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7 십구장 - 청해, 부자 (7)
* * *
과욕이다.
결말이 예견되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놓지 못한 것은 과욕이었고 혈사에서의 전공을 내세워 그녀를 처로 들이려 한 것도 과욕이었다.
“꼭 그리해야만 하는 것이더냐.”
“예.”
“벽아.”
“전공에 대한 보상으로 그 무엇도 아닌 그것을 바랍니다.”
선대 가주에게 제갈벽은 고서연과의 혼인을 말했다.
한창 혈사가 이어진 지 2년, 그의 나이 스물둘에 경지는 초절정에 이르러 있었던 만큼 지금이 아니라면 고서연과 함께 할 수 없으리란 직감이 제갈벽으로 하여금 무리수를 두게한 것이다.
그것은 불행히도 통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선대가주는 제갈벽의 혼인을 허했다.
장로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강하지는 못했다.
진룡 제갈벽. 고작 스물둘의 나이에 진법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천재성과 그가 전장에서 세운 전공이 혼인 상대의 배경에 대한 반발을 불식시킨 것이다.
제갈벽은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객잔을 찾았다.
“손님?”
“혼인해다오.”
조급함, 분명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멋들어진 청혼을 하지 못한 것은 그 이유였을 것이고, 또한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고서연은 그날 한참이나 답을 주지 않고 제갈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나처럼 제갈벽의 속에 있던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러고 나서야 말했다.
“손님은 참 청혼도 멋없이 하십니다.”
제갈벽은 그녀의 미소에 또 한 번 심장이 옥죄는 느낌을 받았다.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갈가의 대공자님께서 저따위와 혼인하셔도.”
고서연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참으로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잘 읽는 여인이었으니, 제갈벽이 그 순간 보여야 할 반응은 기쁨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렴, 이제까지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떨쳐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네가 아니면 안 된다.”
그날 처음으로 제갈벽은 미소라는 것을 지었었다.
고서연이 깜짝 놀랐고, 이내 뺨을 붉혔다.
“그리 표정을 지으시니 참으로 어여쁘십니다.”
“…나는 어여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분명 어여쁘십니다. 제게는 세상 누구보다도.”
혼인은 조용히 치러졌다.
혈사가 이어지는 중 성대한 축제를 할 수 없기에 면식이 있는 이들만을 불러 식을 끝냈다.
그날의 제갈벽은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유일하게 자신을 바로 봐주는 사랑을 얻었고 그녀와 함께할 보금자리를 얻은 까닭이다. 그리고 다음 해, 아들 또한 얻었다.
“산, 아이의 이름은 산으로 하자.”
“네.”
전쟁통에도 사랑은 꽃핀다하던가.
참으로 기껍기만 한 일이 가득함에 제갈벽에겐 전쟁을 종식시켜야 할 이유가 늘었다.
단 하나 비보를 제외하면 말이다.
“별을 타고났소.”
검성 목선오가 말했다.
“진룡, 당신의 아들이 별을 타고났소. 참으로 고독한 별을.”
제갈벽은 그가 은밀히 건넨 말에 다른 반박을 떠올릴 수 없었다.
목선오는 그의 독보적인 무력 외에도 여러 신기를 보이는 사내였던 까닭이다.
이르기를 절연성이라, 제갈벽은 짙은 슬픔을 느꼈다.
그 사실을 고서연에게 어찌 전해야 할지 막막함을 떠올렸다.
차라리 숨기면 어떨까, 마음먹었지만 그조차 불가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게지요?”
“….”
“가가의 얼굴을 보면 압니다. 그리고 제 배로 나은 아이라 압니다.”
죄스러웠다. 아이가 잘못된 것이 그저 못난 애비 탓인 것만 같아서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고개를 숙이고자 했다.
하나 고서연은 제갈벽을 꼭 안아주며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괜찮을 겝니다. 가가의 아이가 아닙니까.”
그녀 앞에선 어찌나 볼품없는 사람이 되던지.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다 큰 사내가 우는 모습만큼 흉한 게 없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제갈벽은 그녀의 품속에서 생애 처음 눈물을 흘렸다.
*
혈사가 끝났다.
제갈벽은 강호에서 가장 드높은 이름을 가진 영웅 중 하나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과정에서 목선오가 무림을 떠나는 일이 있었으나, 제갈벽에게 큰 감상을 주진 않았다.
드디어 고서연과 함께 꿈에 그리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다른 생각이 들 틈이 없는 것이다.
“돌아왔소.”
“잘 돌아오셨습니다.”
고서연의 품에 안겨있던 어린 제갈산이 제갈벽의 망막을 가득 메웠다.
차오르는 것은 부성(父性)이었다.
제갈벽은 그날,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
여전히 제갈벽은 고서연이 상대가 아니라면 상대의 감정에 제대로 된 반응을 못 하는 사내였다.
그것은 아들인 제갈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으나 감정은, 특히 어린아이의 감정은 제갈벽에게 너무 어려운 것이라 언제나 제갈산을 향하는 어투는 차갑기만 했다.
“식탁에서 예절을 지키거라.”
따위의 말만 하게 되는 것이다.
“차차 나아질 겝니다.”
고서연은 그리 위로했다.
“당장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비로서 할 수 있는 것.
제갈벽은 그에 관한 고민을 꽤 오래 이어갔다.
그리고서야 겨우 답을 찾길, 아들에게 물려줄 세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날부로 제갈벽은 일에 매진했다.
가문 장로들의 의견을 적절히 수용하고 세가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 힘썼다.
오로지 제갈산에게 물려줄 세가가 지금보다 낫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제갈산의 나이가 일곱이 되던 해가 됐다.
“가주, 금화장의 여식을 기억하는지요?”
“…과거 약혼 상대 말인가.”
“그쪽에서 다시 한번 혼인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꿈은 꿈이라는 듯, 달콤한 순간은 서서히 종막을 맞기 시작했다.
*
일찍이 천하상단이 세를 키우기 전의 중원엔 참 많은 상단들이 세력을 불리기 위해 아귀다툼을 했었다.
금화장은 그런 상단들 중에서도 호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단이었다.
당연, 제갈세가의 혼인 상대로는 이보다 나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제갈벽의 약혼자는 금화장의 여식으로 낙점되어 있었다.
지금에와서 그들이 다시 한번 혼인을 추진하는 이유를 제갈벽은 알았다.
천하상단이 세를 불린다. 그들의 영향력이 너무 빠른 속도로 중원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금화장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금화장엔 방패가 필요한 것이다. 명예와 힘을 모두 가진 든든한 방패가.
“거절하라.”
“곤란한 상황입니다.”
“어째서인가.”
“금화장에서 장부를 들이밀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짐승만큼 위험한 것이 또 없을 것이다.
금화장은 천하상단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극강의 수를 뒀다.
그것은 바로 제갈세가와 금화장 사이에 이제껏 이어져 온 비밀장부였다.
정도를 지향한다 한들 결국은 이익단체다.
세가에 어두운 면이 없을 수는 없었다.
장부가 세상에 드러나면 세가는 풍비박산이 나리라.
몰락까진 아니어도 이제껏 쌓아온 것중 아주 많은 것을 잃게 될 터다.
제갈산이 물려받을 세가가 무너진다.
그 사실이 제갈벽을 아프게만 만드는 와중이었다.
“혼인하십시오.”
“연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언제나 응원과 지지만은 보내온 여인은 이번 역시 스스로를 희생하려 한다.
못내 감사하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제갈벽은 죄인이 되었다.
그녀의 미소에 씁쓸함을 깃들게 했으니 죄인이 되었다는 말 말고는 표할 도리가 없었다.
“너는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고서연은 말했다.
“가가께서 저를 사랑함을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선택지였다.
제갈벽은 가문과 고서연을 저울에 올렸다.
본디 고서연이 자리한 쪽으로 바로 기울어야 할 저울은 쉬이 두 가지 중 우열을 내지 못했다.
가문의 무게에 제갈산의 무게가 더해진 까닭이다.
“내가….”
제갈벽은 선택해야만 했다.
“…내가, 죄인이구나.”
참으로 쓰라린 선택을 해야만 했다.
*
세가의 장로들이 고서연을 탐탁치 않아 함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 그들의 입을 다 닥치게 만들 수 없었기에 제갈벽은 그 말에 함께 아파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제갈산이 훌륭히 자라나는 날 이 평가는 모두 바뀌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주, 장로들이 둘째 마님의 편을 듭니다.”
한데 어찌 운명은 이리도 얄궂기만 한 것일까.
“첫째 마님의 자리가….”
“나는 괜찮으니 산이를 부탁하마.”
“…누님.”
“무연아, 그저 하나만 약속해다오. 너만은 산이의 편이 되어주기로.”
금화장에서 온 둘째 부인은 악랄했다.
금화장을 살리기 위해 세가를 장악하고자 했으니 악랄함 말고는 표할 도리가 없었다.
장부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제갈벽은 절대 그녀를 용서치 않았을 것이다.
“가주, 설마 이 처를 소박 맞힐 생각이십니까?”
모든 것이 괴로웠다.
그녀와의 잠자리는 고역이었고 그녀의 속삭임은 저주였으며 그녀의 손길은 소름끼쳤다.
그럼에도 떨쳐내지 못했다.
그게 문제였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먼저 몸을 돌보십시오.”
또한 고서연의 위로에 마냥 기대기만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긴긴 세월, 제갈산이 별에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기만을 바랐다.
언젠가 제갈산이 다 자라 세가를 맡게 되면 고서연과 둘이 한적한 곳으로 떠나 평생 지은 죄를 속죄하고자 했다.
너무 먼 미래를 그렸다.
현재를 보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마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상인의 탐욕은 너무나도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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