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5 이십장 - 충돌, 격류 (1)
* * *
목리원은 아직 제갈세가의 장원에 있었다.
가주인 제갈벽의 돌이킬 수 없는 부상 탓이다.
제갈세가의 장원은 곧 전방과 중원을 이어주는 보급의 허리, 이곳이 뚫린다면 전방의 상황이 악화될 것이기에 마일석과 함께 제갈벽의 빈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오늘 역시 그런 날이었다.
전방을 빠져나와 들어온 마인들이 세가를 노리고 들어온다.
그들을 무찌르고 오가는 보급 행렬을 호위한다.
“목 아우.”
이젠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제갈산이 어깨동무를 해왔다.
“수고했네. 어서 돌아가도록 하지.”
“아, 제갈 형도 수고했소!”
목리원은 환히 웃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이제 한동안 보급은 더 없는 것이 맞소?”
“그렇네, 전방으로 향한 보급 행렬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큰 일정이 없을 걸세.”
“다행이오.”
“음?”
“그간 실전을 겪으며 얻은 깨달음이 있는데 좀처럼 수습할 기회가 없어 아쉽던 참이었소. 한동안은 수련에 목을 매야겠소!”
제갈산의 얼굴 위로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목리원은 이제 그가 할 말을 알았다.
“그리 보지 말아주시오. 재능을 떠나 수련에 진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무인의 소양이라 생각하오.”
“배부른 소리인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과분한 평가를 받아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진심이었다.
차기 고금제일 후보, 스스로가 그렇게 불리고 있음을 목리원은 모르지 않았다.
또한 이제 강호의 경험이 쌓인 만큼, 목리원은 자신이 얼마나 재능이 넘치는 무인인지도 알았다.
하나 그런 허명에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최전방의 소식을 들었소. 검룡 형이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지.”
“몸이 달아오르나?”
“부정하진 않겠소. 하지만 내 역할을 허투루 할 생각은 없소. 뒤처지긴 싫으니 말이오.”
언젠가 목선오는 말했다.
함께 성장하는 경쟁자는 무인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관계라고.
목리원도 이제는 인정할 수 있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기껏 추월한 남궁진천이 언제 뒤따라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목리원의 속에 향상심을 가득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한 번씩 휴식도 취하시게. 자네는 너무 심심하게 살아서 탈이야.”
제갈산은 그리 말하며 턱짓으로 거리 한 구석을 가리켰다.
“어때, 오늘은 기루라도….”
그곳엔 작지 않은 크기의 기루가 있었다.
입구에 나와 있던 기녀들과 눈을 마주친 목리원은 뺨을 붉게 만들며 고개를 팍 숙였다.
“나, 나는 괜찮소. 여색에는 취미가 없소!”
“없기는… 목 아우, 이 사람아. 자고로 사내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무엇인가! 호색함조차 호방함으로 덮을 용심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일세! 그리 여인에게 약해 어디 중요한 순간에 사내 구실이라도 제대로 하겠나?!”
제갈산이 호통치자 목리원은 움찔 몸을 떨었다.
슬금슬금 제갈산을 향해 돌아간 눈엔 호기심이 슬쩍 떠올라 있었다.
“주, 중요한 순간이라 함은….”
“무엇이겠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거 말일세!”
제갈산이 음흉한 얼굴을 만들었다.
목리원은 몸이 바짝 굳는 중에도 제갈산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
“생각해보시게, 사내란 여인을 이끌어주는 면모가 있어야 한다고 보네. 한데! 사랑하는 사람과! 마침내 첫날밤을 보냈는데! 그때 어쩔 줄 몰라 하면 반려자가 어찌 생각하겠는가! 아, 내가 혼인을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할 것 아닌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참으로 부끄럽지만 목리원은 이 말에 당화서를 떠올렸다.
부정해 무엇하랴, 목리원은 당화서가 참 좋았다.
지금이야 시기가 안 좋고 몸 또한 멀어져 있지만 그것이 품은 마음의 움츠러듬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깊어지는 것은 그리움과 애틋함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으니 그 시간만큼 당화서와의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나중 재회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것 또한 연장선이었다.
‘소저는 언제나 나를 이끌어주기만 했지.’
혹여 돌봐야할 동생으로 비치지 않을까.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이진 않을까.
무인이 아닌 사내로서 발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목리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갈산의 목소리엔 힘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목 아우, 오늘은 사내가 되어보는 것일세. 응? 내 듣기로는 말일세, 저 기루의 루주가 지난 혈사 때 남편을 잃고 홀로 기루를 운영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는데 어찌 협객된 이로써 그런 여인을 지나칠 수가….”
눈이 핑글핑글 도는 설득이 한참 이어지던 중이었다.
“그래, 유언은 그걸로 끝이더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제갈산, 유언은 그게 끝이냐 물었다.”
목리원의 몸이 바짝 굳었다.
제갈산 또한 마찬가지인 게 느껴졌다.
‘이 목소리는….’
당화서다.
당화서의 목소리였고, 풍겨오는 기운이나 은은한 단내 또한 당화서의 것이었다. 기감을 날카롭게 하니 그게 더 확실히 느껴진다.
깨닫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얼굴은 홧홧하게 달아올랐고, 입가엔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고개가 홱 돌아간다.
그곳엔 언제나처럼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얼굴로 제갈산을 노려보는 당화서가 있었다.
“소저!”
목리원이 한껏 기뻐하며 말하자 당화서가 그제야 목리원을 바라봤다.
“예, 목 소협. 저희 참 오랜만이지요?”
“그렇소! 그간 어떻게 지내셨소? 다친데는 없으시오?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
어찌 전보다 더 어여뻐지신 것 같소.
차마 눈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목리원은 뒷말을 삼키며 입꼬리를 진정시켰다.
당화서는 후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참 잘 지냈습니다. 목 소협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조금 더 회포를 풀고 싶긴 한데, 일단 제갈산 먼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움찔, 제갈산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목리원이 보기에, 그 움직임은 어딘가 사후경직을 닮았다.
제갈산은 이미 죽어있었다.
목리원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시오!”
환히 웃으며 말하자 당화서가 흡족한 얼굴을 만들었다.
제갈산이 배신감에 떨며 말했다.
“아, 아우! 그게 무슨….”
턱!
당화서가 제갈산의 머리채를 잡았다.
“억, 누, 누님! 그게 아니라….”
“그래, 뭐가 아닌지는 가서 얘기하자꾸나.”
당화서가 제갈산을 질질 끌고 장원으로 향했다.
목리원은 그 보무당당한 뒷모습에 뺨을 붉혔다.
‘여장부시구나!’
저런 당당한 모습이 또 매력이 되는 여인이다.
목리원은 문득 생각했다.
‘나, 나도…!’
지지않고 당화서가 기댈 수 있는 만큼 멋진 사내가 되고 싶었다.
“대협, 잠시 놀다 가세요~.”
기루 앞의 기녀가 손짓했다.
목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절의 뜻이었다.
‘저, 저런 것 말고…!’
다른 의미로 남자답게.
*
제갈산은 생각했다.
‘어째서.’
어째서 당화서에겐 이길 도리가 없는가.
이제 초절정에 올라 확실한 경지의 구분이 생겼는데도 당화서의 독에만큼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것인가.
이상했다.
이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우으으….”
바닥에 엎어진 제갈산은 꾸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움찔움찔 떨었다.
그러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던 당화서가 말했다.
“뭐? 사내다움? 기루?”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목리원을 이용한 게 맞긴 한 까닭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기루의 루주나 되는 이를 만나 좋은 분위기에서 술잔을 나누려면 목리원 정도 무명과 얼굴은 있어야 한단 말이다.
“제갈세가의 대공자가 왔소!”라며 루주를 불러냈다간 강압적인 분위기가 생긴 단 말이다.
물론, 이런 억울함을 말해봐야 소용은 없을 터였다.
이 음습하고 폭력적인 누님은 자신에게만큼은 가차가 없었으니.
“그, 그냥… 목 아우가 너무 수련만 하기에….”
“아! 덜 맞았구나! 네가 아직 정신을 덜 차린 게야!”
당화서가 크게 탄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산은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삐걱삐걱 미소를 지었다.
“누님, 한 마디만 해도 되겠소?”
“해보거라.”
“설사독 말고 다른 걸로 해주시오.”
이미 충분하잖소.
라고 말했으나 당화서에겐 닿지 않는 아우성인 듯했다.
만면 가득 떠오른 미소를 보면 확실하다.
“잘 들었다.”
듣기만 했다.
이후, 제갈산은 엉망진창으로 설사했다.
*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왜 남궁진천의 입에서 목리원과 여인에 관한 말이 나왔나 했더니 제갈산이 그간 목리원을 부추긴 게 분명했다.
목리원을 꼴을 보니 사고는 없었던 듯하나, 제갈산이 괘씸함은 매한가지였다.
하여 벌을 준 직후였다.
“이번엔 짧게 끝나는 놈으로 했다. 고맙게 알거라.”
“…누님 은혜에 어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구먼.”
제갈산이 히죽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참 속없는 모습이다.
당화서의 미소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오며 소식은 들었다. 가주께 변이 있었다지.”
“….”
제갈산의 미소가 점점 옅어졌다.
당화서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는 게 있는 까닭이다.
제갈산이 세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간 그가 보여온 태도로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동병상련의 입장이기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낳아주고 길러준 가문이 원망스러워 가출을 결심한 것은 그나 자신이나 매한가지였으니 말이다.
당화서는 짧게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괜찮느냐.”
“안 괜찮을 것은 무에 있소.”
“마음이 불편하진 않더냐.”
“털어버리려 하오. 사내이지 않소.”
제갈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화서는 그 미소에 깃든 일말의 후련함을 볼 수 있었다.
느끼는 게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선택을 했구나.’
일찍이 이곳에 오자마자 제갈벽을 만났었다.
그는 스스로 걸을 수 없는 몸에 무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어딘가 밝은 기색이었다.
그 이유를 이런 제갈산의 모습과 함께 생각하니 답이 나온 것이다.
“용서는 쉽더냐.”
당화서는 물었다.
후회가 없음에도 ‘혹여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의문만은 속에 남아있던 탓이다.
“아직 용서되진 않소.”
제갈산의 답에 당화서는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하더냐.”
“그래도 차차 해보려 하오. 그런 걸 할 줄 아는 사내가 되고 싶소.”
‘소저는 언제나 나를 이끌어주기만 했지.’
제갈산의 목소리에 머쓱함이 떠올랐다.
당화서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목 아우가 항상 말하지 않았소. 협객은 구태여 가장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그래, 목리원은 분명 그리 말했다.
그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자 당화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협객이 될 생각이더냐?”
“멋있지 않소? 또 어디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정상 나한테 딱 어울릴 것 같더구려.”
“그놈의 미망인만 건들지 않으면 될 수 있겠지.”
“그 또한 협이오.”
“어련하구나.”
당화서는 쿡쿡 웃었다.
그러다 제갈산을 바라봤다.
‘초절정이라.’
그새 그만큼이나 앞질러 갔다.
아니, 애초에 자신보다 앞서 걸었던 걸지도 몰랐다.
제갈산은 스스로의 무력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니 말이다.
시기가 되는가, 울분이 차오르는가.
당화서는 자문하고, 이내 답했다.
“성취를 축하한다.”
축하가 맞다.
울분이 있지만 그것이 제갈산을 향한 것은 아니다.
“고맙소.”
슬슬 단원들에게 뒤처지기 시작하는 스스로에 대한 울분이다.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마. 쉬거라.”
더 노력해야겠지.
물론 독공을 익힌 만큼 이들과는 다른 형태의 노력이겠지만 말이다.
“목 아우에게 가는 것이오?”
“그래, 왔는데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아니냐.”
“아참, 보급 행렬을 이끌고 왔다 하셨지.”
제갈산이 입술을 우물거리다 이내 말했다.
“그… 오늘은 술 먹이면 안되는….”
“산아, 말이 많구나.”
제갈산의 입이 꾹 다물렸다.
당화서는 그제야 흡족한 얼굴을 만들었다.
‘어딜 훈수를.’
다 된 밥에 재나 뿌리지 말 것이지.
제갈산의 얼굴 위로 죄악감이 떠올랐다.
당화서는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당화서는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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