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83화 (183/334)

EP.183 십구장 - 청해, 부자 (3)

* * *

마인들의 처리는 쉬웠다.

고작해야 초절정 하나가 섞인 스무 남짓의 무리로 이기기엔 세가의 전력이 만만찮았던 까닭이다.

아니, 사실 제갈벽 홀로 있었어도 이들 모두를 처리할 수 있었으리라.

시신을 정리하는 세가 무인들 사이, 목리원은 제갈벽의 심계에 깊은 감탄을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에게 경험을 늘려주고 계시다.’

제갈벽은 이번 전투에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저 치명상을 입을 것 같은 이들이 보이면 그곳으로 기파를 쏘아내는 정도의 도움만 주며 전장의 흐름을 조율하기만 했다.

덕분에 세가측 전력은 경상자 몇이 전부, 과연 진왕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전장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는 것쯤은 목리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너무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아도 되네.”

제갈산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저 방관을 즐기는 고약한 인간일세.”

제갈산은 장난스레 말했지만, 그 속엔 목리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경멸이 배어 있었다.

목리원은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 이내 제갈산에게 그리 말했다.

“인정할 점은 인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오.”

제갈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게 옳긴 하지. 미안하네. 내 너무 감정적으로만 말하고 있군.”

“아니오. 나는 제갈 형을 응원하오.”

“말이라도 고맙네. 슬슬 정리가 끝나 가는군. 어서 갑세나.”

제갈산이 대열을 향했다.

목리원은 작게 걱정을 틔워 올렸다.

‘제갈 형 답지 않구나.’

평소 행실 탓에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목리원이 아는 제갈산은 언제나 여유로우며 사건이나 상황을 보는 시각에서 공정성을 유지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이 있기에 당화서도 단의 일에 관해 제갈산의 조언을 구하는 일이 많았다.

한데 지금 모습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세가에 관한 원한일까, 제갈벽에 관한 원한일까.

제갈산은 지금 그의 가장 큰 장점인 공정과 평정을 잃고 있었다.

‘잘 주시해야겠다.’

목리원은 경각심을 띄워 올렸다.

*

세가의 대열이 어느 산자락에 진입했다.

그리고 목리원은 그곳에서 마일석과 재회했다.

“걸왕님!”

“그렇게 크게 안 불러도 들린다. 이놈아.”

마일석은 팔짱을 낀 채 씨익 웃고 있었다.

목리원은 한껏 반가운 기분을 느끼며 마일석에게 달려갔다.

“그간 여기 계셨던 겁니까?”

“그래, 마인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성과는….”

“모여서 얘기하자꾸나.”

마일석의 시선이 제갈벽을 향했다.

제갈벽은 한차례 고개를 숙인 후 무인들에게 일렀다.

“이곳에 야영 준비를 하거라.”

“예!”

어느새 해질녘이다.

무인들은 제갈벽의 지시에 곳곳에 물자들을 풀어헤치기 시작했고 그 와중 제갈벽과 제갈산이 다가와 마일석이 조사한 내용을 들었다.

“이곳에 장로급 마인이 있다.”

“확실한 사실입니까? 아직 떠나지 않았다니….”

“우리가 발견한 흔적이 근방에서 보인다. 기감을 넓혀봐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기파를 막아내는 진법을 쓰는 듯하다.”

“그래서 제가 필요한 것이군요.”

“그래, 진법이라면 네놈 말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마일석의 말에 목리원도 큰 공감을 보였다.

멀리갈 필요도 없었다. 운남 혈마전에서 제단 아래를 막고 있던 진법이 어땠던가.

초월에 이르렀던 마일석조차 운이 겹치지 않았다면 알아내지 못했을 진법이다.

포악한 마인들이라 하나 그들의 기술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전쟁에서 방심은 금물이니 이쪽에서도 최대한 경계를 다 할 필요가 있었다.

“수색전이겠군요.”

“그래, 내일 동이 트기 전부터 움직일 생각이니 푹 쉬어두거라.”

마일석의 말에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첫날 밤이 지나갔다.

*

조사는 그 뒤로 사흘이나 더 이어졌다.

눈에 보이는 봉우리만 백 개가 훌쩍 넘어가는 산맥에서 가만히 있는 물건도 아닌 움직이는 사람을 쫓는 일이란 것은 꽤나 고된 것이었으며, 그 난이도도 극악한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 흔적입니다!”

흔적, 분명 그들이 다녀간 흔적이 그곳에 있었다.

일곱 번째다.

사람의 손떼 묻은 야영의 흔적과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들도 이렇게 흔적만큼은 곳곳에 남겨 그 뒤를 쫓을 수가 있었다.

아니, 세가에서 ‘뒤를 쫓게’ 만들고 있었다.

“함정이군요.”

제갈벽이 말하자 마일석이 말을 받았다.

“그래, 이리 노골적으로도 함정을 쳐대는구나.”

“피할 수 없는 함정입니다.”

“피해선 안 되는 함정이지. 저놈들도 그걸 알고 있다.”

목리원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는 중원 땅이다. 이곳에서 이리 학살을 자행하며 흔적을 남긴다면 우리는 쫓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백도 무림이라는 집단의 정체성인 까닭이다.

고약하다.

확실히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적진에서도 수를 써둔 것이 있다는 뜻일진대 좀처럼 그걸 알 수 없으니 불안감까지 차오를 정도다.

그리한들 어쩌겠는가.

“방비를 더 철저히 하겠습니다.”

“그리해다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뒤쫓는 일이 끝.

병력 지원을 바라기엔 당장 마인들이 들끓어 여유 있는 이들이 없다.

또한 초월지경의 상대를 두고 숫자로 밀어붙이는 일이 의미가 없다.

‘왜인지….’

피냄새가 난다.

아주 지독하게.

*

이틀이 더 지나고서야 마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봉우리 다섯을 더 건넌 자리에 마인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야영이라기엔 확실히 거점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목책이 둘려 있는데….”

“진법이 깔려 있을게다.”

제갈벽이 말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곤 말을 더했다.

“이리 가까이서도 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질감을 숨겨 자연 속에 동화되는 형식이겠지. 거점에서 저놈들이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게다.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이면 이긴다는 계산일 터다.”

“어찌할 것이냐.”

마일석의 말에 제갈벽은 곧장 답을 내놨다.

“갑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곳에서 놓쳐선 안 됐다.

마음 같아선 밖으로 끌어내고 싶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유인을 해온 이들이 그 정도의 방비도 해두지 않았을 리는 없다.

진법을 쳐둔 저 거점이 그들이 바라는 진을 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건을 다 갖춘 자리일 테니.

“장로 하나라면 저희 둘이서 끝을 낼 수 있습니다. 장로가 둘이라면 하나씩 맡으면 될 일입니다. 병력 또한 마찬가지, 정예 중의 정예이며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진법에 관한 대비책을 모두 숙지 중입니다.”

“원이 놈은 그런 거 안 배웠다.”

“괜찮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오며 관찰한 바로는 진법으로 가려진 상대를 파악하는 묘종의 수가 있는 듯하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감이 좋은 놈이긴 하다.”

“걱정할 것은 없겠군요.”

제갈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일석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게냐?”

“아들을 잠시 만나러.”

“네놈을 참 싫어하더구나.”

“….”

제갈벽은 변명할 수 없었다.

아들인 제갈산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그인 까닭이다.

“…못난 부모인 까닭이겠지요.”

“표현을 좀 해라. 이놈아. 네놈이 그리 딱딱하니까 속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

“말한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는 까닭입니다.”

“그놈의 절연성 말이냐?”

제갈벽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늘이 너무나 무심하여 자신의 아이에게 내려진 별, 그 존재를 아는 것은 아직 마일석과 목선오. 그리고 자신밖에 없었다.

별을 이고 난 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빼앗고 그 슬픔을 양분 삼아 주인을 성장시키는 별이라니. 이 어찌나 악독한 별이란 말인가.

“…원망은 장작이 되어주지요. 하나 슬픔은 사람을 무릎 꿇게 만듭니다.”

제갈벽은 걸어 나가며 한마디를 남겼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산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그 아이의 원수가 되어주는 일뿐입니다.”

마침 마음을 표현하는 일만으로도 죄가 되는 과거가 있으니, 제갈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일뿐이었다.

“미련한 놈.”

마일석이 혀를 끌끌 찼다.

*

제갈산이 기억하는 제갈벽은 언제나 무표정이었다.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제갈산에게 무표정 외의 얼굴을 보여준 일이 없는 사내였다.

“또 사고를 쳤느냐.”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이유다. 똥간을 들락날락했다거나 세가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쌈박질을 한 일 따위 말이다.

물론 훈육 차원에선 그런 일이 필요함을 제갈산도 알고 있었다.

제갈산이 섭섭했던 것은 그런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저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매번 사고 치지 말라는 말만 하고 바로 쫓아내잖습니까. 식사 자리에서도 저한텐 눈길도 주지 않으십니다.”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제갈벽의 그런 성정은 어린 제갈산에겐 상처였고, 그걸 보듬어주는 것이 모친의 역할이었다.

모친은 언제나 깔깔 웃으며 그리 답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네 아비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겠느냐.”

“어머니보다도 말입니까?”

“이 어미는 당연히 제외지. 이 녀석, 이젠 어미까지 의심하느냐?”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 그래.”

모친의 말은 달콤했다. 미소는 우아했으며 제갈벽처럼 혼만 내고 쫓아내는 일도 없었다.

모친은 언제나 한껏 훈육한 뒤에는 꼭 끌어안아 주며 마음을 달래줬다.

그 간극이 너무 컸던 것일지도 모른다.

제갈산은 모친을 핍박하는 세가의 사람들이 싫었다.

모친을 지켜주지 않는 제갈벽이 싫었다.

“어머니는 제갈가의 안주인이 아닙니까?! 다들 바보입니다! 이전의 신분은 하등 중요치 않은 것이 분명한데 어찌 이렇게 모질게 군단 말입니까?!”

“중요하단다. 배경이라는 것은.”

“어찌 그렇습니까?”

“우군이 되어주기 때문이지.”

모친은 ‘네가 조금 더 크면 알 수 있을 게다’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제갈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략혼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제갈세가’가 정략혼을 해야 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제갈세가는 너무 큰 거인이기 때문이다.

혼인으로 우군을 만들지 않으면 무너지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어린 제갈산은 모친을 핍박하는 장로와 세가에 언제나 맞서 싸웠고, 그럴수록 모친을 향한 세가의 시선은 삐뚤어지기만 했다.

어느 날 그런 말을 들었다.

“간악한 계집이 대공자를 앞세워 권력을 얻으려 하고 있소.”

충격적이었다.

제갈세가의 마님을 향해 그리 말하는 장로도, 그것에 수긍하는 세가의 중진들도.

하나 진짜 충격적인 일은 끝나지 않았다.

“가주께서 혼인을 하실 것이오. 상대는….”

모친과 함께 정원에 나와 있던 날, 장로가 어느 대단하신 집안의 딸이 가주와 혼인할 것이라 통보했다.

일방적인 통보였고, 그날 제갈산이 본 모친의 표정은 글쎄….

‘어찌 그리 슬퍼하십니까. 가주는 어머니께서 그리 슬퍼할 가치도 없는 사내입니다.’

참으로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갈산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저 방관을 즐기는 고약한 인간일세.”

제갈산은 장난스레 말했지만, 그 속엔 목리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경멸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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