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5 십구장 - 청해, 부자 (5)
* * *
작전 결행 시각이 되었다.
목리원은 긴장된 숨을 들이켠 채 저 너머로 보이는 기다란 목책을 주시했다.
“뭘 그리 쫄고 있느냐.”
마일석이 어깨를 두드리며 묻는 말에 목리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단 마인과의 싸움이라는 것이 이유의 끝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저 안에 초월의 마인이 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 아닌가. 물론 이쪽에도 두 명이나 되는 초월이 있었으나 목리원은 그것을 안전의 이유로 둘 만큼 우둔하지 않았다.
‘우리 측 병력을 저들도 알고 있을 터다.’
저기에도 둘, 혹은 그 이상의 초월이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병력이 우리 쪽 보단 훨씬 많을 테다.
긴장의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느냐.”
와중 마일석이 물었다.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엇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너도 못 느낀단 말이지.”
마일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쓸었다.
목리원 또한 그와 같은 답답함을 띄워 올리고 있었다.
천살성으로도 살기 따위를 잡아낼 수 없는 진이라니, 얼마나 지독한 은폐진을 만들어둔 것인지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뭐, 부딪혀보면 알겠지.”
마일석은 초장부터 전력을 다할 셈인지 허리에 차고있던 몽둥이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제갈벽이 말했다.
“병력을 흩어내는 형태의 진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환술을 거는 종류의 진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하지요.”
“그게 무에 어쨌단 게냐.”
“최악의 경우는 아군끼리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돌입은 조금 더 신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알아낼 수 있는 건 있고?”
“없진 않습니다.”
목리원은 눈을 크게 떴다.
제갈벽은 그 기색에는 관심도 없는 것인지 여상스럽게 말을 이었다.
“총 세 종류의 진이 중심이 되는 형태입니다. 진을 겹쳐서 효과를 배로 만드는 형태의 진이지요.”
“종류는?”
“앞서 말씀드렸듯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형태나 대열을 무너뜨려 병력을 흩어내는 형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훼법은?”
“제가 진의 중심으로 향해야 합니다.”
“방해가 많겠구나.”
“예, 그래서 걸왕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갈벽이 마일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곁에 있던 목리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말은….’
말이 좋아 호위지 혹 초월의 무인이 나온다면 그 수가 몇이든 대신 상대해달라는 말이다.
제갈벽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송구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목리원은 안절부절못하며 마일석을 바라봤다.
그에 대한 걱정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알겠다.”
“걸왕님!”
목리원이 놀라 말했다.
마일석은 귀를 후벼파며 답했다.
“거 목청 한 번 크구나. 우리가 여기 있다고 광고라도 하지 그러냐?”
“합!”
목리원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분통했다.
지금 자신만 이리 불안한 것일까.
목리원이 한껏 답답해져 쏘아보자 마일석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인석아. 내가 누구더냐.”
“…걸왕님이십니다.”
“그래, 개방의 걸왕 마일석, 중원 최고의 몽둥이가 바로 나다. 이기려는 게 아니다. 다만 시간을 끌며 상대하는 것 정도라면 상대가 둘은 나와도 능히 해낼 수 있다. 네놈은 이미 알지 않느냐. 그런 일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는지.”
소천마가 도왕과 내각주를 상대로 청해에서 보름넘게 도주한 일을 이르는 것일 터다.
목리원은 그 말에야 겨우 불안감을 억누를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것이 맞습니까?”
“어허, 이놈이 그래도?”
마일석이 몽둥이를 위협적으로 치켜세웠다.
목리원의 눈이 깔렸다.
제갈벽이 와중 말했다.
“…죄송합니다.”
“되었으니 준비나 하거라.”
“예.”
제갈벽이 손짓하자 도처에 대기 중이던 오십의 제갈세가 정예병이 움직였다.
그리고 직후.
“돌격.”
제갈벽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세가의 병력들이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은밀한 야습이었다.
*
제갈산은 좀처럼 속이 진정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제갈벽과의 대화가 속에 남아 불길을 지펴대는 까닭이다.
-내 목을 노리겠다 하지 않았느냐. 목숨을 중히 쓰거라.
끝까지, 최후의 최후까지 그는 모친의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심산인 게 분명했다.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이 계속해서 공력을 불린다. 제갈산은 이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갈 형.”
목리원의 목소리에 제갈산은 고개를 들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인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이제 전투라고 하니 긴장되어서 말일세.”
감정을 엄한 자리에 풀어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목리원이 아닌가, 제갈산은 근래들어 목리원에게 못난 모습을 많이 보여왔다는 자각이 있었다.
이 이상 아우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리라. 나름의 각오로 평정을 가장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만 눈치 좋은 목리원은 쉬이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살기가 진하오. 제갈 형.”
흠칫, 제갈산의 몸이 떨렸다.
“…무슨 말인지.”
“진왕을 향한 살기가 지독하오. 내 언젠가 제갈 형의 살기가 이만큼 짙어지는 순간을 본 적이 있소. 그 상대가 누군지는 최근에야 알았지만 말이오.”
목리원은 평소와는 다르게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많은 것을 묻지 않겠소. 나는 제갈 형이 언젠가는 모든 일을 솔직히 말해주리라 믿기 때문이오.”
제갈산은 그 미소에 시선을 뺏겼다.
순식간에 머리가 식어버린다.
괜히 멍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결국, 제갈산은 헛웃음을 흘려버렸다.
“목 아우….”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쳤다 해야 할까.
아마 이런 성정 탓일 것이다.
목리원이 기껍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남들이 혀를 쯧쯧 찰만한 상황에서도 웃으며 상대를 응원해줄 큰 그릇을 가진 사내이기 때문일 것이다.
목리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지금은 마인을 잡는데 전력을 다해야 하지 않겠소. 얼른 가도록 하지. 우리만 남아있소.”
이미 다른 무인들은 다 목책 안으로 돌입한 상태다.
제갈산은 고개를 끄덕였고, 몸을 일으켜 목리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엔 꼭 말해주지.”
“기다리겠소.”
“그래.”
일이 모두 끝나면 목리원에게 정도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이리 제갈벽을 미워하는 이유도, 그를 죽이려 한 이유도, 그리고 내려온 별에 관한 것과….
‘…그 별이 있어서, 우리가 오래 얼굴을 맞대고 있진 못할 걸세.’
이별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제갈산은 언젠가는 목리원에게 모두 털어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
목책을 넘어선 순간 제갈벽은 깨달았다.
‘환혹계 진법이군.’
목책 바로 너머에 있는 것은 환혹계 진법이었다.
아마 이 진법이 목책 내부 마인들의 거점과 외부를 분리하는 가장 큰 장벽일 터다.
제갈벽은 조금 더 진법을 살폈다.
‘생로를 따라 걷지 않으면 환각 속에 갇히는 진법이다. 지독하군. 기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 진법은 상대를 가리는 형태가 아니라 마인들에게도 곧장 적용될 것이다.
즉, 마인들도 자살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이 진법 밖에서나 대기하지 진법 내부로 들어오지 않으리란 말이다.
‘생로는….’
좁다.
아마 세가의 인원 중 이곳을 뚫지 못해 명을 달리하는 이가 생길 수도 있을 터였다.
제갈벽은 기억을 더듬어 이것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진을 찾아냈다.
‘당문의 금지, 그곳의 진이 이것과 닮아있었지.’
언젠가 독왕의 의뢰로 그곳을 진을 보강하러 간 일이 있어 아는 것이었다.
‘꽤 고생하겠군.’
걱정되는 것은 아직 미숙한 제갈산, 그리고 진법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마일석과 목리원이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제갈벽은 누구보다 빨리 진법을 빠져나가 해주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제갈벽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앞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가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그리운 목소리가.
“가가.”
제갈벽의 걸음이 멎었다.
이것이 환영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목소리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어, 그리하여 빠져들고만 싶게 만드는 달콤함이 있어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또 상념에 빠져 계십니까?”
쿡쿡 웃음소리가 들린다. 제갈벽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선 안 되었다.
“이제야 이쪽을 보십니다?”
풍경이 바뀐다.
흐릿한 안개 속에 있던 제갈벽은 어느 순간 봄꽃이 만개한 정원 속에 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 정면으로는 ‘여우같다’라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릴 수 없는 여인이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온다.
가까워진다.
그럴수록 이는 변화가 있었다.
“…연아.”
“예, 왜 부르십니까?”
중원 무림은 이른다.
진왕 제갈벽의 가장 큰 무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평정심이라고.
어떤 위기나 변화 속에서도 털끝 하나 변하지 않는 무표정이라고.
제갈벽은 언제나 생각했다.
“가가, 지금 우십니까?”
그 말은 틀렸다고.
제갈벽의 평정이 깨졌다.
그의 얼굴 위로 진한 인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슬픔의 표현이었다.
“또, 또 우십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중원 강호는 알까.
세상에 단 한 사람, 철면이라 불리던 얼굴에 표정을 그려내던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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