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23화 (223/334)

EP.224 이부 일장 - 출두, 만남 (4)

* * *

사천당문의 가장 깊은 곳.

언제가 드높은 전각이 자리했던, 그리고 지금은 낮은 층의 넓은 연무실이 자리한 공간으로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소향이었다.

“가주님.”

당화서가 연무장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론 녹색의 독무가 너울거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 연무장 바닥은 검고 칙칙하게 착색되고 있었다.

독공의 수련.

지난 7년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당화서의 일과였다.

소향은 눈을 좁혔다.

‘저러니까 주변 남자들이 다 도망가지.’

객관적으로 봐도 당화서는 참 미인이다.

단순한 여인으로서의 매력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품이나 위엄이 그녀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매력을 다 가리게 만드는 저 악독하기 그지없는 독기가 문제다.

7년간 독공에 미쳐 산 그녀는 이젠 평범한 사람은 근처에만 가도 혼절할 정도의 독기를 내내 뿌리고 있었다.

“…아, 향이 왔느냐.”

인기척을 느낀 당화서가 눈을 뜨며 말했다.

소향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준비하셔야죠.”

“그래, 무한으로 출발해야지.”

당화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청룡비무회, 직접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그녀는 본선 16강 이상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가주로서 당문의 위엄을 세운다는 의견엔 동의하지만 글쎄, 당화서의 진짜 속내는 안 봐도 뻔하다.

‘그놈의 묵룡 때문이겠지.’

이름을 날리면 잠적한 목리원이 듣고 찾아올까 싶어 난리를 치는 게 분명했다.

참으로 지고지순하다면 지고지순하지만….

“뭘 그리 보느냐?”

“아뇨.”

“아닌 게 아닌데.”

“아닌데요?”

“말대꾸가 늘었구나. 왜, 또 혼기가 꽉 찼니 하는 잔소리를 할 생각이 아니냐?”

“가주님, 말을 잘못하셨어요. 꽉 찬 게 아니라 흘러넘치셨어요. 지금 춘추가 스물 아호….”

“향아, 혹 사는 게 지겨우냐?”

당화서의 눈 위로 핏발이 섰다.

소향은 입울 꾹 다물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았다.

올해로 스물아홉, 당화서는 혼기가 꽉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중에도 좀처럼 혼인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를 못 낳는다 하더라도 저 나이면 이제 혼인은 해서 안정을 생각해야 할 텐데 당화서에게선 좀처럼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다.

소향은 목리원이 참 미워졌다.

‘이래서 얼굴 잘난 놈들은.’

그놈의 목리원이 문제다.

돌아오면 꼭 전할 말이 있다며 당화서를 설레게 해놓고 7년째 두문불출 중이니 말이다.

잘난 얼굴 하나만 믿고 주군의 이십대를 통으로 날려버린 사내가 부관으로서 어찌 밉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향은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당화서를 노려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가자꾸나.”

당화서는 연무장을 나서 무심하게 마차에 올라탔다.

소향은 한숨을 흘렸다.

“망할 목리원.”

“향아, 목 소협이 네 친우더냐?”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곧 모실 분인데 예의를 지켜야지.”

우뚝, 소향의 몸이 멎었다.

‘…또 시작이네.’

저런 갑작스러운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소향은 물끄럼 당화서를 올려다봤다.

목리원은 알까, 소식이 없는 그 탓에 당화서가 겪었던 지난 7년간의 감정 변화를.

“걱정말거라. 네가 귀찮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내 교육을 확실히 시킬 생각이거든.”

처음 1년, 당화서는 설렘 속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후 2년간 애타는 갈증 속에서 그를 기다렸다.

다시 2년간, 그 시기의 당화서는 온갖 의심암귀에 사로잡혀 목리원이 다른 살림을 차렸을지도 모른다는 비약까지 했었고.

마지막 2년.

“여하튼, 조신함이 모자라구나. 목 소협은.”

끊임없는 기다림 속에서 결국 당화서는 어딘가 고장나 버렸다.

날씨 얘기나 하듯이 평이한 어조로 당화서가 말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숨어다닐 생각일까.”

어조가 평이하고 표정이 평이하다 해서 속내까지 평이한 것은 아니다.

장담컨대 두 사람이 마주하는 날, 목리원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버릴 것이었다.

소향은 직전까지 그리도 씹던 목리원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살 수는 있을까?’

불쌍하기도 해라.

*

“에취!”

목리원은 재채기를 했다.

“왜 그러십니까 대협?”

“아니오. 갑자기 코가 가려워서.”

슥슥 코밑을 쓸며 말하자 우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날씨가 변덕스럽긴 합죠. 그보다 대협, 이제 도착입니다.”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 위로는 미소가 만개해 있었다.

“무한은 변함이 없구려.”

호북 무한에 돌아왔다.

7년의 세월을 넘어서.

“여전히 활기차오.”

“뭐, 대도시지 않습니까.”

목리원은 저 멀리 무림맹과, 그 앞으로 길게 이어진 시장의 전경에 지그시 웃었다.

모두 그대로였다.

용봉단의 단원들과 함께 외식했던 식당도, 그 앞의 과일가게와 옆의 주점과 맞은 편의 포목점까지.

하나 다른 것은 포목점 부부 사이에 귀여운 여아 하나가 꺄르륵 웃고 있는 것 정도.

‘아이를 낳으셨구나!’

저들은 무림맹 내에 선남선녀로 소문이 자자해 제갈산과 혜운의 표적이 되었던 부부였다.

이리 행복한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한 감상이 차올랐다.

“대협은 바로 맹으로 가시는 겁니까?”

“일단은 그럴 생각이오. 표국은 어디로 가오?”

“저희는 옆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그럼 여기서 이별이겠네요.”

우삼이 씨익 웃었다.

목리원은 마주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예까지 안내해주어 고맙소. 내 이 은혜는 꼭 갚겠소. 아! 혹시 무한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날 찾아주시오. 비무회가 있는 내도록은 이곳에 있을 듯하니.”

“참여하시는 겁니까?”

“그럴 생각이오.”

7년간 무림이 어찌 바뀌었는지 가장 잘 알 방법은 시대를 이끄는 고수들과 검을 맞대는 것이다.

마침 좋은 기회가 있으니, 목리원으로서도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응원이라도 해야겠네요. 힘내십시오!”

우삼은 그리 말하고 표행으로 돌아갔다.

표사들과 표두, 그리고 교연이 우삼을 맞이하다 목리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목리원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곤 죽립을 눌러썼다.

‘그럼 일단….’

맹으로 가볼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목 아우? 이보게! 목 아우 맞나?!”

목리원은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싱긋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반가운 기분에 절로 가슴이 들떴다.

목리원은 몸을 홱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열 명 남짓한 수하들을 이끌고 있는, 족제비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오랜만이오. 제갈 형.”

“목 아우!”

목리원은 제갈산과 재회했다.

*

제갈산으로선 너무 의외의 만남이었다.

7년 만에 재개되는 청룡비무회, 그에 제갈가의 가주로서 자리한 와중 익숙한 뒤통수가 보이는 게 아닌가.

두 개의 검이나 죽립 따위로는 가릴 수 없는 익숙함이라 혹시 해서 물었건만 정말 목리원.

제갈산은 그를 인근 객잔으로 이끌어 술 잔을 들었다.

“폐관은 끝난 건가? 시기 한 번 기가 막힌데.”

“우연이었소. 나도 참 놀랐지 뭐요. 이번이 그날 이후 첫 청룡비무제라니.”

목리원은 지그시 웃는 채였다.

이는 제갈산이 아는 목리원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7년이 길긴 하군.’

그 해맑고 아이같던 목리원이 이리 의젓해지다니.

제갈산은 본인이 한 일이 아님에도 목리원의 성장에 흐뭇한 감상을 떠올렸다.

그런 중이었다.

“한데 제갈 형.”

목리원이 고개를 앞으로 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

목리원의 얼굴 위로 망설임 따위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혹 소저에 관한 소식은 아오?”

우뚝, 제갈산의 몸이 멎었다.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응? 내 들은 말이 있긴 한데 이게 소문이라 사실 여부가….”

목리원이 머쓱해하며 하는 말에 제갈산은 속으로 외쳤다.

‘아차.’

목리원이 너무 반가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매년 있는 세가 회의에서의 일이었다.

-목 소협과는 연락이 닿느냐?

라고 말하며 처음엔 걱정하던 당화서가 어찌 변했던가.

-목 소협이 잘 지낼지 모르겠구나.

걱정에 빠져 살다.

-…아직 목 소협과 연락이 닿지 않아?

의심하다.

-목 소협은 참 숨바꼭질에 능하구나.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고장나 버렸다.

제갈산은 이대로 목리원과 당화서가 만나면 일어날 일을 상상했다.

아니, 상상하려다 말았다.

너무 끔찍하여 차마 더 떠올릴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속에 떠오른 위기감은 이미 범상한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 버린 상태.

제갈산은 생각했다.

‘살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결의였다.

‘아우를 살려야 한다!’

이대로 당화서와 목리원을 만나게 해선 안 된다는 결의였다.

‘목 아우!’

이 형님만 믿으시게!

제갈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제갈산은 이 상황을 좌시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혹, 소저가 많이 화났소?”

하여 그리 묻는 목리원에게 말했다.

“목 아우, 혹시 내 장원에서 지낼 생각은 없나?”

일단은 목리원을 숨기고 당화서를 찾아 상태를 진단하자.

제갈산은 설사를 각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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