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86화 (186/334)

EP.186 십구장 - 청해, 부자 (6)

* * *

태생부터 특별했다.

제갈벽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5세의 일이었다.

“이걸 다 이해했다는 말이더냐?”

“예, 진의 중심이 되는 것은 오행의 목(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약점이 되는 화(火)의 기운을 통해 풀어내는 것이 가능하겠습니다.”

“허어…!”

진법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글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무공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신동(神童).

제갈벽은 지극히 객관적인 시야에서 스스로가 그리 분류됨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유년은 어려운 일이 없었다.

세상이 그에게 너무나도 따스한 형상을 하고 있던 까닭이다.

“소학을 다 뗐습니다.”

“벽아, 네 나이 여섯에 소학을 끝냈다니 참 경악스러울 지경이구나.”

“다음 진도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허허, 그래. 네가 원한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쉬워도 너무 쉬운 삶.

그런 제갈벽에게 어려운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감정이었다.

“대공자께서 벌써 일류에 오르셨다더군!”

“그뿐이던가! 진에 대한 이해가 역시 경악스러운 지경일세! 아는가? 지금 호북 땅에서 대공자를 공명의 환생이라 이르는 이들조차 있다네!”

“허허! 흥복이오! 그것참 세가의 흥복이구려!”

만인의 찬사가 뒤따른다.

기대의 시선이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제갈벽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찬사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칠주야 동안 이어진 날에야 제갈벽의 오성은 답을 도출해냈다.

‘아.’

제갈벽은 타인의 감정에 올바른 반응을 할 줄 모르는 사내구나.

그렇기에 타인과 깊은 관계를 쌓을 수 없는 사내구나.

그런 깨달음이 있고서야 제갈벽은 스스로를 향한 찬사를 달리 보게 됐다.

“한데 참 대단하지 않소? 겨우 지학의 나이일진대 벌써부터 부동심을 완성하였소. 세가에 있는 그 누구도 대공자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하더구려!”

“신동이 괜히 신동이겠는가!”

저것은 공허한 울림이었다.

제갈벽 자신에게 닿지 못할 기쁨이었고, 그들에게 되돌려주지 못할 기쁨이었다.

제갈벽은 고뇌에 빠졌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꽤 힘든 일이었던 까닭이다.

흔히 말하길 미성숙의 방황이라 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그런 사실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타인에게 제갈벽은 그저 위대한 신동일 따름이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져 지학, 열다섯이 된 날이었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제갈벽의 속내는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의 감정은 메말라가기만 했다.

마음을 달랠 곳이 없으니 혼자 있는 일이 잦아진다.

고민과 멀어지려 하다 보니 술을 즐기게 된다.

그런 나날의 어느 한가운데, 제갈벽은 만났다.

“왜 그리 울상을 하고 계십니까?”

제갈벽은 서른 해가 훨씬 넘은 과거의 일임에도 이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호북 무한 땅의 어느 객잔, 무림맹의 일을 배우던 시기 홀로 고독을 씹기 위해 들리는 식당에서 말을 걸어온 여인을.

“손님, 혹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시는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그리고 그녀의 향을.

“…왜.”

“음?”

“왜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나.”

단 한 번도 감정을 표현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남들의 감정을 들여다본 일이 없었다.

의아한 것이다. 어찌 이 여인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속내를 그리 잘 아는 것인지.

그것에 여인은 답했다.

“딱 보면 보입니다만.”

눈꼬리가 솟아오른 눈매가 곱게 휜다.

갸름하고 날카로운 얼굴선이 미소를 띠는 형상에 따라 조금 둥글어진다.

“제가 사람보는 눈이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손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지요?”

그녀의 존재는 제갈벽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녀의 말과 온기는, 그리고 눈빛은 제갈벽이 살아생전 느껴본 중 가장 생경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날의 제갈벽은 참 바보 같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했으니 바보같다 말고는 그를 표현할 말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이름, 말입니까?”

“그래, 이름.”

이제와서는 불행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이름을 밝힌 일은.

“연이라고 합니다. 고서연.”

고서연.

그 이름이 제갈벽의 속에 낙인으로 새겨진 날이었다.

*

난생 처음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 준 여인.

제갈벽에게 그녀라는 존재는 사천당문의 극독보다도 더 치명적인 종류였다.

일종의 중독증세라고 해도 좋았다.

제갈벽은 하루라도 그녀와 대화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치는 사람처럼 매일 그녀를 찾았다.

심지어 그녀의 휴일에도 말이다.

“…손님.”

“오늘은 쉬는 날인가.”

“기뻐 보이십니다?”

제갈벽이 참 뒤늦게야 안 사실이지만 고서연은 성정이 너그러웠다.

아무렴, 일을 마치고 쉬는 날조차 쫓아와 괴롭히는 사내를 웃으며 맞이하는 여인을 너그럽다 외에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요.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으셔서 오셨습니까?”

고서연은 언제나 그런 말로 화두를 던졌다.

그리하면 제갈벽은 맹에서의 여러 일에 관해 말했다.

물론 말해도 되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내각 무인을 선발하는 비무에서 상대방의 하물을 잡은 놈이 나왔다.”

“세상에. 손님은 그런 얘기를 그리 웃으면서 하십니까?”

“어이가 없었던지라.”

이것이 행복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일 것이다.

제갈벽은 객잔주의 딸과 스스로의 정체까지 숨겨가며 관계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함께한 시간에 비례해 마음은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런데 손님은 언제 정체를 말씀해주실 생각입니까?”

“정체라니.”

“아, 뜨끔하셨군요. 그리고 숨길 생각은 있으셨던 건지 묻고 싶네요. 매번 뭘 자랑하려다 그만두시기에 아주 궁금해 죽을 지경입니다.”

도저히 속일 수 없는 상대와 마주하는 일이 왜 기껍기만 할까.

또 자신은 그녀에게 소속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인가.

여러 의문이 제갈벽의 속에 떠올랐고, 이내 스러졌다.

그저 제갈벽은 말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난생 처음 교류라는 것을 해봄에 하루하루를 행복해하며 사는 제갈벽이었으나 그럼에도 제갈벽이었다.

그는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될 말을 잘 알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출신을 안 그녀가 지레 겁먹고 떠나갈까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흐음, 그럼 기다려드리겠습니다.”

“하던 얘기나 계속하지.”

“되었습니다. 남의 하물이 으스러지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 오늘은 제 휴식을 방해하셨으니 하루 어울려주기나 하십시오.”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그녀와의 첫 외출이 아니라, 그 말과 동시에 뻗어 나온 그녀의 손이 제갈벽의 손과 겹친 게 이유였다.

그 순간 제갈벽이 느낀 박동이 이유였다.

무공이라곤 알지 못하는 양민, 게다가 궂은 일을 하느라 굳은살이 밴 손.

투박하기 그지없는 손임에도 그것을 맞잡는 순간 제갈벽은 스스로의 호흡이 떨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십칠 세의 제갈벽은 깨달았다.

자신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렸음을.

*

첫사랑은 달콤하고 씁쓸하여라.

누군가의 말대로 제갈벽의 사랑은 너무나도 달콤했고, 너무나도 쓰라렸다.

고서연이 존재함에 인간이이 될 수 있어 달콤하다.

한데도 그녀와 평생을 기약할 수 없음이 쓰라리다.

백도 무림의 다섯 기둥인 제갈세가.

그 장자로 태어나 장차 세가를 이끌어야 할 몸으로서 혼인은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선택해야 함을 제갈벽은 알았다.

세가의 힘이 얼마나 크냐는 중요치 않았다.

세가의 이름에 걸맞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곧 세가 전체의 지역 장악력과 연관되어 있기에 이는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겠지.

지금의 달콤함은 그저 한순간의 추억이 될 테지.

한데도 또다시 고독해지는 삶이 두려워 제갈벽은 그저 회피하기만 했다.

“뭘 그리 우울해 계십니까?”

“아무것도.”

십구 세의 제갈벽은 풋내나는 사랑을 전하지 못하는 우둔한 사내였다.

그저 상대의 호의에 기대 짧은 평온을 갈구하는 겁쟁이였다.

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관계가 유지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제갈벽이 아직도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고서연이 제갈벽을 배려하여 정체를 추궁하지 않은 것.

“오늘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아, 맞으시군요. 많이 좋아 보이십니다?”

고서연의 미소였다.

나이가 찰수록 더욱 갈구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미소였고, 그녀의 존재였다.

제갈벽은 도저히 고서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마 정체를 밝힐 수 없으니 속이 막막해져만 간다.

그렇게 이립, 제갈벽은 스물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혈사가 일어났다.

만인의 비통함이 하늘을 찌르는 세상이 되었고, 달콤했던 한날의 추억이 스러질 때가 되었다.

우습게도, 제갈벽에겐 그것이 기회가 되었다.

그땐 그리 생각했다.

지금의 제갈벽이 후회하는 일이 있었다.

“…전쟁터로 가야 한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혹, 기다려줄 수 있겠느냐. 나를.”

그날,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고서연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화 보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