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7 이십장 - 충돌, 격류 (3)
* * *
장원의 별채.
마일석은 초라한 반상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화서는 그의 앞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목 소협께 들었습니다. 혈마전을 다녀오셨다지요.”
“…그래, 그놈이 너한테는 다 말했나 보구나.”
마일석이 쪼르륵 잔에 술을 채웠다.
당화서는 그 움직임, 표정, 기색에서 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알아낸 것 중 목리원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꽤 많다는 것과 그 사실이 목리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것 등을 말이다.
당화서는 긴장을 삼키며 물었다.
“제게 일러주실 수 있으십니까. 목 소협에 관한 것을.”
“내가 왜 그리해야 하느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마일석의 시선이 전신을 따끔거리게 한다.
당화서는 이를 악 물며 참아냈다.
‘당연히 보이실 수 있는 반응이다.’
목선오와 둘이서 평생 목리원을 키워온 사내다.
다르게 말하면 목리원의 부모와도 다름없는 사내다.
그런 사내가, 그것도 중원 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사내가 위험부담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제삼자에게 사실을 일러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리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은 목리원을 향한 마음이 장난이 아닌 까닭이다.
위기가 있다면 함께 헤쳐 나가고 싶다.
혹 그가 홀로 이겨내지 못할 무게라면, 그 대신 짐을 짊어질 용의도 있었다.
진심은 분명 전해진다.
당화서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아가야, 너는 원이가 그리 좋으냐?”
움찔했다.
당화서는 고개를 들고 마일석을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질문이 아님은 굳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여 답한다.
“예, 좋아합니다. 아주 많이.”
“어째서?”
“목 소협이 저를 이리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까닭입니다.”
그랬다.
얼굴이 어쩌니, 성격이 어쩌니.
평소 목리원을 좋아하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드는 당화서였으나 좀 더 깊이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떠오르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저는 도망자였습니다.”
“안다.”
“가문을 피해 달아나 평생 그들을 외면하려 한 겁쟁이였습니다.”
“그 또한, 들은 바가 있다.”
“그런 제게 목 소협이 해준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이 있어 저는 겁쟁이를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
당화서는 웃었다.
“세상 어디에도 피해자에게 죄를 묻는 법도는 없다는 말입니다.”
강서성 수양현, 그곳에서 목리원은 말했다.
“그렇기에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짓지 않음이니 도주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말했다.
협이 있으니 패배를 걱정할 이유가 없음을 말했다.
목리원은 일어서는 법을 알려주었고, 맞서 싸우는 법을 알려주었다.
생판 남인 자신에게, 그저 돕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 따뜻한 선의가 곧 당화서가 목리원을 사랑하는 이유였다.
“목 소협에게 선의를 배웠습니다. 목 소협이 없었다면 저는 선의를 모르는 바보 천치였겠지요. 그렇기에 목 소협이 좋습니다. 또한 그 선의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평생에 걸쳐서 목리원을 웃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가 온 세상에 그 협의를 펼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바보 같다고 비웃어도 당화서는 개의치 않았다.
그 이유면 족했다.
그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의 이유는 선의에 대한 보답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듣고 싶습니다.”
당화서는 말을 마치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마일석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꽤 길게 이어진 침묵.
고개 숙인 당화서는 마일석이 술을 꼴깍대는 소리를 들으며 긴장된 속을 다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식은땀까지 흐른다 싶을 즘 마일석이 드디어 답했다.
“…원이가 참 인복이 많구나.”
작게 웃음기가 밴 말이다.
당화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원이가 강호에 나서 가장 먼저 나선 것이 너라는 말을 들었다.”
마일석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원이가 강호를 사랑하는 일에 네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당화서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저것이 승낙의 말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걸왕님…!”
“하니 물으마.”
우뚝, 당화서의 몸이 굳었다.
마일석은 짐짓 엄한 표정을 만들었다.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더냐.”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예.”
“네 힘으로 감당 못할 짐이라 해도?”
“제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짐이라면 목 소협도 감당하지 못할 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나눠 드는 것이 낫겠지요.”
“두 사람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짐이라면?”
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기에 이렇게까지 겁을 주는 것일까.
당화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리하다면, 짐을 질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여전히 포기할 수 없음에 또 내뱉는 것은 다짐의 말이었다.
순간, 마일석이 기파를 흘려내 당화서의 어깨를 짓눌렀다.
‘시험이다.’
여기서 고개를 떨궈버리면 그는 정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당화서는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몸을 지탱한 팔이 부들부들 떨림에도 절대 고개 숙이지 않았다.
그 마음이 닿은 것일까.
“…독한 아이구나.”
마일석이 기파를 거뒀다.
그제야 당화서는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허억…!”
“기개는 칭찬하마. 무릇 협객이라 함은 강대한 적 앞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이들을 말하는 게지. 원이가 그러더구나. 너는 참 협객이 어울리는 아이라고.”
귀에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으나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당화서는 애써 미소를 띄워 올렸다.
마일석은 말했다.
“좋다. 따라오너라.”
마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마일석을 따라 도착한 곳은 별채에서도 가장 깊숙한 내부였다.
사방이 다 막힌 밀실.
그곳은 작은 탁상 하나와 그 위로 자리한 서책 몇 권, 두개골이 끝인 공간이었다.
“자, 이걸 받거라.”
당화서는 마일석에게 서책을 받았다.
겉면을 만져보니 엮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책이었다.
“역성대법…?”
“그 서책에 답이 있다. 원문은 서장의 언어로 쓰인 탓에 제갈 놈 도움을 받아 해석한 것이다.”
“이 서책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혈마전에서 찾은 물건이지.”
마일석은 쓰게 웃었다.
그런 중 당화서의 시선이 두개골에 꽂혔다.
저건 대체 누구의 두개골일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 두개골에 대한 답 또한 그 서책 안에 있다.”
마일석이 어찌 알았는지 눈치채고 말했다.
당화서는 흠칫 몸을 떨다 고개를 숙였다.
지금 해야할 말은 두개골에 관한 질문이 아니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의지를 보였는데 믿지 못하면 또 어떡하겠느냐.”
“꼭, 걸왕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나한테 하지 말고 원이한테 하거라.”
마일석이 뒤돌아섰다.
“나는 차마 원이에게 무엇도 말하지 못하겠더구나. 어쩌면, 내가 못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회한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당화서는 차오르는 의문을 꾹 눌러내야 했다.
“그 서책을 보고 모든 사실을 원이에게 밝힐지, 그도 아니면 숨길지는 너의 선택에 맡기마. 그래, 너라면 원이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
저벅저벅 마일석이 걸어 나갔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거라. 내 할 수 있는 선에선 최대한 도울 테니.”
“아, 예.”
“가자꾸나.”
당화서는 마일석을 따라 밀실을 빠져나갔다.
품엔 서책을 꼭 끌어안은 채였다.
그렇게 별채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걸왕님!!!”
제갈 가의 무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음? 무슨 일이냐.”
“급보입니다!”
멈춰서 헉헉 숨을 내쉰 무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북동부가 뚫렸습니다. 무당이….”
한껏 찌푸려지는 얼굴, 그리고 창백한 안색.
이어 그가 내뱉은 말에,
“…무당이, 전멸했습니다.”
당화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선룡이 배신했습니다.”
*
청해의 북동쪽, 무당파의 도사들이 틀어막고 있던 신강과의 경계.
그곳의 상황은 끔찍했다.
낭자해진 붉은 피를 달빛이 반사하며 스산한 분위기를 일게 한다.
널려있는 육편, 또한 검붉게 물든 시신들의 도사복.
모든 것이 이곳의 변고를 노골적이리만치 확실하게 일러주고 있었다.
“5장로님을 뵙습니다.”
선룡, 중원에서 그리 불렸던 사마공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가 향한 곳엔 어깨에 대도(大刀)를 짊어진 다부진 체격의 노인이 있었다.
“빠져나간 이는 있느냐.”
“추적 중에 있습니다.”
“…그래.”
5장로가 시선을 거뒀다.
사마공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중원 땅을 벗어나는구나.
현공이 아닌 사마공으로 되돌아가는구나.
그리웠던 십만대산으로 돌아가는구나.
떨림이 멎질 않았다.
흥분에 차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마공은 고개를 들고 시신이 되어 널브러진 도사들을 바라봤다.
‘약해빠졌다.’
5장로와 10인의 수족이 이곳에 온 병력의 끝이다.
그럼에도 무당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초월 하나 배출해내지 못한 버러지 같은 약자들의 말로였다.
“…공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마공은 고개를 돌렸다.
“장문인.”
그곳엔 팔 한 짝이 날아간, 그리고 배에 구멍이 뚫린 무당의 장문인이 헉헉 숨을 내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에, 결국 사마공은 폭소를 터뜨려버렸다.
당화서는 이를 악 물며 참아냈다.
마일석의 시선이 전신을 따끔거리게 한다.
‘당연히 보이실 수 있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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