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24화 (224/334)

EP.225 이부 일장 - 출두, 만남 (5)

* * *

목리원은 결국 제갈가의 장원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목 아우, 나는 잠시 회의를 좀 다녀오겠네.”

“바쁘시구려.”

“이래 뵈어도 가주 아닌가.”

제갈산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절대 스스로 할 일은 없으리라 장담했던 가주직에 올라 있는 상황이 새삼 어색한 까닭이다.

그에 목리원은 답했다.

“어울리시오. 참으로.”

“그런가?”

“제갈 형은 말이오. 누군가를 보듬어주는 역할이 참 어울리는 사람이었소.”

제갈산은 묘한 눈으로 목리원을 봤다.

‘흠, 너무 의젓해진 듯해.’

그 호들갑도 좀 떨어주고 하면 이리 어색할 일은 없을 텐데, 다시 만난 목리원이 너무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저 세상을 알며 차분해진 것으로 봐도 될까.

여하튼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럼 정말 다녀오지.”

“그리하시오.”

제갈산은 장원을 나서 맹의 본단에 들어섰다.

그리 회의실에 자리하자 하나둘 모이는 얼굴들이 있었다.

“제갈 가주, 왔소.”

“남궁 가주를 뵙습니다.”

그랬다. 이것은 세가 회의의 연장이었다. 이번 청룡 비무회의 재개와 관련한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인 것이다.

이곳에서 제갈산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1년 만이구나.”

“누님도 잘 지내셨소?”

당화서.

작년보다 더 날카로운 기도를 뿜어내고 있는 이 괴물같은 여인이었다.

“내가 못 지낼 일이 뭐가 있겠느냐. 이제와서.”

뜨끔, 제갈산은 속이 푹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저 ‘이제와서’라는 말이 왜 이리도 사람 양심을 건드리는지, 아마 저 피폐한 얼굴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 얼굴로 보느냐?”

당화서의 말에 제갈산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싱겁긴.”

“자, 다들 모인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해도 되겠는가?”

와중 남궁가의 가주, 남궁진천의 아버지가 짝짝 손뼉을 쳤다.

그렇게 회의가 시작됐다.

제갈산의 신경은 여전히 당화서에게로 몰려 있었다.

*

세가 회의는 여느 때처럼 끝났다.

안건은 청룡 비무회에서 보여야 할 세가의 입장이나, 봉문을 풀고 나온 구파일방과 어떤 협상을 맺어야 하느냐는 등의 이야기였고, 그것을 다 하고 나니 이제 사사로운 이야기들.

“그러고 보니 당 가주, 제갈 가주.”

“예?”

남궁 가주가 두 사람을 불렀다.

“우리 진천이가 이번 비무회에 나온다 하오.”

“오.”

남궁진천도 다시 만나게 되는 건가.

제갈산은 반가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는 중 떠오르는 의아함이 있었다.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십니다.”

“아, 좋은 소식이 있어서 말이오.”

그리 껄껄 웃어대는 남궁 가주의 얼굴엔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 기색이 묻어 있었다.

맥락상 남궁진천과 관련된 이야기일 텐데, 대관절 무슨 일로 저러는지 제갈산은 알 도리가 없었다.

“여하튼 만나면 반갑게 맞아주시오. 축하도 좀 해주시고.”

남궁 가주는 그리 의뭉스러운 말만 남기고 떠나갔다.

제갈산은 눈을 끔뻑이다 당화서에게 물었다.

“누님은 아오? 남궁 가주님이 왜 저러시는지.”

“내 어찌 알겠느냐. 검룡 그 인간도 두문불출한 지 꽤 되지 않았더냐. 누구처럼.”

“….”

제갈산의 입이 꾹 다물렸다.

두문불출해있는 ‘누구’의 행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아.”

당화서가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왔다.

소름 돋고 두려운 일이었다.

당화서는 언제나 제갈산을 두고 ‘제갈 놈’ 내지는 ‘망할 놈’으로 불렀던 까닭이다.

“…왜 그러시오?”

제갈산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소식은 없더냐.”

당화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공허한 기색이 가득했다.

제갈산은 그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이걸 정말 숨겨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당장 말하는 것은 독이 되겠지.’

목리원의 신변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갈산은 잘 알았다.

무릇 남녀 간의 일이란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는 것보다 방법이 없단 것을.

괜히 사이에 끼여 중재하려 해봐야 오해를 더 깊게 만들 뿐이다.

“목 아우 말이오.”

“….”

“나는 이번 비무제에 나올 것이라 보오.”

그러니 이 정도만 하자.

말하는 순간 ‘홱!’ 당화서의 고개가 돌아갔다.

표정이 참으로 살벌했다.

“뭐?”

“그, 그렇지 않소. 목 아우가 왜 폐관에 들어갔었소. 그땐….”

목리원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직접 만나본 당화서보다 잘 알진 못하겠지만, 제갈산이 생각해도 목리원의 성격상 그 전쟁에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을 터란 말이다.

폐관을 결심한 이유는 곧 무력의 상승을 도모한 것일 터.

청룡비무회.

이 중원 강호에서 가장 큰 무의 축제를 두고 그가 나서지 않을 리가 없다는 말을 제갈산은 꽤 길게 풀어서 해냈다.

“…결국 추측이구나.”

당화서는 허탈한 듯 숨을 흘렸다.

제갈산은 만남의 날 당화서가 너무 놀라지 않도록 작은 단서만을 덧붙였다.

“그래도 기대할 만하지 않소?”

“되었다. 이제와서 무슨.”

당화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산은 움찔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본 당화서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느냐.”

다가온 당화서가 제갈산의 어깨를 톡톡 쳤다.

“누가 보면 꼭 잡아 죽이는 줄 알겠어.”

비슷한 걸 할 마음이 드실까봐 그랬소.

제갈산은 속으로 말했다.

순간, 당화서의 손이 멈췄다.

“…한데 말이다.”

“으, 응?”

“꽤 이상하구나.”

삐걱삐걱, 제갈산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당화서가 한톨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목 소협에 관한 이야기를 절대 내 앞에서 하는 법이 없지 않았느냐.”

‘아차!’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7년, 제갈산은 갈수록 기다림에 지쳐가는 당화서의 모습을 보며 어느 순간부터 목리원에 관한 이야기를 그녀의 앞에서 하지 않게 됐다.

이제와서 새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의심을 떠올리는 게 당연하단 말이다.

주르륵,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그러자,

“푸흡!”

당화서가 웃었다.

“장난이다. 이 녀석아. 내 겨우 그런 억측으로 널 괴롭히겠느냐.”

당화서가 다시금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제갈산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그, 그렇지! 누님이 그런 사람이 아님은 나도 아오!”

“그래, 나는 이만 가보마. 갑자기 뭔 목 소협 얘긴가 해서 놀려봤다.”

“잘 가시오!”

제갈산은 벌떡 일어나 떠나는 당화서의 등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자 회의실엔 혼자 남아있는 상태.

그제야 긴장이 풀린 것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주님, 슬슬 나가셔야….”

부관이 들어왔다.

제갈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내 나가보지.”

일단 목리원에게 당화서의 상태에 관해 조금이라도 인지시킬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마음먹으며 한 걸음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푸드듭―

소름 끼치는 소리가 일었다.

그 소리는, 감각은, 그리고 함께 새하얘지는 머리는.

“어?”

있어선 안 될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과정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에 뒷간에 들러 일을 처리하고 왔는데.

그리고 직전까지 배가 아픈 일은 없었는데.

새하얘진 머리로 그런 생각이나 떠올리던 제갈산은 이윽고,

‘어깨.’

제 어깨를 바라봤다.

당화서가 부드럽게 두드리던 자리.

왜인지 그 부분이 아렸다.

그러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독이구나.’

당화서는 방금, 목리원의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한 벌을 준 것이구나.

-내 겨우 그런 억측으로 널 괴롭히겠느냐.

안심시키던 말이 스쳐 지나간다.

거기서 그럴 사람으로 보인다고 답했으면 억울함이라도 덜 했을까.

제갈산은 공허하게 웃었다.

‘과연.’

당하는 순간까지도 중독되었다는 걸 몰랐다니.

당문의 독은 천하일절이라 할 만했다.

“이보시오. 부관.”

“…가주?”

“내 갈아입을 옷과 적신 수건을 좀 가져다 주겠소?”

제갈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관은 고개를 갸웃하다, 이윽고 냄새를 맡은 것인지 코를 틀어막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제갈산을 바라봤다.

“가주….”

“어서.”

부관의 얼굴 위로 참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제갈산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제발.”

애원이었다.

부관은 눈을 질끈 감더니, 그대로 돌아나가며 외쳤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지려버렸구나.

바지에 지려버렸구나.

제갈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왕 지린 거.’

뒷간까지 버티지도 못할 텐데.

어차피 치워야 할 똥인데.

‘공수래공수거.’

공으로 태어나 공으로 돌아가리라.

언젠가 일운에게 들었던 불경의 구절을 속으로 외며.

푸드드드드듭!

제갈산은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애처로운 울림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그날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역겨운 잔향만이 남아 그곳을 찾는 누군가에게 그 단편을 알려줬을 뿐.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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