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1 이부 일장 - 출두, 만남 (1)
* * *
검 끝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묵색의 기파가 목리원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동의 연무장, 막 수련을 마친 목리원의 다갈색 눈동자에 고요가 깃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다다랐구나.’
심기체의 합일에 닿았다.
다른 말로, 완전한 초월지경에 닿았다.
성련의 개파조사가 남긴 비급을 수련하길 7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몸이 완전히 안정에 닿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천살성이 통제되고 있다.’
아주 조금이었다.
하나, 영영 통제할 수 없을 줄로 알았던 천살성이 통제를 따라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목리원은 개파조사의 낡은 검, 성운(星雲)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비동의 묘지로 가 무릎을 꿇고 크게 절했다.
“그간 참 많이 신세 졌습니다. 저는 다시 강호로 떠나보려 합니다.”
목리원의 얼굴 위론 지긋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별에 아파하던 18세의 청년은 어느덧 25세의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증명하고자 한 것이 있고, 또한 끝맺지 못한 은원이 있습니다.”
지난 7년은 인내의 시간이었다.
속세의 모든 것과 동떨어진 채로 그저 스스로와 싸웠다.
이제 그 끝을 볼 때가 된 것이다.
목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성련의 11대 문주로서.”
그리 몸을 돌려 묘소를 나갔다.
등에는 성운을, 허리에는 흑야를, 그리고 머리 위론 새까만 죽립을.
떠나는 목리원의 걸음은 가벼웠다.
*
강서성 어딘가의 작은 표국.
넓직한 장원의 마당은 분주했다.
표행을 떠나는 표사들이 여정을 준비 중인 까닭이었다.
“삼아! 거기 물건 좀 싣거라!”
“예!”
삼류 무인, 표사 우삼은 생각했다.
‘지긋지긋하네 진짜.’
이놈의 표사 일은 언제 그만둬야 할까, 라고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규모는 작은 주제에 항상 감당하지 못할 일을 받아와 위험을 감수하게 만드는 표국주, 틈만 나면 쉬는 것으로 타박하는 표두와 꼬장꼬장하기 그지없어 사소한 것으로 꼬두리를 잡아대는 선배 표사들까지.
이놈의 표국엔 우삼이 좋아할 만한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하나가 있긴 했다.
“표사님!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응? 아, 감사합니다.”
고개 돌린 우삼의 눈에 비친 것은 순박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나이대는 우삼과 비슷했고, 입은 옷은 참으로 고급져 예사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 단번에 드러나는 여인.
그녀는 표국주의 딸 교연이었다.
그리고 우삼의 오랜 짝사랑 상대였다.
우삼은 헤벌쭉한 얼굴로 교연이 건넨 새참을 받았다.
이게 싫으니 저게 싫으니 하면서도 이 표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당신임을 알까.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에 우삼은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이번 표행 잘 부탁해요. 저도 같이 가거든요.”
“네… 응? 네?”
우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교연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표행이잖아요?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으시니 그 대신으로 제가 함께 떠나는 거예요.”
“아니, 잠시, 잠시만요. 아가씨.”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일까.
오늘 표행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교연이 직접 나설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나서선 안 됐다.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녹림 놈들이 아주 활개를 치고 다니는지라….”
정마 대전 이후 7년.
작금의 무림은 혼란했다.
거대 문파들이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기 위해 한껏 몸을 웅크린 탓에 녹림이나 흑도 따위의 것들이 설치는 것이 아니겠나.
요즘 표행이 예전보다 힘들어진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얼마 전에도 근처 마을 하나가 녹림에게 털렸다 하덥니다. 들리는 말로는 아직 근방에 그들이 있다 하는데, 이런 상황에 아가씨께서 표행에 나섰다간 어찌 되겠습니까? 재고해 주십시오…!”
“뭐가 걱정인가요. 장표두님이랑 표사님이 계신데요.”
우삼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장표두가 겨우 일류 턱걸이를 하는 인간이지 않습니까!’
표국 무사들은 대부분이 이류거나 삼류였다.
표두인 장숙조차 일류에 손끝 하나 닿은 게 끝인 사실상 이류 무인이었다.
그에 반해 녹림은 어떤가.
채주급이 나오면 적어도 일류에서 절정.
그 부하들 또한 이류는 우습게 보는 것들.
우삼으로서도 상황을 봐서 도망갈 마음가짐으로 떠나는 표행인데, 교연이 표행에 끼면 입장이 너무 곤란해졌다.
우삼은 그녀를 버리고 도망칠 자신은 없었다.
“괜찮아요. 설마 녹림을 만나겠어요?”
교연은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 작게 웃으며 떠나갔다.
“자! 슬슬 출발할까요!”
힘있는 외침에 설렘이 깃들어 있었다.
우삼은 울상을 가득 띄워 올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우, 어쩌려고 정말…!”
우삼은 기도했다.
제발 녹림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지만 하늘이 무심한 것일까.
“쳐라―!”
“습격이다!”
떠난지 고작 사흘, 우삼의 행렬은 녹림을 만나버렸다.
그것도, 녹림의 72채 중 하나를 이끄는 녹림 채주의 직속 부대를.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삼은 지난 사흘을 돌이켰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망할 표두놈 때문이지!’
이 모든 상황이 환한 대로를 놔두고 하루라도 일찍 도착해보겠다며 숲길로 빠진 표두의 업이었다.
대로로 가도 습격을 걱정해야 할 판에 인적도 드물고 험한 산을 타고 다니니 산적을 안 만날 수가 있겠는가?
우삼은 끓어오르는 울분에 표두를 노려봤다.
표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 이런…!”
이런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삼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뇌까린 순간이었다.
“본좌는 녹림의 살명부(殺命斧)라 한다. 네놈들은 어찌 내 영역에 제발로 들어온 겐고?”
험악한 인상의 산적이 씨익 웃었다.
녹림 채주 살명부.
근방에선 그 성정이 끔찍하기로 유명한 사내였다.
“뭐, 중요치 않은 일이지. 닥친 사실은 내 땅을 지나가는 자네들이 표국의 인물이라는 것. 같이 장사하는 처지에 서로 가진 걸 좀 나눠야하지 않겠나?”
살명부의 시선이 교연에게 닿았다.
순간, 그의 눈빛에 음심이 스쳐 지나갔다.
우삼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놈이!’
감히 어딜 개눈깔을!
속으론 욕을 한 바가지나 내뱉지만 삼류 무인인 우삼이 행동을 더 할 수는 없었다.
우삼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교연 또한 살명부의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몸을 움찔 떨었다.
“간만에 분냄새 좀 맡겠구나!”
살명부가 성인 남성의 상체만 한 도끼를 어깨 위로 걸쳤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우삼의 속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쳐라―!”
살명부가 외치는 순간이었다.
“흠,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낯선 사내가 녹림과 표사들 사이에 홀연히 나타났다.
검은 죽립을 쓴 터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행색은 꽤나 특이한 면이 있었다.
허리에 하나, 등에 하나 총 둘의 검을 차고 있었고, 검은 무복은 곳곳이 기워져 있었다.
속세를 벗어나 사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냐!”
살명부가 외쳤다.
한데, 조금도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외침이었다.
절정의 무인이나 되어 고작 사람 하나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죽립을 쓴 사내의 고개가 살명부를 향했다.
“궁금하오?”
꽤 젊은 목소리.
웃음기가 작게 묻어나는데, 우삼은 왜인지 그가 웃고 있진 않을 것이란 생각을 떠올렸다.
그 정도로 사내의 목소리엔 노골적인 비소가 묻어나 있었다.
“셋을 세어 드리지. 그 안에 떠나시오.”
사내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셋.”
또 하나를 접었다.
“둘.”
우삼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혹 은둔고수가 아닐까.
지금 저자가 우리를 구해주려는 듯한데, 대관절 얼마나 강하길래 절정의 무인이 지레 겁부터 먹는 건가.
생각한 순간,
“하나.”
살명부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상한 듯 이마 위로 핏줄이 돋아난 모습이었다.
“쳐라!!! 상대는 고작 하나다아아아!!!”
쾅!
살명부가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도끼에 갈색의 기파가 뭉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그 뒤로 녹림의 산적들이 일제히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후의 일은 우삼의 이해를 벗어나 있었다.
우삼의 눈은 사내를 쫓지 못했다.
그정도로 사내는 빨랐고, 기이했고, 강했다.
우삼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는 하나였다.
채재재쟁!
사내의 신형이 흐려지는 순간 소리가 일었고.
“어리석구려.”
라고 사내가 말하자, 녹림의 산적들이 동시에 쓰러졌다는 것.
예외 없이 모두 기절한 것이다.
바로 그 살명부조차.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공간 전체에 깔렸다.
누구 하나 멍한 기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고개 돌린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시오? 녹림을 만나 놀라셨겠구려.”
“누, 누구시오?”
표두가 물었다.
표두의 목소리엔 경계심이 맺혀 있었다.
사내는 쿡쿡 웃더니 죽립을 벗었다.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되오.”
그 순간,
“아…!”
교연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뺨엔 홍조가 떠올랐다.
우삼은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으나, 직후 사내의 얼굴을 보곤 그런 감정을 잊었다.
‘미, 미친….’
사내는 경쟁심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미남이었다.
우삼은 ‘이런 것을 개안이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교연과 마찬가지로 탄성을 흘렸다.
“목리원이라 하오. 나는.”
사내가 포권을 취했다.
“강호 동도들은 나를 묵룡이라 부르더구려.”
묵룡.
그 말에, 우삼은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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