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06화 (206/334)

EP.207 이십장 - 충돌, 격류 (13)

* * *

천마(天魔), 그의 등장과 함께 공간의 모든 열기가 사그라든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힘에 오로지 정적만이 감돈다.

“싸우라 하였다. 때가 될 때까지.”

거듭 내뱉는 말.

그에 복종하는 자가 외쳤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마교의 1장로였다.

쾅!

진각을 밟으며 1 장로가 달려든다.

사백운은 이를 악 물며 창을 들었다.

“맞서 싸워라―!”

공방이 이어진다.

마음이 꺾인다.

공방을 나누는 것은 분명 눈앞의 1장로일진대, 신경은 온통 천마에게만 몰린다.

제아무리 기세를 가져온다 한들 천마가 나서는 순간 모든 병력이 휩쓸리리란 미래를 이미 알기에, 그저 끝없는 무저갱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듯한 피로감만이 사백운의 전신을 찍어 눌렀다.

그럼에도,

“검을 들어라―!”

사백운은 외쳤다.

초라하고 처절한 발악을 시작했다.

등 뒤에 지켜야 할 이들이 너무 많기에 그리했다.

채앵!

쇳소리가 다시금 전장을 메운다.

*

목리원의 무릎이 꿇렸다.

“흐으…!”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흐르는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호흡은 가쁘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댔다.

이 모든 것이 천마가 나타난 순간부터 나타난 반응이었다.

‘저것이…!’

천마(天魔), 모든 마(魔)의 주인, 또한 이 전쟁의 주인.

목리원은 경악을 토해냈다.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저 천마를 따르는 장로들과 소교주보다 그를 더 잘 아는 것이 자신이리라는 확신, 그것이 목리원의 속에 가득 차는 것이다.

‘천살성이….’

경고했다.

오로지 피만을 바라보는 살귀의 별이 생애 처음 도주를 말하고 있었다.

육신을 지탱하던 극마지체(極魔之體)가 굴종을 말하고 있었다.

언제나 독존을 말하던 마기와 살의가 그를 항거할 수 없는 재앙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목리원의 이가 악 물렸다.

와중 짓쳐드는 조잡한 살기가 있었다.

한데도 검을 들 힘이 들지 않아 팔이 덜덜 떨리던 중이었다.

“목 소협!”

당화서가 나타났다.

쾅!

소리와 함께 뻗어 나온 암녹색의 기파가 덩어리져 마인을 후려친다.

목리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소저!”

“일어나십시오!”

목리원의 머릿속에 선택지가 드리워졌다.

이대로 당화서를 데리고 자리를 피한다, 혹은 맞서 싸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절망적인 선택지였다.

신념과 함께 죽는 방안을 떠올리기엔, 목리원에게 당화서는 너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목 소협!”

당화서가 재차 외친다.

목리원의 인상이 어그러졌다.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

고개가 휙휙 돌아간다.

이런 절망감을 자신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직전까지 발악을 이어가던 중원 무인들의 얼굴 위로 짙은 패배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이들이 아는 것이다.

이 승부는 결국 천마의 손에 끝맺으리란 것을.

그렇기에 검에 망설임이 깃든다.

의지가 꺾여나간다.

그 광경이 화인처럼 망막에 새겨지는 것이 너무 아파, 목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는 아니었다.

‘…일어나거라.’

꿇려진 무릎을 타박했다.

‘검을 쥐거라.’

손에 힘을 더했다.

목리원은 알았다.

도주는 쉽다. 이대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라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하나 그리해선 안 된다.

도주를 떠올리는 순간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던 까닭이다.

-협객은 구태여 가장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스승의 말은 목리원의 삶 전반을 지배하는 말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일으켜준 말이었고, 삿된 길을 떠올릴 때마다 채찍질을 해준 말이었다.

이번 역시 목리원은 그 말에 기댔다.

‘스승님.’

간절히 그 이름을 불러본다.

응원받고 싶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리고서야 목리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가겠소!”

당화서에게 외쳤다.

그리하며 전장의 한가운데로 향한다.

어느덧 양상이 굳어진다.

이제 5인이 겨우 남은 중원의 초월자들이 마교의 초월자들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그들이 전열을 다잡으려 할 때면 천마에게 달려든다.

마일석이 봉을 휘두른다.

사백운이 창을 찔러넣었고 염소소가 시야를 어지럽힐 정도의 비수를 쏘아댄다.

진건의 도가 공기를 찢었고 남궁혁의 검이 검풍을 일으켰다.

물론, 의미 없는 발악이긴 했다.

천마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선 자리에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날카롭던 공격이 힘을 잃었다.

마치 천마를 향한 살의를 삼라만상이 허용하지 않는 듯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싸워라. 내가 아닌 저들과.”

천마는 공허한 듯 숨을 흘리며 말했다.

목리원은 천마를 꿰뚫듯 노려봤다.

‘찾아야 한다.’

머릿속에 경고음을 울려대는 천살성을 다독였다.

제아무리 강자라 한들, 초월을 넘어선 무언가가 된 괴이라 한들 살아있는 생인 이상 살로는 존재하리란 믿음이었다.

저리 무결한 이라도 죽음과 아주 결별하진 못했으리란 믿음이었다.

목리원의 감각이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져 천마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고 나서야 얼핏 보이는 길이 있었다.

‘백회혈.’

정확한 정체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그곳에서 진동하는 마기가 천마의 존재감을 부풀리고 있었다.

목리원은 알았다.

저것은 상단전의 공력이 흘러나오는 입구였다.

당장 신공이라 불리는 무학의 대부분이 상단전을 여는 것으로 진정한 공능을 뿜음은 자명한 사실.

그를 감싸는 저 기이한 기파도 분명 상단전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상단전을 헤쳐야 한다.’

길이 보인다.

목리원의 동공이 좁아졌다.

검을 쥔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어떻게 저곳을 찌를 수 있을까.

아니, 어찌하면 천마의 간격 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까.

단 한 번도 살인을 위해 사고해본 일이 없던 목리원이다.

하나, 다행히도 천살성은 이 순간 차례를 직감한 것인지 내내 울려대던 경고음조차 꺼트리고 목리원에게 살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

세상이 한없이 늘어진다.

풍경이 회백색으로 물들며 그 와중 천마와 그의 공력만이 색채를 띤다.

그에게로 향하는 길이 붉은 연기의 형태로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목리원이 발걸음을 내디디려던 순간이었다.

“너구나.”

천마가 목리원을 똑바로 바라봤다.

흠칫, 목리원의 몸이 떨렸다.

심연보다도 어두운 눈동자에 목리원은 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제까지 붉게 빛나던 살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중이 깨졌다.

천마가 손을 들었다.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사라진 살로를 대신해 목리원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직감이 있었다.

‘죽는다.’

저 손끝이, 검지가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는 순간 목숨이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도저히, 목리원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중원의 초월자들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그들의 얼굴 위로 경악이 떠오르는 게 보인다.

주제를 모르고 나서버린 걸까.

특히 찢어질 것처럼 커진 눈을 만든 마일석의 모습에 목리원이 죄스러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하시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그립고, 절대 이곳에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어….”

바람이 불어오는 중, 어느 순간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목리원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것은 옷자락이었다.

목리원이 사랑해 마지않는 노인의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옷자락.

“스승님….”

무심코 목리원이 말을 내뱉는 순간,

“왔구나.”

천마가 웃었다.

*

노인의 정체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또한 노인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장의 시간은 멈췄다.

노인의 존재감이 그다지도 부드럽고 강렬하게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익히 아는 이들이 있었다.

중원의 초월자들은 눈동자에 떨림을 품었다.

또한 중원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나온 전대의 고수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백의를 입은 노인이 슬픈 얼굴로 주변을 바라본다.

“어찌 이런 일을 벌이셨소.”

탄식이 깃든 노인의 말에 천마가 답한다.

“여흥.”

그 말에 노인이 슬피 대꾸한다.

“잔인한 분이시로구려.”

스르릉―

노인의 허리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그와 동시에 눈부신 백광(白光)이 전장을 수놓는다.

아련하고 시린 빛에 기어코, 마일석은 눈물을 흘렸다.

“형님….”

이젠 그를 포함한 몇 명만이 기억하는 사실이 있었다.

목선오라는 검수에게 성(星)이라는 별호가 붙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내 이 강호를 떠나겠다 맹세했소. 평생을 침묵하여 살고자 했소. 그럼에도 좌시할 수 없었소. 스스로 해낸 맹세로도 꺾을 수 없는 신념이 있는 까닭이오.”

20여 년 전의 일이다.

혈사에 온 강호에 비명을 내지르던 암흑의 시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미래만이 기다리던 시대.

중원 강호가 가장 어둡게 내려앉던 순간에 빛나던 검이 있었다.

“협의(俠義)라 하오. 내 몸을 불살라 지켜야 할 나의 신념이 그러하오.”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을 베는 검이었다.

시리게 빛나며 길잡이가 되어주는 검이었다.

그렇기에 별(星)이라 불린 검이었다.

“하여, 내가 당신을 막아야겠소.”

검성(劒星)이 돌아왔다.

18년의 공백을 깨고.

중원 강호에 어둠이 드리워진 이 순간, 다시 한번 그날처럼 세상을 밝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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