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7 이부 일장 - 출두, 만남 (7)
* * *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멎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한없이 정지에 가까워지는 중, 오로지 상대의 눈만이 맑은 광채로 반짝였다.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본능의 영역에 있는 의문이 목리원으로 하여금 당화서를 이리저리 뜯어 보게 만들었다.
생김새는 그대로였다.
분위기 역시 기억 속에 있는 어느 지점과 맞닿아 있었고, 그럼에도 아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세월이 그녀에게 성숙함을 더 해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천진함을 앗아간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제멋대로 달싹이는 입술은, 그리 말을 지어냈다.
“소저.”
마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듯 부드럽게 감기는 말이었다.
“오랜만이오. 소저.”
미소가 떠올라버린다.
염치없게도 그녀를 마주하는 이 순간을 너무 기껍게 여겨버리는 속내가 있었다.
그리하여 목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주춤―
당화서가 뒷걸음질 쳤다.
목리원의 움직임이 멎었다.
멍한 얼굴로 그녀를 다시 보니 그제야 보이는 것은 굳게 다물리는 그녀의 입매였다.
아, 그래.
기다림이 길었을 것이다.
연락 한번 하지 않은 죄인이 되었으니 이리 뻔뻔하게 나서서는 안 되겠지.
먼저 사과하자.
생각하고 입술을 떼어냈으나 말은 나오지 못했다.
타닥!
당화서가 뒤돌아 달아난 까닭이다.
“소, 소저!”
그녀는 부름에도 멈춰 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리원은 저도 모르게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뒤쫓으며 그리 외쳤다.
*
당화서는 있는 힘껏 달리면서도 따라오는 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했음에도 이리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곧 그의 폐관이 유의미한 성과에 이르렀다는 말일 터다.
기쁜 일인가? 아니, 기뻐해 줘야 할 일이다.
스스로는 기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리 도망가는 것이겠지.
분명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음에도 눈에 비치는 것은 목리원의 얼굴이었다.
7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사내였고, 변함없이 순수한 미소를 짓는 사내였다.
그것이 왜 이렇게까지 속을 답답하게 할까.
턱―!
와중 목리원에게 붙잡혔다.
당화서의 뜀박질이 우뚝 멎었다.
인적이라곤 없는 숲길 한가운데였다.
“소저.”
등 뒤에서 가깝게 들려오는 부름에 당화서의 숨이 떨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미성은 여전히 심장을 죄어오는 울림이었다.
“…여길 좀 봐주면 안 되겠소?”
당화서의 입술을 꽉 다물렸다.
겨우 내뱉은 말은 그랬다.
“…싫습니다.”
“어째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그러자 목리원이 사과해왔다.
“내가 미안하오.”
그 사과는 왜인지 아프게 박히고 있었다.
“알고 있소. 내 너무 긴 기다림으로 소저를 지치게 했소. 사과하려 했소. 먼저 소저를 찾아가려 했는데… 시기가 이래서 무한으로 온 것이오. 소저를 만나기 위해 내가 이곳에 온 것이오.”
당황하면 말주변이 없어지는 것은 여전하다.
잡힌 손목의 온기 또한 여전하다.
모든 것이 너무 여전해서.
그래서 아팠다.
“그러니 노여움을 조금만….”
“제가.”
당화서는 목구멍에서 턱턱 걸리는 말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제가, 참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
손목을 붙잡는 힘이 약해졌다.
당화서는 조심스레 손목을 빼냈다.
“정말 오랜 시간 목 소협을 기다렸습니다.”
재회의 첫 단추가 이러니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웃으며 반겨주기로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말이 멈추지 않는다.
투정.
이 말은 그리 표현해야 할 것이었다.
“처음 일 년은 당연한 기다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후 이년은 조금 노심초사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목 소협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수련에 목맸다.
재회의 날에 전과 같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음 이 년은 조금 힘들었습니다. 목 소협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연통 한번 줄 수 없는 폐관이었는지. 정녕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시는지. 나만이 이리 힘든 기다림이었는지. 그런 생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것은 심마라고 부르기에 모자라지 않은 불안이었다.
사랑을 확인받지 못하는 일이 이다지도 속을 문드러지게 하는지 알게 되는 시기였다.
“마지막 이 년은 공허했습니다. 가슴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 무얼 해도 기쁘지 않았고, 무얼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날을 세는 일조차 두려워져 누군가 말해주기 전까진 날짜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그 우습지도 않은 믿음을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계속 당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고 다녔습니다.
뒷말은 삼켰다.
“그랬는데, 막상 만나니 제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은데, 마냥 그리하고 싶은데 저도 몰랐던 울분이 차오릅니다.”
아, 이것이구나.
당화서는 이제야 목리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화내고 싶습니다. 목 소협에게 왜 이리도 나를 기다리게 했냐고 화내고 싶습니다.”
“….”
“그런데, 얼굴을 보면 화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그리도 모진 기다림을 안겨준 사람에게 그만 웃어줄 것만 같았다.
너무 반가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보내주십시오.”
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 긍정의 신호였다.
물론 미안한 마음은 있었다.
폐관이란 것이 쉽지 않음을 당화서라고 해서 어찌 모르겠는가.
같은 무인으로서, 그리고 초절정에 닿은 고수로서 확실히 그 수고스러움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투정인 것이다.
감정에 휘둘려서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다.
“비무회에 참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렇소.”
당화서는 작게 숨을 흘렸다.
“올라오십시오. 올라올 수 있는 최대한 올라오십시오. 그러면 저와 만나겠지요.”
그 순간도 당화서는 목리원을 바라보지 않았다.
“검으로 말해주십시오. 목 소협의 7년이 그럴 가치가 있는 7년이었다는 것을. 제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구태여 덧붙이길.
“…저 또한 무(武)로 말하겠습니다. 제 7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한껏 쏟아내려고 합니다.”
당화서는 답을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나갔다.
*
목리원은 결국 떠나가는 당화서를 잡지 못했다.
막연하게 유추했던 그녀의 마음을 바로 바라보는 일은 꽤 힘겨운 구석이 있었다.
이해 못할 마음이 아니라, 입장을 바꿔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그랬다.
그리 미안한 중에도 고마운 것은 당화서가 마냥 화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무제에서 만나자.
무인답게 무로서 말하자.
어딘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그 말은 명백히 목리원에게 기한을 제시하고 있었다.
참 화가 났을 텐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이어가는 것은 여전한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목리원은 상심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보여주겠소.’
그 7년의 기다림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야 전할 말은 기다림 따위를 이르는 것이 아님을.
목리원은 연무장에 틀어박혀 심신을 가다듬었다.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작은 요소 하나하나까지 모두 통제하는 생활은, 어찌 수도사의 것과 다를 바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이 주가 지났다.
여전히 목리원은 제갈가의 장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대진표가 나왔네.”
“그렇소?”
“직접 보는 게 좋겠지. 여기 있네.”
이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제갈산은 전심전력으로 목리원을 돕고 있었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고맙소.”
“잘 풀기나 하시게. 목 아우랑 누님이 화해해야 또 전처럼 술잔이라도 나눌 것 아닌가.”
제갈산이 씨익 웃는 것에 목리원도 마주 웃었다.
그리 받아 든 두루마리 속에 대진표가 적혀 있을 터였다.
이를 펼치면 언제쯤 당화서와 마주하게 될 지를 알 수 있었다.
목리원은 짧게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이내 대진표를 펼쳤다.
촤르륵―
단번에 펼쳐진 대진표 속, 목리원은 바로 이름을 찾았다.
곧장 튀어나오는 것은 헛웃음이었다.
“허….”
“하늘도 참 성급하시지 않나?”
『본선 1차
묵룡(墨龍) 목리원.
독라나찰(毒癩羅刹) 당화서.』
제갈산의 말대로, 하늘은 참으로 성급한 구석이 있었다.
본선 1차.
그것도 첫 대진.
비무제의 시작과 동시에 그녀와 재회하게 된다.
목리원의 눈은 나란히 붙어있는 두 이름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준비는 되었느냐니.
“너무 당연한 말이구려.”
목리원은 대진표를 다시 둘둘 말아 제갈산에게 건넸다.
“아직도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수는 없잖소.”
기다림을 준 만큼 확실하게.
목리원은 당화서에게 증명할 심산이었다.
“시원시원해서 좋구먼. 힘내시게.”
제갈산은 껄껄 웃으며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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