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1 십구장 - 청해, 부자 (11)
* * *
푹―!
제갈벽이 손을 갈퀴모양으로 만들어 천기려의 명치를 꿰뚫었다.
천기려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제갈벽은 그 순간 눈앞이 흐려지는 기분을 느꼈다.
‘더….’
더 몰아붙여야 한다.
움찔할 힘이라도 남겨뒀다간 제갈산을 해코지할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지.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다면 울타리라도 되어줘야 하는 것이 아비의 도리가 아니던가.
다시 한번 주먹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이놈아아아―!”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마일석이었다.
쾅! 쾅! 쾅!
마일석이 마인들을 무찌르며 달려왔다.
“…쓸모없는 늙다리가 또 실패했나 보구나.”
천기려가 쯧 혀를 찼다.
그제서야 제갈벽은 이상함을 느꼈다.
‘한데….’
어째서 천기려는 발악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선천진기를 발휘해 동귀어진을 노려도 모자랄 상황에 어찌 이리 당하고만 있단 말인가.
전력의 모자람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상황의 급박함도 이유가 되지 않았다.
무려 초월의 마인이 아닌가.
천마신교의 최정예 전력인 장로가 아닌가.
고작 이정도 불리함에 물러설 리가 없단 말이다.
“이 정도만 해야겠구먼.”
한데 어째서.
제갈벽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천기려가 씨익 웃었다.
“자네들은 사술이라 부른다지?”
천기려가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올렸다.
곧게 솟은 검지로 스스로의 심장을 찔렀다.
푹!
하는 께름칙한 소리가 인 직후, 천기려의 눈동자 속에서 생기가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이 아님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갈벽은 낭패 어린 심경을 느꼈다.
‘본체가 아니었구나.’
의체, 또는 다른 이의 몸뚱어리를 빌린 것에 불과한 듯하다.
이제까지 그것을 몰랐던 이유는 내내 걸려있던 진법이었겠지.
악랄하고 교묘한 수법.
“일단 하나, 처리했구나.”
그 말을 끝으로 천기려의 육신이 쓰러졌다.
제갈벽은 탄식을 흘렸다.
“크흡…!”
육신이 비명을 지른다.
흘려내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이 희끗해지고 있었다.
사고가 점차 멀어지는 와중, 제갈벽은 제갈산을 바라봤다.
“가주!”
아, 이리도 슬픈 얼굴을 하는 아이였구나.
끝끝내 제갈산에겐 미안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끝으로, 제갈벽은 의식을 잃었다.
*
사고다.
진을 치고 있던 마인들은 다 처리했으나 큰 전공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으니 사고가 맞았다.
마일석을 붙들어두던 4장로는 끝끝내 시간만 끌고선 도주했다.
또한 6 장로는 사술을 통해 본체가 아닌 의체를 희생시켰다.
고작 몇 백 남짓한 마인을 쓰러트린 것으로 좋아하기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가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제갈세가의 장원, 제갈산은 안채 앞에 서서 의원에게 물었다.
의원은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말했다.
“목숨은 온전하셨소.”
“목숨은?”
“그게….”
의원이 머뭇거림을 품기 시작했다.
답답함이 치밀어 제갈산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의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마 다시는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없을 것이오. 또한 무인으로서 활동하시지도 못할 것이오.”
쿵, 하고 제갈산은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나 마냥 놀랍지만은 않았다.
예견된 결과였던 까닭이다.
‘…결국 그리되었구나.’
자그마치 단전이 꿰뚫린 상처였다.
그것 외에도 제갈산이 직접 뚫은 허리가 있었다.
목숨을 온전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최후의 순간 자신의 실수 탓에 제갈벽은 선천진기까지 써야 했다. 아마 그는 오랜 시간을 살지 못할 터였다.
“…뵈러 가시겠소?”
“눈을 뜨셨소?”
“아직이오.”
“그렇다면 나중에 오지.”
제갈산은 가라앉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리를 떴다.
깨어나지 않아서 안 보겠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제갈산은 당장 제갈벽을 어찌 대해야 할지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괜히 얼굴을 맞대봐야 감정만 더 들끓을 테니 자리를 피하는 게 옳다는 판단이었다.
하여 안채를 나온 순간이었다.
“제갈 형.”
“…아, 목 아우.”
기다리고 있던 목리원이 걱정이 가득 서린 얼굴로 다가왔다.
“진왕께선….”
제갈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목숨은 붙어 계시네. 하나 무인으로선 더 활동할 수 없으시다는군.”
“아….”
깊은 탄식이다.
목리원의 진심에 제갈산은 작은 위로를 얻었다.
타인의 일에 이리도 진심어린 안타까움을 표할 수 있는 사람은 목리원 외에 없을 것이다.
문득, 제갈산은 그런 목리원을 보자 말을 흘려버렸다.
“술이라도 한잔 하겠나?”
“음?”
“그냥 그런 기분이라.”
목리원은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며 고민하다, 이윽고 답을 내뱉었다.
“좋소.”
목리원 답지않게 씁쓸한 미소와 함께.
*
제갈산은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싸구려 화주를 꺼내 정자 위에 얹었다.
“이런 술밖에 없더군.”
“이 또한 좋은 술이오.”
“어찌 그리 생각하나?”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술이지 않소.”
목리원이 희게 미소 지었다.
제갈산은 그 미소에 또 말이 목끝까지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속이 이다지도 답답하니 무어라도 상대방에게 털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일단 한 잔 하지.”
제갈산은 잔을 채워 목리원에게 건넸다.
목리원이 잔을 받자 제 몫의 잔도 채웠다.
동시에 잔을 들어 마셨다.
내공으로 취기를 몰아내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취하고 싶어 마시는 술이니 그저 술기운에 몸을 맡길 심산이었다.
고맙게도 목리원은 아무 말 없이 함께 술잔을 기울여줬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다시 세 잔이 되어 어느새 병 하나가 바닥을 보일 정도가 되었을 즘에야 제갈산은 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으음….”
피식피식 괜한 웃음이 나옴에 제갈산은 목리원을 바라봤다.
목리원은 아직 멀쩡해 보였다.
“목 아우, 오늘은 잘 안 취하는구먼.”
“제갈 형이 내 몫까지 취해주셨지 않소.”
“그럼 평소엔 누님 몫까지 목 아우가 취했던 겐가? 그래서 맨날 인사불성이 되어서 돌아온 게로군.”
“그건 아닌 듯하오. 소저가 술이 좀 강하오? 나는 도저히 못 이기겠더구려.”
제갈산은 킥킥 웃었다.
“그러다 당하는 것일세.”
“무엇을 말이오?”
“아니, 말이 헛나왔군.”
직후 침묵이 일었다.
그 속에서 제갈산은 잔을 검지로 쓸었다.
내내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말을 떠올렸다.
목리원에게조차 상담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버지와의 관계, 이놈의 별, 그리고 지금 느끼는 감정들.
본래 제갈산의 성격이라면 절대 이것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기대게 되는 동물인 것인지, 오늘의 제갈산은 취기를 빌려 넌지시 운을 뗐다.
“내가 왜 가주를 싫어하는지 말했었나?”
“말하지 않았소.”
“말해주겠다곤 했었나?”
“그런 약속은 들었소.”
“너무 무심한 분이었기 때문이라네.”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보이더구려.”
“원망스러울 정도로 무심한 분이었기 때문이라네.”
“그리 보이오.”
“하여 일평생을 원망했네.”
주저리였다.
제갈산은 어머니와의 일,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왜 집을 나섰고 어떤 목표를 위해 살아왔는지를 모두 목리원에게 말했다.
목리원은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함께 슬퍼해주며 그 모든 말을 들어줬다.
귀를 기울여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제갈산은 다행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하여 꼭 내 손으로 명을 끊어버리겠다 다짐했는데, 아무래도 잘되지 않더군.”
제갈산의 시선이 밤 하늘을 향했다.
저 하늘은 뭐가 그리 평안한지 구름한 점 없이 맑게 개어있기만 했다.
“이젠 잘 모르겠네. 애정인지, 원망인지, 증오인지. 마지막 순간 날 위해 몸을 던진 것이 가주의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네.”
“나는 말이오.”
목리원이 말했다.
“제갈 형이 참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하오. 솔직히 소저보다 현명해 보일 때도 있소.”
“누님이 들으면 경을 치겠어.”
“비밀로 해주시오.”
목리원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윽고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나는 믿소. 제갈 형은 고민 끝에 훌륭한 답을 내실 것이오.”
제갈산은 목리원을 마주봤다.
그는 지금 내뱉은 말이 진심이라는 듯, 아주 진중한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보기에, 용봉단에서 가장 협객에 가까운 사람은 제갈 형인 까닭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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