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22화 (222/334)

EP.223 이부 일장 - 출두, 만남 (3)

* * *

목리원은 오영표국의 호위로서 함께 길을 떠났다.

그로선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무렴, 우연히 친분을 다지게 된 우삼이 그간 목리원이 듣지 못했던 강호의 동태를 일러준 것이 아니겠나.

“말씀드린 대로 강호의 거대 문파들이 줄줄이 봉문을 선언했죠. 7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인데, 보통은 그렇잖아요? 지역을 쥐고 흔드는 거인들이 사라졌으니 승냥이 떼들이 날뛴다 이 말입니다.”

우삼은 말했다.

“호랑이들이 떠난 자리를 차지해보려는 군소 문파들이 온통 성화죠. 오죽하면 지금을 무림 전국시대라 말하는 놈들도 있습니다.”

“그렇구려.”

목리원은 그의 말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무림은 협과 의를 알고 양민의 구제를 위해 한 몸을 다 바치는 협사의 땅일진대, 현실은 여전히 그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리원도 이젠 알았다.

이상만으로 현실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니 나라도 해야지.’

목리원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그런 중이었다.

“아참, 그럼 묵룡 대협은 그것도 모르겠네요?”

“음?”

“창성 사백운 대협이 맹주 직위에서 내려왔습니다. 현 맹주는 해파검 견궐 님이시지요.”

목리원은 크게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창성께서 어찌….”

“나이가 있으시잖습니까. 어디 한적한 곳으로라도 떠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백운과 그리 깊은 친분을 나누지 못했던 목리원으로서도 사백운은 존경할 만한 구석이 많았던 까닭이다.

다시 만나면 인사를 하고 싶었건만.

“혹 어디로 떠나셨다는 말은 없으십니까?”

“저도 잘….”

우삼이 머쓱하게 뺨을 긁었다.

목리원은 그 기색에 더 말을 더할 수 없었다.

“하긴, 그분 성격에 번잡스러운 일을 더 만드시진 않았겠구려.”

“친분이 있으십니까?”

“한때 맹의 일원이었으니 말이오.”

“아!”

우삼이 부담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런 순간이었다.

“삼아! 야영 준비 좀 돕거라!”

“아, 옙! 대협!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시오.”

어느새 해질녘이다.

목리원은 홀로 남아 산고개 너머로 지는 태양을 바라봤다.

‘많이 변했구나.’

그간 들은 정보를 종합하면 그랬다.

‘남궁 형은 반쯤 실종, 제갈 형은 제갈가의 가주가 되었고….’

그것도 보통 방식이 아니다.

가주직의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외가 쪽의 인물들을 모두 축출해냈다는 게 아닌가.

얼핏 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제갈산은 이제와 복수를 끝낸 것이다.

어찌 잘 지내고는 있을까. 이번 비무제에서 만날 수 있기는 할까.

생각하던 목리원은 이어 혜운과 일운을 떠올렸다.

‘혜운 스님은 종적이 묘연하다 했고, 일운 스님은….’

정확히 소림은, 원명 대사가 타계한 정마대전 이후 줄곧 봉문이라 들었다.

이번 비무제에 봉문을 풀고 나온다던가.

일단 만나는 것은 확정인 듯했다.

그러니 이제 생각할 것은 하나였다.

‘…소저.’

목리원의 몸에 긴장이 떠올랐다.

솔직히, 목리원은 당화서와 만나는 일이 꽤 두려웠다.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고, 우삼이 말해준 어떤 소문 때문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말입니다? 정마대전 이후 아주 뼈를 갈고 계시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뭐라더라… 꼭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고 다니신다는데, 그렇게 무력을 갈고닦아 만날 상대라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분명합죠!

만나야할 사람이 있어 뼈를 갈고 있다던가.

목리원은 그녀가 잡아 죽여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 말해도 할 말이 없었다.

꼭 다시 만나 하고픈 말이 있다고 해놓고 7년이나 잠적했으니 오죽하겠는가.

‘나, 나도 7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건만….’

성련의 비고에 숨겨진 비급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단순히 몸을 안정시킨다뿐만 아니라 그 비급의 수행까지 동시에 해냈으니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화서에게 이 변명이 통할지는 또 다른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바, 방도를 지금부터라도 생각해야 한다.’

목리원은 초조한 낯빛으로 흙바닥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차라리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을까.

아니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맞잡거나 포옹을 해버릴까.

‘아니, 그랬다간 중독되어 실려 가 버릴지도.’

당화서의 독은 특별하다. 만독불침을 이룬 신체를 기반으로 순간에도 수십의 변화를 일으키는 극독을 뿜어내는 독공이니 초월에 이른 신체라 해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만남을 유예하는 건….’

그건 진짜 너죽고 나죽자가 아닌가.

목리원의 한숨이 깊어졌다.

“묵룡 대협! 어서와 식사부터 하시지요!”

우삼은 그런 목리원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

중원의 남단 귀주 어딘가.

흑사련의 본단에서 그리 멀지 않고, 그렇다고 흑도들의 영역에 아주 가깝지도 않은 산골 민가를 걷는 사내가 있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채 어깨엔 멧돼지를 짊어진 꼴은 어찌 사냥꾼이라 볼 수도 있는 행색이었으나, 분명 그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봉두난발된 머리나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난 정리되지 않은 수염 따위보다 먼저 들어오는 푸른 눈은 사내의 정체를 단번에 일러주고 있었다.

남궁진천이었다.

“오셨어요?”

민가에서 나온 여인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가녀린 인상과 작은 체구로는 숨길 수 없는 품위가 그녀에게 깃들어 있었다.

남궁진천은 그녀를 본 순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누구겠는가, 하오문주 서예였다.

“멧돼지를 잡아 왔다.”

“수고했어요. 저기 널어놔요.”

“알겠다.”

비무행을 떠난지 7년.

처음에는 분명 강호 각지의 고수들이 사는 곳을 알아낼 심산으로 그녀를 찾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막상 이리 지내다 보니 귀주 쪽 산골에 자리를 잡고 흑도들만 상대하게 된 게 아니겠나.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남궁진천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아빠아!!!”

“그래.”

이리 지켜야 할 아이가 생겼으니 말이다.

“으아! 메때지!”

“멧돼지다.”

“메때찌!”

뽀얀 피부와 포동포동한 뺨이 특징적인 여아, 이제 갓 세 살이 된 이 아이의 이름은 남궁영.

남궁진천의 딸이었다.

“오늘은 고기 머거?”

“그래, 금방 잘라 오마.”

“그럼 고기 머꼬 수련해?”

“그래, 수련한다.”

남궁영이 신난 얼굴로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무재가 꽤 보이는 아이다.

남궁진천의 수련을 지켜보는 걸 하루 중 가장 재밌는 놀이로 여겨버리는 것이다.

남궁진천은 그 점이 참 뿌듯했다.

“영아.”

순간 서예가 나타났다.

남궁영이 서예에게 달려가 안겼다.

“엄마야! 오늘도 아빠 수련한대!”

“그래, 곧 아빠가 큰 대회에 나가거든.”

서예는 쿡쿡 웃으며 남궁영에게 말했다.

남궁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웅?”

천진한 얼굴에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동시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남궁진천은 그 와중, 아이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최고가 되러 떠날 것이다.”

“아빠 멀리 가?”

“너도 같이 간다. 엄마도 같이.”

“자, 영아. 엄마는 잠시 아빠랑 할 얘기 있으니까 집에 들어가 있을래?”

“웅!”

남궁영이 아장아장 걸어 집으로 들어갔다.

남궁진천은 표정을 굳혔다.

“오늘은 안 된다. 힘들다.”

“뭔 소리예요?”

“밤 이….”

“할 생각 없는데.”

“….”

남궁진천은 머쓱해졌다.

서예는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 혼인 얘기잖아요.”

“아.”

“슬슬 인사드리러 가야죠.”

남궁진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깨달은 것이다.

“…안다.”

본가로의 인사.

그랬다.

사실 남궁진천이 이리 산골에 사는 이유는 본가에 알리지도 않고 몰래 혼인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애부터 낳고 몰래 혼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남궁진천도 가족의 등쌀은 무서운 법.

아직 이 일을 아는 것이 조부인 남궁혁밖에 없는 시점에, 아이를 데리고 본가에 들어가는 상황이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본가에 알리지 않고는 청룡 비무회에 참여할 수 없겠지.”

“그쵸, 이번 비무회는 신분이 불확실하면 할수록 불리해져요. 7년 전 비무회에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

남궁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소교주가 잠입해 난장을 피운 비무회가 바로 직전이다.

그런만큼 이번 비무회는 신분이 불확실한 자는 끼지 못한다.

남궁진천으로선 본가의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반드시 올 거다. 그놈은.”

“네네, 그놈의 묵룡 말이죠.”

“이런 축제를 피할 놈이 아니니까.”

남궁진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시선은 무림맹이 있을 무한 쪽을 향하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쥐며, 남궁진천은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나는 마냥 놀지 않았다. 그놈도 놀지 않았을 터다.”

남궁진천의 속에 투쟁심이 자리했다.

이 7년간, 서예와의 잠자리를 가질 때와 남궁영의 놀이 상대를 해줄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사그라든 적이 없었던 투쟁심이었다.

“모레 출발하지. 무한으로.”

검룡 남궁진천.

그의 성취는 현재 초월까지 단 한 걸음을 남겨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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