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7 이십일장 - 고별,협 성련 (3)
* * *
장례 행렬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런 전쟁을 이미 겪었던 전대의 무인들은 덤덤히 이별을 받아들였다.
강호를 오래 겪은 중년의 무인들도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저, 이제야 강호의 민낯을 보게 된 젊은 무인들만이 사무치는 슬픔에 몸을 떨었다.
“크흐윽…!”
가까운 이와의 이별, 예기치 않은 죽음, 그리고 검과 피.
노고수들은 이 모든 것이 양분되어 경험으로 화할 것이라 하지만 그런 말에 귀기울일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었다.
탄식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다.
또한 증오가 있었다.
그런 한가운데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일운은 말했다.
이제야 장례를 끝낸 그는 마음을 추스른 것인지, 그도 아니면 얼굴 위로 두꺼운 가면을 쓴 것인지 모를 얼굴로 당화서에게 말했다.
“공은 공으로 돌아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일운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는 것은 씁쓸한 미소였다.
그게 당화서로 하여금 더욱 짙은 걱정을 떠오르게 했다.
“힘드시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잠시 일운이 입술을 달싹이다,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방장님께선 언제나 말씀하셨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당화서는 그 순간 일운의 목소리에 깃든 감정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나름의 방법으로 이겨내고 계시구나.’
이 전쟁을 치른 모든 이가 그렇듯 일운도 나름의 방법으로 슬픔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이제 한동안 이별이겠군요.”
일운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무림맹과 연합은 청해에서 철수한다.
용봉단 역시, 한동안은 각자의 소속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스님께선 바로 소림에 가시는 게지요.”
“예, 방장님을 모셔야하니 말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당화서는 알고 있는 단원들의 향방을 일운에게 일렀다.
“제갈산은 세가로 간다고 합니다.”
가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당화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제갈산이 청해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고, 그 결과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 정도는 당화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가주가 불구가 되었으니 어쩌겠수? 게다가, 개인적으로 청산할 일도 있어서 말이우. 그러니 누님, 잠시 이별입디다.
꽤 시원스러운 미소가 당화서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일운이 말했다.
“그렇군요. 혜운 스님은 어찌한다십니까?”
“백봉은 도왕님과 떠난다고 하십니다.”
“…도왕님 말입니까?”
“예.”
당화서는 저 반응을 이해했다.
확실히 너무 의외의 조합인 까닭이다.
되새기는 것은 혜운에게 들은 말이었다.
-선택지가 두 개 있어요. 우리 스승님이랑 도왕님이 친분이 깊어요. 스승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아미파로 돌아가서 나한테 더 수련받을래, 도왕님이랑 강호에 나갈래. 제가 어쩌겠어요?
당화서가 기억하기로, 그 말을 내뱉는 혜운의 얼굴 위론 투쟁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번엔 너무 존재감이 없었잖아요? 다음엔 다를 거예요.
그녀도 나름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당화서가 봐도, 혜운은 노력만 한다면 능히 다음 경지를 넘볼 재능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일운은 고개를 끄덕이다 이어 물었다.
“남궁 시주님은 어찌하신답니까?”
“비무행을 떠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비무행 말입니까?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실전경험을 쌓는다나 뭐라나. 뭐, 걱정은 안 들더군요. 그 인간 아시잖습니까.”
-실전이 더 필요하다. 이번엔 환경에 따른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남궁진천은 그 말만 남기고 냅다 떠나가 버렸다.
세가에도 알리지 않은 것인지, 다음날 남궁세가의 일원들이 찾아와 남궁진천의 행방을 물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일운은 알만 하다는 듯 웃었다.
“남궁 시주님답군요.”
얼굴 위로 진 그늘이 조금 옅어진다.
일운은 쿡쿡 웃다, 이내 당화서에게 물어왔다.
“그럼 당 시주님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이제 저도 가문으로 돌아가야지요.”
전쟁이 끝난 이후 꽤 오래 고민했던 일이다.
그리고 이제야 결단이 선 일이다.
‘강해져야 한다.’
힘이 필요했다.
목리원을 지키긴커녕 따라가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얼마나 무력함을 느꼈던가.
당화서는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방법은 있다.’
생각나는 방법이 꽤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실천하려면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그럼 목시주님과 함께 가시는 겁니까?”
흠칫, 순간 전해진 질문에 당화서의 몸이 멎었다.
“아….”
모른다.
목리원과는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목선오가 명을 달리했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
목리원은 아직 안채를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당화서의 미소에 씁쓸함이 더해지기 시작하자 일운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괜히 그것이 미안하여 당화서는 말했다.
“…마침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일운이 합장했다.
“인사라도 드리고 떠나고 싶었건만, 갈길이 바빠 저는 오늘 바로 떠나가야 합니다. 안부를 대신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맡겨주십시오.”
“그럼 이만.”
일운은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답지 않게 미련 없는 모습이었다.
당화서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정신을 다잡았다.
‘그럼….’
이제, 목리원을 만나러 가야 할 때다.
*
당화서는 곧장 안채로 향했다.
언제나 입구부터 굳게 닫혀있던 안채가 오늘은 열려있었다.
의아함을 느끼길 잠시, 이윽고 오늘은 목리원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화서의 발걸음에 기대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왔느냐.”
그런 그녀를 반기는 것이 마일석.
조금, 많이 초췌해진 낯에 당화서는 고개를 숙였다.
“걸왕님을 뵙….”
“되었으니 들어가거라.”
마일석이 턱짓했다.
여태껏 본 모습 중 가장 허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안타까움이 일었다.
하나 드러내서는 실례가 될 일.
당화서는 포권을 취한 후 그를 지나쳐갔다.
그 순간 마일석이 말을 덧붙였다.
“이야기 잘 나누고 오거라.”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였다.
당화서는 의구심을 속에 떠올린 채 또 걸음을 옮겼고, 그런 후에야 목리원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환기를 하지 않은 것인지 퀘퀘한 냄새가 나는 방.
목리원은 그 한가운데 있었다.
“…아.”
목리원의 눈 밑이 거뭇하다.
표정은 혼이 빠진 듯했으며, 그런 탓에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짓는 미소가 애처롭게만 보였다.
그런 중에도 쨍하게 달아올라 있는 붉은 눈동자가 시선을 어지럽힌다.
“소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당화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으십니까?”
내뱉는 말엔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전해진 것일까, 모르겠다.
목리원은 여전히 애써 웃는 얼굴이었다.
“괜찮아져야 하지 않겠소.”
그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이었다.
“괜찮아져야지. 그리해야 또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중얼거리는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만 느껴졌다.
처음이었다.
목리원을 대하면서 이리도 말문이 막히는 순간은.
물론 충분히 이해는 되는 일이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와 스승 역할을 함께 했던 목선오의 죽음이 아닌가.
그 상실감은 당화서가 감히 이해를 말할 수 없는 종류였다.
당화서는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고개는 떨어졌다.
이런 목리원의 모습은 보고싶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목리원은 언제나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무어라도 그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도 안 된다면.’
곁에서 위로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목소협.”
하여 당화서는 용기를 내어 서두를 열었다.
“말하시오.”
“저….”
말 한마디가 왜 이렇게도 툭 걸려 나오지 않는지.
당화서는 바로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겨우 속에 든 말을 토해내듯 내뱉었다.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당문으로.”
쿵, 쿵.
당화서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란 것일까.
그럴 테다. 당화서가 당문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목리원이니 말이다.
하여 당화서는 말을 더했다.
“당문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또한 새로운 수련을 해보려 합니다. 그 자리에 목 소협이 함께 있으셨으면 합니다. 목 소협의 수련도, 제가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빈말이 아니었다.
곧 죽어도 세가다.
곧 죽어도 당문이다.
전쟁을 지원하느라 꽤 많은 자원을 소모했지만 아직 당문엔 남은 게 더 많았다.
목리원의 수련을 지원하는 일이라면 당장 금지의 영물들도 있지 않던가.
목리원에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리라.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미안하오.”
그렇기에 답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당화서는 벙찐 얼굴이 됐다.
“예…?”
“미안하오. 함께 가진 못할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일까.
당화서의 속에 의아함과 당황이 동시에 차올랐다.
목리원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떠나려 하오.”
여전히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잠시… 아니, 꽤 오랫동안.”
미안하다는 듯 눈짓하며.
“이 강호를 떠나있으려 하오.”
그것에 당화서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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