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12화 (212/334)

EP.213 이십장 - 충돌, 격류 (19)

* * *

검에 새기는 의(意)는 협(俠)에 있음에, 목선오는 멈추지 않았다.

마귀의 웃음소리를 멈추겠다는 결심 하나로 비틀거리는 걸음을 애써 다잡는다.

공간을 메운 심의의 폭풍 속에서 오로지 협의만이 옳은 대의임을 부르짖는다.

그리하여 천마의 가슴팍을 벤다.

서걱―

깊지 않은 공격이었으나 확실한 유효타였다.

목선오가 노린 것은 애초에 그의 육(肉)이 아닌 영(靈)이었으니.

“크핫…!”

반격하겠다는 듯 천마가 일권(一拳)을 내지른다.

목선오는 막았다.

하나, 그 속에 스며든 패도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폐부가 찌부러지는 감각이었다.

입속에서 피 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퉤, 핏물을 뱉어낸다.

손날을 벼려 공격을 잇는다.

콰아아앙―!

천마가 맞부딪쳐온다.

그리하여 또다시 연이어지는 공방.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나, 착실히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선천진기가 고갈되어간다.

목선오의 눈은 어느새 천마가 아닌, 스스로가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고 있었다.

*

무림은 비정하다.

그 숲 어딘가를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제 칼침을 맞을지 모를 정도로.

목선오의 무림도 그랬다.

8세, 목선오가 일가친척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날이었다.

한미한 지방의 무가 출신, 그의 세상을 앗아간 것은 같은 지방 다른 무가에서 고용한 한 암살자였다.

“나를 원망하거라.”

암살자는 서늘한 눈으로 그리 말했다.

어린 날의 목선오는 기꺼이 그러겠노라 답했다.

모든 것을 앗아간 암살자와 무가를 향한 복수심.

그것이야말로 그날의 목선오가 목을 매달지 않게 해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목선오는 만났다.

“고놈 참 눈이 똘망똘망하구나.”

그는 거대한 풍채와 산적 같은 인상이 특징적인 사내였다.

스스로 소개하길 우림.

“나는 성련(星聯)의 문주다.”

그는 그리 말하며 이어 권유했다.

“너는 협의(俠義)를 아느냐.”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

목선오는 그를 따라 떠났다.

척 보기에도 그가 강자인 것은 의심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기에 복수할 힘을 얻고자 몸을 의탁한 것이다.

그렇게 성련을 배웠고, 협의를 배웠다.

“복수가 목표라 말하는 것이냐?”

우림이 묻기에 목선오는 답했다.

“저의 세상을 앗아간 이에게 마땅히 벌을 주려 합니다. 제가 그른 일을 원하는 것입니까?”

목선오는 그날 원독에 차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기에 우림의 답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른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빼앗긴 자의 원망은 참으로 합당한 감정이니.”

“그렇다면….”

“하지만.”

“…?”

“구태여 그리할 필요가 있겠더냐. 너는.”

우림의 미소는 지긋했다.

또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선오야, 너는 재능이 있지 않느냐. 강자가 될 수 있는 사내가 아니더냐. 너의 힘을 다른 곳에 써줄 수 있는 사내가 아니더냐.”

“그놈의 협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하다.”

대체 협의가 뭐길래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가.

참으로 합당한 나의 복수를 그만두라 말하는 건가.

물론, 협이 무인에게 필요한 관념임을 목선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너그러움을 발휘해보기에, 목선오는 암살자와 무가가 너무 미웠다.

험악한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자 우림이 말했었다.

“선오야.”

“…예.”

“협객이란 무엇이더냐.”

“협을 행하는 자입니다.”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굳건했다.

“구태여 가장 어려운 길을 가는 자. 그리해야만 하기에 누구보다 강해야 하는 자.”

기색 또한, 굳건했다.

“그것이 바로 협객이다.”

목선오의 마음속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원망을 녹여낸 것은 그 한마디였다.

*

무엇이 협이고 무엇이 무인인가.

목선오의 성장기를 내내 함께한 고민이었다.

우스운 일이 있었다.

그런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마음속의 원망은 점점 희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시간에 바래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든, 이립이 된 목선오에겐 하나의 확실한 결의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직접 그를 만나, 그때 결정하겠습니다.”

원망이 희석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바래진 것인지.

암살자를 다시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우림에게 그리 말했다.

우림은 답했다.

“너의 선택을 존중하마.”

그리고 20년을 더 수련했다.

우림은 교만함을 멀리하라 이르며 빠르디 빠른 목선오의 성취를 매번 깎아내렸다.

목선오 역시 그의 뜻을 잘 알기에 구태여 고집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그저 겸허한 마음으로 정진하고 또 정진하여.

목선오가 하산하게 되는 것은 우림의 명이 다하는 날이었다.

“선오야.”

“예, 스승님.”

“성련이란 무엇이냐.”

“협객의 무학입니다.”

“협객이란 무엇이냐.”

“구태여 가장 어려운 길을 걷는 자입니다.”

“네가 이제 문주다.”

우림은 그날이 되어서야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미소를 지었다.

목선오는 그 미소를 앞두고 아홉 번 큰절했다.

“불초 제자가 성련의 열 번째 문주가 되었습니다.”

“이 의지를 이어다오.”

“누구에게 이어가야 하겠습니까?”

“네가 생각하기에, 협객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에게.”

“그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그 누구보다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하는 아이에게.”

“그걸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이 우림의 유언이었다.

“성련은 별을 잇는 무학이니.”

목선오의 앞길을 밝혀준 마지막 말이었다.

“너는 어렵지 않게 그 답을 꼭 알게 될 것이다.”

성련의 9대 문주는 그리 말하고 숨을 거뒀다.

*

40에 강호초출.

목선오는 성련문의 성지에 스승의 봉분을 만들고 강호로 나섰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목선오의 유년기를 내도록 괴롭게 만들었던 무가와 암살자를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허무함이 있었다.

“백가 말이오? 망한 지가 10년이오. 그리도 악독하게 굴더니 더 악독한 흑도 놈들에게 집어삼켜졌지 뭐요.”

암살자를 고용한 무가는 망했다.

권선징악이라 할 수 있겠다.

혹은 이이제이라 할 수 있겠다.

목선오는 갈 길 잃은 걸음을 애써 다독여 암살자를 찾았다.

약 1년, 그 여정 끝에서야 만났다.

“목가의 장자로구나.”

살곡(殺谷).

그리 불리던 곳에 그가 있었다.

살곡의 문주이자 강호에서 가장 위대한 암살자라는 이름으로, 그는 자리를 틀고 있었다.

“나를 기억하시오?”

“너에게 나를 원망하라 이른 것까지 기억한다.”

“허면 내가 대가를 받으러 온 것에 불만은 없겠구려.”

“그리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와의 대담에서, 겨우 목선오는 긴 세월 함께했던 감정의 답을 찾았다.

“…그렇구려.”

목선오의 속엔 더 이상 원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케케묵은 원한이 찌든 때로 흔적을 남기고 있긴 하나, 그것은 더 이상 목선오의 몸을 이끄는 원동력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엔 이미 원망 따위 보다 더 원대하고 찬란한 마음이 존재했었다.

“당신을 용서하겠소.”

성련의 주인 되어 강호에를 밝히는 별이 될지니.

복수가 아닌 용서를 품어 일말의 빛을 강호에 드리울지니.

목선오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소.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보다 더 원대한 일을 하려 하오.”

“그것이 무엇이냐?”

“협행이오.”

살수는 희게 웃었다.

“그래.”

.

그리고 비도를 뽑아 들었다.

“그렇다면 원망이 아닌 다른 이유로 나와 겨뤄야겠구나.”

“그 이유가 무엇이오?”

“강호의 평온.”

살수가 기파를 뿜었다.

“나, 살왕(殺王)을 꺾어라. 금전 눈멀어 양민의 목숨을 거두는 악한 이를 처단하여 협를 이루거라. 그리하여 강호의 평온에 기여 하거라.”

목선오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평생 남의 목숨을 앗아온 이가 생의 끝에서야 바라게 된 참회였다.

뒤늦게야 죗값을 치르려 하는 죄인의 고해였다.

그렇기에 검을 뽑았다.

“그리하겠소.”

그날, 딱 10번의 수를 나눠 목선오는 살왕의 목을 베었다.

과거의 원망을 베고, 오롯한 협객으로 바로 섰다.

그리고 만났다.

“아버지?”

아직 젊었던 살성(殺星) 염소소를.

*

강호는 넓고 고수는 모래알갱이처럼 많다.

그 말대로, 목선오는 수많은 고수를 만났고 수많은 삶을 겪었다.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내도록 암살을 시도해오던 염소소, 그저 최고가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매번 도전해오는 남궁혁, 지키기 위해 겁쟁이인 스스로를 숨기는 사백운과 낭만에 살고 낭만에 죽는 마일석,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어느새 목선오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하여 목선오는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뜻을 펼쳤다.

세간이 평하기에도, 그리고 스스로가 평하기에도.

목선오는 협객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혈사가 있소.”

내 마땅히 강호에 드리운 마지막 암운을 걷어내고 이 길고 길었던 협행의 끝을 보리라.

그리 마음먹었고,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천살성이오.”

목선오는 그제야 스승의 말을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의지를 이어다오.

-그 누구보다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하는 아이에게.

성련의 문주로서, 그는 스스로에게 지워진 과업을 기꺼이 이루어냈다.

그러니 미련은 없었다.

*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목선오는 끝을 바라봤다.

천마와 자신, 둘 다 곧 한계를 다할 것이다.

이 길고 길었던 생업이 모두 끝맺을 것이다.

“스승님―!”

순간 목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엉망진창이된 목리원이 마일석에 업혀 있었다.

그를 보자 재차 머릿속에 떠오른다.

-별이 되거라. 홀로 영광되어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어둠 속을 밝혀 약자들을 인도하는 별이.

이르길, 성련의 후계자가 되어 살아왔다.

그저 어두운 밤을 밝혀주면 그것으로 족하여, 가장 어두운 강호를 아스라이 빛내줄 빛이 되고자 걸어 나온 여정이었다.

그러니,

“안 됩니다―!”

울지 말거라. 원아.

나는 괜찮다.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성련(星聯)의 의지는 이어질 것이니.

나는 나의 의지를 이을 사람으로 너를 고른 것이니.

세상을 뒤흔드는 운명이 아닌 내가, 너를 고른 것이니.

너야말로 세상 누구보다 위대한 협객이 될 것임을 이 목선오가 보증하니.

‘그러니….’

나아가 협(俠)을 행하거라.

네가 미처 거두지 못할 암운은, 내가 거둬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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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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