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2 십구장 - 청해, 부자 (12)
* * *
“다리를 쓰지 못하신다지 않았느냐?”
“…감내하셔야 할 일이지요.”
반신불구가 되어버린 가주라, 제갈산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체 당신을 어찌 바라봐야 할까.
내내 떠올리던 고민은 어느새 흐릿한 형상으로 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안채의 문 앞이다.
“수고했다.”
“예.”
시비가 뒷걸음질로 멀어져갔다.
제갈산은 꾹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
언제나, 이렇게 문앞에서 망설일 때면 제갈벽은 말했다.
-들어오거라.
라고, 무심하게 말이다.
한데 이제 그런 말이 없다.
무인으로서 죽었다는 말이 확 와닿는다.
이제 제갈벽은 기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양민일 것이다.
‘어머니, 제가 먼저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평생 그럴 일이 없으리라 장담했건만 결국 이리 되었습니다.
전해지지 않을 말을 속으로 되뇐다.
그리하다 또 헛웃음을 흘려버린다.
제갈산은 말했다.
“가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말한 이후, 언제나처럼 딱 셋을 센 이후에야 제갈벽은 답했다.
-들어오거라.
목소리가 쇠약해져 있었다.
제갈산은 이를 악 물고 문을 열었다.
“왔느냐.”
눈에 보이는 것은 침상에 앉아 있는 제갈벽이다.
머리는 회색으로 바래졌고, 피부는 쩌적쩌적 말라 있다.
언제나 벽으로만 존재했던 원수의 몰락임에도 보고 싶지 않은 꼴이다.
“앉거라.”
“…참 별 볼 일 없어지셨습니다.”
제갈산은 선 채로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제갈산은 고요한 제갈벽의 기색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러자 제갈벽이 말했다.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당연한 것이라.”
“아들을 지키는 것은 아비의 몫이 아니더냐.”
움찔, 제갈산의 손끝이 떨렸다.
“…이제와서 말입니까?”
“지금에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입니까?”
“같은 후회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으니.”
제갈벽은 여전한 무표정이었다.
어조 또한 언제나와 같이 평탄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그 기색이 제갈산의 속을 어지럽혔다.
“…무슨 심경의 변화이십니까.”
기분이 나쁘냐? 아니, 반대다.
제갈벽이 이제야 진심을 말해준다는 것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친다.
한데도 일말의 불안감이 있어 물었다.
저것이 자신을 가주로 만들기 위해 지어낸 모습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떠올라버리는 것이다.
제갈벽은 그 기색을 이해한 듯하다.
“솔직하지 못한 것은 죄가 되더구나. 자식에게도, 아내에게도.”
말하며, 제갈벽의 입꼬리가 끌려올라가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모습이 참 어색하다.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씁쓸함이 참 안타깝다.
제갈산은 주먹을 꽉 쥐었다.
토해내려 한 말이 많았다.
다 당신 탓이라고, 당신이 이 모든 일을 이리도 망쳐버렸다고.
당신이 나와, 내 어머니를 그리도 괴롭게 한 것이라고.
병신이 되어 참 꼴보기 좋다고.
한데 그 무엇도 나오지 않는다.
겨우내 제갈벽이 지어낸 미소 탓일 터다.
이를 어찌해야 하겠는가.
고민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지난 밤 목리원의 말이다.
-내가 보기에, 용봉단에서 가장 협객에 가까운 사람은 제갈 형인 까닭이오.
협객이 무엇인가.
협객이라면 이 자리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제갈산은 눈을 감았다.
제갈벽은 말했다.
“용서를 구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속죄하마.”
“그게 무엇입니까?”
“너에게 나쁜 일은 아닐 터다.”
제갈산은 제갈벽의 말을 곱씹었다.
부동심이 흩어진다.
그에, 흘리듯 말을 내뱉었다.
“저를 고독하게 낳으셨습니다.”
“내 죄가 깊어 네가 그리 태어났구나.”
“저를 참 고독하게도 키우셨습니다.”
“내 모자람이 너를 그리 키웠구나.”
“저를 외톨이로 남기시려 합니다.”
“나의 부덕이 너를 그리 만들겠구나.”
순순히 모든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에, 제갈산은 드디어 눈을 떴다.
모두가 족제비 같다고 말하는 그의 인상이 지금만큼은 축 처진 꼴이었다.
“예, 가주가 그리 만드셨습니다. 한데… 그리한들 어찌할까 싶습니다.”
이미 이리되어버린 것을, 어찌할까 싶습니다.
“내려진 운명이 이러하여 저는 고독할 듯합니다.”
“….”
“평생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바람이 되겠지요.”
이르길.
“저는 객(客)의 인생을 살 터입니다.”
평생을 손님으로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 말하자 제갈벽의 표정이 썩 서글퍼진다.
제갈산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다물며 말을 곱씹었다.
참으로 어려운 말을 내뱉으려니 속이 답답해지는 까닭이다.
하나 할 말은 해야 할 것이기에, 제갈산은 더 망설임을 이어가지 않았다.
“객으로 살 것이라면 말입니다.”
이왕지사 그런 삶이라면.
“객(客) 중에서도 협객(俠客)이 되려 합니다.”
말하자 제갈벽의 눈이 크게 뜨이기 시작했다.
“…산아.”
“어머니가 제게 그리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훌륭한 협객이 될 수 있으리라고.”
강호협객전을 사랑하는 아이에게 그저 응원의 뜻으로 건넨 말일지도 모른다.
드넓은 중원을 내달리려는 아이의 등을 떠밀어주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나, 제갈산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저와 같은 슬픔을 이고 살아갈 아이가 없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더 나아갈 수 있을 듯하여, 그러고 싶었다.
“하니 가주.”
“….”
“내 협객이 되기 위하여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갈산은 제갈벽을 바로 바라봤다.
제갈벽 또한, 어느새 진중한 얼굴이 되어 제갈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겁게 침묵이 내려앉는다.
제갈산은 방 안에 가득한 약내음이 코를 찌를 즘에야 침묵을 걷어냈다.
“아우가 그러더구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협객은 구태여 가장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제갈벽의 얼굴 위로 놀란 기색이 떠오른다.
참, 제갈벽의 이리도 풍부한 표정을 보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 제갈산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합니다.”
제갈산은 제갈벽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아직 놀라 굳어있는 제갈벽에게 말했다.
“당신을 용서하려 합니다. 아버지.”
쇠약해진 손을 맞잡았다.
뼛대가 불거질 정도로 마른 손이 가슴을 시큰거리게 했다.
“…내가.”
제갈벽이 더듬더듬 말한다.
“내가, 진정 용서받아도 될 인간이겠더냐?”
그저 건네는 말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가뭄이라도 난 것처럼 갈라진 제갈벽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이 회한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이다.
“내가 너에게 용서를 구해도 될 사람이더냐? 나는, 그리할 수 없는 사람이다.”
솔직하지 못하여, 겁이 많아 죄를 저지른 사내다.
그 일로 자신을 아프게만 했고, 또 고독하게만 만든 사내다.
한데도 그가 품었던 것은 사랑이 분명하니, 제갈산은 그 일을 덮어두고자 했다.
“당장은 힘들겠지요. 제가 당신을 용서하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해묵은 원한을 어찌 말 한마디에 잊겠는가.
인간이 그리도 단순한 생이던가.
한데도 이리 말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러니 그때까지 살아주십시오. 제가 완전히 당신을 용서하는 날이 온다면, 그날 다시 제게 사죄해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바랍니다.”
증오가 아닌 용서를, 인상이 아닌 미소를 띠게 되는 날 그를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만 쉬십시오.”
제갈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후 뒤돌아 떠나갔다.
떠나는 제갈산의 등 뒤로, 쇠약해진 사내의 흐느낌이 잘게 흩어지고 있었다.
*
“제갈 형.”
안채를 나오자 목리원이 반기고 있었다.
제갈산은 아직도 영 싱숭생숭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 아우.”
“다녀왔소?”
“다녀왔다네.”
잘한 것일까.
제대로된 선택을 한 것일까.
제갈산은 도통 그것을 알 수가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리원에게 물었다.
“목 아우.”
“말하시오.”
“나는, 협객이 될 수 있겠나?”
너무나도 어려운 용서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겠나?
묻자, 목리원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말하지 않았소!”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답을, 제갈산에게 건네줬다.
“제갈 형은 이미 내가 아는 후기지수 중 으뜸가는 협객이오!”
제갈산은 그제야 허심탄회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일평생 그를 옭아매던 족쇄를 드디어 풀어 헤칠 수 있었다.
“다행인 일이군!”
제갈산은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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