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8 이십장 - 충돌, 격류 (14)
* * *
목선오의 망막에 새겨지는 전장은 참혹했다.
함께 혈사를 헤쳐 나갔던 전우들의 시신이 보인다.
아직 땅을 딛고 일어서있는 반가운 얼굴들 역시,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혈향과 쇠냄새, 서로 닮은 악취가 코를 찌른다. 가쁜 숨소리가 고막을 진동시킨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더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승….”
목리원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린다.
목선오는 전음을 보냈다.
[원아, 그리해서는 안 된다.]
목리원의 기척이 흠칫 떨렸다.
가슴이 아파 왔다. 스승을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절로 시선이 간다. 고작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목리원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어여쁜 생김새는 그대로, 하지만 품은 공력이나 정련된 기파는 뿌듯함을 일게 한다.
또한 전장의 한가운데서 미쳐 날뛰지 않는 것이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천살성을 어느정도 통제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럼에도 마냥 흐뭇하게만 볼 수 없는 것은 이곳에 도달하기 직전 목리원이 보였던 행동 탓이다.
‘스스로를 희생하려 했구나.’
협으로서 옳은 행위, 하나 부모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행위였다.
목선오는 그런 행위를 위해 목리원의 부모가 되길 자처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재회의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나 같은 이를 스승이라 불러선 안 된다.]
스스로 해낸 맹세조차 깬 불한당을 스승이라 불러선 안 된다.
차마 내뱉지 못한 속뜻에 안타까움만 인다.
목리원의 고개가 떨어진다.
목선오는 지그시 웃었다.
“끝났나?”
천마가 묻는다.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 어찌 이리도 악독하게만 느껴지는지, 목선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굳혔다.
“자리를 옮기도록 합시다.”
“내가 그리해야 할 이유가 있나?”
“당신께는 이 모든 이들의 생이 무용한 까닭이오. 하나, 내겐 아닌 까닭이오. 이것은 내가 당신의 부름에 이곳까지 온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거쳐야 하는 합의의 과정이라 생각하오.”
“그래, 허한다.”
천마는 빙긋 웃곤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이 향한 방향은 전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어느 산맥이었다.
“따라오라.”
스르르, 천마의 몸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형님!”
그제야 마일석이 달려온다.
뒤따라 중원의 초월자들이 달려온다.
마인들은 굳어있다.
형세가 역전된 것이다.
목선오는 이들에게 또한 목리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할애해줄 수 없었다.
천마의 인내심이 길지 않음은 그간 대륙을 넘어 전해져온 악의를 통해 능히 알 수 있었던 까닭이다.
“시간이 없구나. 그러니 이 하나만 말해야겠다.”
목선오는 사백운을 바라봤다.
“미안하오. 내 약속을 깨버렸소.”
사백운의 표정이 무너져내린다.
참으로 마음이 약한 사내라, 악독한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다.
그 호의를 이용해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함을 이해해주시오. 이만 가겠소.”
이별의 순간이 길어지면 아쉬움만 짙어지는 법.
목선오는 천마와 마찬가지로, 신기루가 되어 공간에서 흩어졌다.
그것은 초월을 넘어서며 삼라만상의 이치와 하나 되며 새로이 알게 된 무(武)의 공능이었다.
*
청해의 어딘가, 목선오는 천마가 남긴 흔적을 따라 내내 달렸고 그 끝에서 한 산맥의 봉우리에 다다랐다.
“이 정도면 되었나?”
천마가 묻는다.
그의 흑색 장포가 바람에 휘날린다.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흑발, 그리고 심연을 박아넣은 듯한 새까만 눈동자.
즐겁다는 듯 미소 짓는 모습조차 악의(惡意)로만 비치니, 과연 천마라 할 만하다.
목선오는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리오.”
“그런 이야기나 하고 싶어 부른 것이 아니다.”
천마가 뒷짐을 졌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오?”
“왜 등선(登仙)하지 않았나?”
흠칫, 목선오의 어깨가 떨렸다.
천마는 이죽이며 물었다.
“미련이 남아있는가? 신선 되어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등선을 막는 건가?”
순수한 의문으로 보일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천마와 같은 경지에 서 있는 목선오이기에 아는 것이 있었다.
“우둔한 것.”
초월을 넘어 다음 경지.
경지를 수습하여 안정기에 들어가는 순간 무인은 등선을 예비해야 한다.
만약 제때 등선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간으로 남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목선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등선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죽는 것이 무에 나쁜 일이겠소.”
“무인으로서, 강자로서 그르다.”
“허나 협객으로서 옳소.”
목선오는 검 끝을 천마에게 겨눴다.
“이 몸 다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협의요. 탐욕의 영역에 걸친 향상심을 걷어내는 것이 협의요. 그러니 후회하지 않소. 덕분에 당신을 막게 되었으니, 더욱이 후회하지 않소.”
최초, 목선오가 스스로의 등선을 직감한 것은 10년 전이었다.
아직 어린 목리원이 한창 목검을 휘두르던 나이였고,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가 보기 어여뻐 흐뭇하게 웃던 날이었다.
선택해야만 했다.
마일석에게 남은 것을 맡기고 등선하느냐, 그도 아니라면 이곳에 남아 목리원을 직접 돌보느냐.
어찌 무인으로서 등선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 선계로 떠난다면 갈 곳도 없는 어린 목리원에 세상 풍파에 스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들풀과 꽃을 보면서 환히 웃던 아이가 눈에 밟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등선하지 않았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던, 목리원에게 하나라도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었다.
후회는 없다.
그러니, 천마의 말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오시오.”
무인은 검으로 말한다.
목선오는 그 규율대로 천마에게 일렀다.
천마는 그제야 김빠진 숨을 흘렸다.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다.”
쿠궁, 그 순간 하늘이 울었다.
“꿈속에 사는구나. 미물.”
흑색의 기운이 천마의 몸을 휘감는다.
목선오는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한 투기를 느꼈다.
하나 특이한 점이라면, 저 기운의 어디에도 마기(魔氣)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
탈마(脫魔)의 지경에 오른 것이다.
목선오는 천마와 마찬가지로 기파를 풀어헤쳤다.
검게 물드는 공간 위로 별이 떠오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겠다는 듯 강렬한 색채였다.
“꿈에 살아 꿈에 죽는 것.”
목선오가 진각을 밟았다.
“그것이 협객이오.”
쿠웅―
땅이 갈라졌다.
*
전장은 두 사람이 떠난 이후도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사백운이었다.
“지금이다!”
이를 악 물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창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비단 결의 뿐만이 아닌 여러 감정이 묻어난다.
울분, 회한, 수치심, 희망 등의 감정이 혼재되어 목리원은 바로 그 감정을 파악해낼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
스승님이 왔다.
다시는 강호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도 저버리며 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나섰다.
목리원은 목선오를 알았다.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중시하는 사람이 바로 검성 목선오라는 것을 알기에, 그 희생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여 몸을 일으킨다.
검 위로 기파를 덧씌우고 공간을 묵색으로 물들인다.
목선오에 비하면 아직 미약한 별빛을 그 위로 덧씌운다.
“쳐라―!”
마인들이 달려든다.
목리원은 검을 휘둘렀다.
그런 순간이었다.
쿠웅―
저 멀리, 신기루가 되어 떠나간 두 사내의 것이 분명한 아득한 기파가 충돌한다.
그 진동이 이곳까지 다다르는 것에 목리원은 흠칫 몸을 떨었다.
불안감이 깃든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강자가 바로 천마다.
목선오가 진심을 발휘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기에 정확한 우열을 따질 수는 없으나, 저 승부가 쉽지 않을 것이란 사실 만큼은 자명했다.
혹여 목선오가 당하지는 않을까.
스승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지 못했건만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감이 사무친다.
덜컥 겁이 난다.
채애앵―!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지만 신경은 이미 굉음이 울려오는 저편으로 향해있다.
그리고, 그런 와중 느낀 것이 있었다.
‘…소천마.’
이제껏 침묵하여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기파가, 목선오가 있는 방향에서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양동.
틈을 노려 목선오의 뒤를 노리는 수.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낚으려는 미끼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목리원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가야 한다.’
소천마가 무엇을 노리던, 자신이 가지 않으면 이 전장과 목선오 둘 중 하나는 위험해진다.
그가 노리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가 사정따위를 봐줄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청룡비무제에 이미 깨달은 것 아닌가.
목리원은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일석이 뒤늦게 눈치채고 외친다.
“원아!”
목리원은 이를 짓씹으며 무시했다.
상대는 초월의 마인.
승패는 명확하다.
그렇기에 승리는 떠올리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만을 떠올린다.
‘버텨야 한다. 어느 한쪽에 여유가 생기기 전까지.’
그 정도라면, 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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