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99화 (199/334)

EP.199 이십장 - 충돌, 격류 (5)

* * *

청해의 북서부, 소림과 화산이 길을 틀어막고 있는 전선 막사.

일운은 들려온 보고에 서늘한 눈빛을 만들었다.

“선룡이 마교의 첩자였단 말입니까.”

“그래, 무당이 당했다. 주 전력이 모두 사라졌으니, 무당은 꽤 오랜 시간 봉문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일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동시에 떠올리는 감정은 부끄럽게도, 마냥 분노라고 하기는 어려운 형태였다.

일운 스스로도 알았다.

선룡에게 패배했던 과거를, 그 치욕을 생사결로 갚아줄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온 전신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선 안 되는 마음이었다.

한데도 몸은 근질근질 맘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운아.”

불성(佛星) 원명이 말했다.

“그리도 기쁘더냐.”

“…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할 이유가 또 무에 있을꼬. 다만 그런 말을 하고 싶구나.”

“무엇입니까?”

“다스리거라. 투기가 차오를수록 냉정해지거라. 차갑게 식은 머리로 판단하고, 오로지 이성이 말하는 길로만 주먹을 뻗거라.”

다그침인가.

아니, 그것보단 조언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리해야만 부처의 손에 다다를 수 있음이다.”

원명이 합장했다.

그것은 다만 불공을 올리는 손 모양이 아닌, 어떤 무공의 초식이었다.

아직 일운이 도달하지 못한 신공의 첫 동작이었다.

“…유념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떠나자꾸나.”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긴.”

원명이 싱긋 웃었다.

“북동으로, 그들이 침입해올 자리로.”

일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

무림맹 청해 지부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들려온 비보가 그리 만들었고, 상석에 자리한 이의 표정이 그리 만들었다.

“무당이 당했단 말이더냐.”

창성(槍星) 사백운이 묻는다.

애써 억눌러내지만 끓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의 이마 위로 솟아난 핏대 덕에 자리한 증진들의 고개는 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선룡의 배신입니다.”

“그 아이가….”

사백운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불현듯 흘러나오는 기파엔 이루 말할 수 없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다른 전선은 어찌 되고 있느냐.”

“무당이 있던 자리로 병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또?”

“격전을 준비 중입니다.”

“또?”

“역공을 준비 중입니다.”

그제서야 사백운의 눈이 뜨였다.

“내가 이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보오.”

그가 창을 들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선 무엇도 해결되지 않을진대, 이 내가 이곳에 앉아있는 것이 전력의 손실일 텐데. 그걸 생각지 못했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겠소.”

“맹주님!”

“맹주이기 전에!”

쿵!

“나는, 무인(武人)이오.”

사백운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누구도 사백운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

신교의 천마전.

일곱 장로와 마교의 중진들을 앞둔 위광천은 고개를 숙였다.

“무당을 지웠습니다.”

목소리엔 더 이상 흐린 기색이 없었다.

또한 흘러나오는 마기는 칼날처럼 벼려져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는 오로지 하나, 지금 고개를 숙인 대상인 천마(天魔) 이선 뿐이었다.

“중원의 초월이 북동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또한, 그곳으로 병력을 몰아야 합니다.”

내뱉은 말에 이선은 물었다.

“어찌하여서.”

“그것이 패도(覇道)에 부합하는 까닭입니다.”

위광천이 고개를 들었다.

“적들이 몰린 반대편을 찌르는 방식도 물론 사용이 가능합니다. 하나, 그런 일은 패도에 부합하지 못합니다. 적들을 피해 달아나는 행위인 까닭입니다. 신교의 마인으로서, 적에게 지레 겁먹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지탄받아 마땅함인 까닭입니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이선이 삐딱하게 턱을 괸 채로 말했다.

“시행하라.”

“존명.”

위광천은 재차 고개를 숙이고 천마전을 빠져나갔다.

‘몸 상태의 회복이 끝났다.’

더 이상 약기운은 남아있지 않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잃었던 무공을 모두 되찾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직전이다.

머리는 어느 때보다 맑으며 심장의 활력 또한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돌아온 전각, 위광천은 제 앞으로 부복한 다섯의 마인을 바라봤다.

검마(劒魔) 연리건.

권마(拳魔) 패웅추.

색마(色魔) 양고혜.

빙마(氷魔) 태을벽.

그리고 사마공.

한 자리가 비었다.

하나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중원으로 간다.”

그 말에 자리한 이들이 미소짓는다.

위광천은 삐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야 말로 되찾을 것이다. 천살성을.”

“천마군림! 만마앙복!”

연리건이 외쳤다.

“소교주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위광천은 돌아섰다.

‘조금이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됐다.

그리한다면 이 빌어처먹을 자미성도 털어낼 수 있다.

살업을 행할 때마다 속에 천불을 일으켜대는 쓰레기 같은 운명을 토해낼 수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살아있어라.’

목리원이 살아있길 바랄 뿐이다.

역성(易星)을 다시금 이룰 그날까지.

*

목리원은 마침내 도착한 북동부의 광경에 헛숨을 들이켰다.

‘이곳이….’

바로 무당이 전멸한 자리다.

끔찍하다.

이미 시신들은 모두 수습해 무당산으로 돌려보냈음에도 잔류한 혈향이 있다.

곳곳에 패인 나무나 바닥 따위를 통해, 그리고 튀어있는 피의 자국을 통해 목리원은 이곳의 혈사를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천살성이 재생해주는 것이었다.

‘속수무책이다.’

난리통의 한가운데에는 초월의 무인이 있었다.

그가 수십의 중원 무인들과 무당의 도사들을 참살했다.

사용하는 것은 도(刀)일 테지.

사방을 크게 베어내는 움직임으로 일격에 무인들을 양단한다.

그것에 대항에 무당의 무인들이 무공을 발했으나, 역시 똑같이 일격에 양단된다.

목리원이 익히 아는 무당의 무학이 흐름을 제어하는데 공능이 있음에도 그랬다.

‘검기성강(劍氣成罡).’

초월에 이르러야만 달할 수 있다는 기공의 극치.

그것이라면 무당의 흐름속에서도 본래의 궤도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초월의 마인을 따르는 수하들일까.

그들이 헤집어 이곳에 살아있던 이를 모두 죽인 흔적이 보인다.

반항조차 하지 못한 이들의 흔적이 있다.

분명 양민들일 터다.

전장에 지원을 나온 양민들 말이다.

꽈악, 목리원의 주먹이 쥐어졌다.

끔찍한 살행의 흔적에 머리는 한껏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천살성이 말썽이다.

그 분노를 이내 흥분으로 바꾸려 하고 있었다.

“목 소협.”

당화서가 손을 잡아왔다.

목리원은 그제야 정신을 조금 되찾을 수 있었다.

“…아, 고맙소.”

“별말씀을.”

당화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가지요. 회의가 있을 테니.”

“그래, 갑시다.”

목리원은 당화서와 함께 임시로 마련된 회의장으로 향했다.

*

중원 대회의 이후로 다시 모인 중원의 중심들이 날 선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원을 대표하는 일곱의 초월, 그리고 오대 세가와 구파일방의 주인들.

딱 한 자리, 무당의 자리만을 제외한 모든 자리가 차 있었다.

물론 지켜야 하는 다른 전선이 있는 만큼 대리자가 참석한 문파가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제갈세가가 그랬다.

“가주의 대리로 나온 제갈산이라 합니다.”

제갈산이 말했다.

그는 지난 대회의 때와는 다르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소식은 들었소. 사고에 유감을 표하오.”

사백운의 말에 제갈산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어 사백운이 회의실을 한 차례 둘러본 이후 말했다.

“이리 모여주어 고맙소.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이해해 주시오.”

굳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역시 분노다.

백도 무림의 아버지로서 자리한 그는 무당의 비극에 누구보다도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나의 불찰이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나의 불찰.”

선룡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내 손으로 죄를 씻고자 하오.”

사백운의 말에 마일석이 입을 열었다.

“전선으로 나가려는 것이냐.”

“그렇소.”

“너는 맹주다.”

“그 이전에 무인이오.”

“네가 나가지 않아도 이곳엔 대신 전선에 설 이들이 많다.”

마일석의 말에 진건이 동조했다.

“그렇긴 하지. 뭣하면 내가 더 고생하면 되는 것 아닌감? 자네는 지휘를….”

“아니, 미안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소.”

사백운은 단번에 부정해내며 말했다.

“첩보가 들어왔소. 마인의 본대가 모두 이 북동부를 향해 올 것이오.”

공간이 쩌적 얼어붙었다.

“…확실한 정보더냐?”

“그렇소.”

“어째서?”

“마인들이지 않소. 자신감이 있는 게지. 여기 있는 우리 모두를 찢어 죽이고 중원으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

“흥.”

코웃음 친 것은 검왕 남궁혁이었다.

“우습다. 고작 마공 따위에 목메는 버러지들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백운은 말했다.

“확인된 적측의 초월은 교주까지 아홉이오. 우리보다 수가 많소.”

“그것이 두려운가?”

“설마.”

사백운은 남궁혁을 향해 미소를 띄워 올렸다.

“내가 전장에 설 이유가 충분함을 말하는 것이오.”

남궁혁과 사백운의 시선이 교차했다.

다른 이들은 사백운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초월의 무인은 하나하나가 병기에 해당하는 전력이다.

그 수적 우열이 전쟁에서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찬성하오.”

살성 염소소를 시작으로, 그렇게 모든 이들이 사백운의 참전을 찬성했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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