 검룡 형의 동생이 맞구나!’

목리원의 눈이 질끈 감겼다.

*

결국 그날 남은 세 명의 단원은 오지 않았다.

마침 1기 용봉단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고, 앞서 당화서를 만난 목리원은 너무 지친 마음에 그녀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모, 목 소협?!”

“소저, 나 힘드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소.”

당화서가 힉! 힉! 숨을 몰아쉬며 놀라다 겨우 진정시키곤 목리원의 등을 두드렸다.

“그,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십시오.”

당화서의 입꼬리가 삐죽삐죽 솟고 있는 것은 목리원이 모를 일이었다.

목리원은 그저 지친 마음에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남궁소아에 관한 것이었다.

대관절 그 어린아이가 무얼 안다고 무기에 대한 일장연설을 펼치는 지 가만 들어주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부터 남궁가의 자제가 검을 등한시 하는 현 세태에 대한 비판과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남궁소아가 꼭 남궁진천을 연상케 해 혈압이 올랐다는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마친 목리원은 그제야 속이 조금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리 철없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될 텐데 싶다가도, 당화서의 앞에 서면 꼭 어린아이가 되는 기분이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리 해버린 것이었다.

당화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별난 아이긴 하지요.”

“어찌해야겠소?”

“내버려두십시오.”

“응?”

“그런 애들은 좀 맞아봐야 정신 차립니다. 이제까지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가 아닙니까. 실전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은 곧 알겠지요.”

그거야 그렇긴 하다.

하지만 목리원의 속에 존재하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암만 긁어내도 남아 잔류하는 답답함의 찌꺼기는 결국 당화서의 위로에도 다 씻겨나가지 못해, 남궁진천을 만난 순간 또 터져버렸다.

“남궁 형은 대체 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것이오?!”

“웅?”

“앗! 영아, 니 얘기가 아니란다!”

남궁영이 고개를 갸웃했고 남궁진천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저 알아서 하겠지.”

책임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발언이었다.

목리원은 개탄스러웠다.

*

적당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와 잠자리에 들었고, 오전 수련을 막 마친 후 몸을 씻은 직후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음?”

“어제 오기로 한 단원 말입니다.”

“아.”

맹의 경비에게 말을 전해들은 목리원은 아직 물기도 제대로 털어내지 못한 꼴로 빠르게 나갔다.

새벽 공기가 아직 추워 밖에 세워두기 미안하다는 이유였다.

그리 전각의 입구에 나선 순간이었다.

“미안하구나!”

덜컥! 하고 문을 열어 마주한 것은,

“흡!”

아직 앳된 기가 남아있는 소녀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큰 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도가 영락없는 무인의 것이었다.

당황어린 눈이 형편없이 떨리며 목리원을 위아래로 훑었고, 이어 구리빛 피부 위로 홍조가 살짝 감돌았다.

“응?”

“그, 그으….”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고개를 떨군다.

목리원은 생각했다.

‘남은 셋 중 여인이 하나였지.’

그러니 이 소녀의 정체 또한 분명하다.

“네가 흑봉이구나!”

“대, 대협을 뵙습….”

소녀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흑봉 강서휘.

그녀는 살아생전 본 것 중 가장 자극적인 장면을 목도하고 있었다.

눈이 뒤집어질 정도의 미남자가 얇은 옷을 입고 젖은 채로 마중 나오다니.

너무 큰 자극이란 말이다.

음험하기가 이리 음험할 수가 또 없다.

강서휘의 머릿속은 온갖 번뇌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 탓에 고개는 점점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몰래’ 오전 수련을 끝내고 온 잠룡 언혁이 그 광경을 목도했다.

언혁은 고개를 저으며 쯧쯧 혀를 찼다.

‘저년 저거 또 시작이네.’

진주언가의 장남 잠룡 언혁, 그와 흑봉 강서휘의 인연은 벌써 십 년에 걸쳐 이어져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부친이 막역한 친우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죽하겠는가.

강서휘의 십년지기인 언혁으로선 그녀의 꼴만 보고도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백 번째 이후로는 안 세어봐서 모르겠다.

강서휘는 분명 그리 말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이 심장을 다 바칠 사람을 찾았노라고.

이번이 진짜 첫사랑이라고.

그래놓고 조금만 각이 안 보이면 바로 포기하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말하겠지.

다음 첫사랑을 찾아 떠날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언혁의 오랜 친구 강서휘는 첫사랑만 몇백 번째인 마음이 정결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제일 길었던 게 일주일이었는데.’

이번은 과연 며칠일까.

이윽고 언혁은 장담했다.

‘한 시진. 오랜 경험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울려주는 이 없는 혼자만의 내기였다.

*

언혁의 감은 적중했다.

막 시작된 면담에서, 강서휘는 곧장 그 마음이 식는 것을 느꼈다.

목리원이 집무실로 오자, 아침 일찍 찾아온 여인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앞에서 목리원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목 소협, 오늘치 업무입니다. 처리해서 제게 검수받으십시오.”

“아! 소저!”

독라나찰 당화서.

이미 몇 번 얼굴을 본 일이 있는 당문의 현 가주였다.

같은 여인으로서 존경할 만한 여걸, 분명 멋들어지고 무공 또한 고강한 여인이 맞긴 하지만….

“참으로 고맙소! 어제는 잘 들어가셨소?”

“제갈 놈이 길에서 똥을 싸지르더군요.”

“앗. 결국 제갈 형 괄약근이….”

그녀를 앞둔 목리원이 너무 헤프게 웃고 있었다.

굳이 닮은 것을 꼽자면 주인을 맞이한 강아지 같다고 해야 할까.

사내로서 무게감이 없단 말이다.

두 사람이 연인인 것은 이미 잘 안다.

하지만 연인 관계가 이렇게 일방적인 것은 강서휘로서도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사내라면 여인을 휘어잡는 맛이 있어야지.’

속으로 혀를 찼다.

강서휘의 취향은 강압적인 맛이 있는 야수 같은 남자였다.

빠르게 타오른 만큼 빠르게 식는 마음이라, 그 허탈함에 강서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면담이 끝나면 보지요.”

당화서가 떠나갔다.

목리원은 그제야 늘어진 강서휘를 보고 머쓱하게 말했다.

“아, 미안하구나. 내 아직 업무가 익숙지 않아 도움을 받고 있단다.”

“그러시군요.”

목리원에 대한 흥미가 다 식은 강서휘는 대충 답했다.

면담은 사용 무공과 출신에 관한 것이었다.

안휘 북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초절정 무인 벽도(霹刀) 강천화의 적녀.

사용 무기는 도에 무공은 가전무공인 벽력천도(霹靂天刀).

용봉단에 들어서는 각오는 한 사람분만 딱 하고 나오는 것.

핵심만 요약해서 말하자 목리원이 끔뻑끔뻑 눈을 깜빡였다.

“이제 가도 되나요? 숙소를 먼저 보고 싶어서.”

“아, 그러려무나.”

강서휘가 집무실을 떠나갔다.

흑봉 강서휘.

그는 흥이 식은 남자에게는 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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