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0 십팔장 - 운남, 혈마전 (3)
* * *
왜 이제껏 이런 통로를 몰랐던 것인가.
기파를 흩뿌리면 공간에 기파가 튕기며 숨겨진 공간도 드러날 텐데, 마일석은 지난 혈마전 침투와 이곳을 부수는 직전까지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지 못했다.
이유는 이윽고 드러났다.
‘진이 깔려있군.’
진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으나 마일석은 알 수 있었다.
제단 아래쪽, 지하로 가는 계단 벽에 그려진 도형이나 곳곳에 박힌 광석들은 분명 일정한 배열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한 진이란 말이다.
역할을 생각해보자면 공간을 숨기기 위한 것 정도를 들 수 있지 않을까.
“가보자꾸나.”
마일석은 말했다.
시간의 촉박함 따위의 문제를 벗어나 이곳에 대한 것은 지금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인 까닭이다.
그렇지 않나, 당장 이곳을 떠난 직후 돌아온 마인들이 먼저 공간 아래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그보다 큰 낭패가 없을 터였다.
마일석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목리원이 뒤따랐다.
꽤 짧지 않은 통로, 그것을 모두 내려가 거대한 방에 도달한 마일석은 눈을 좁혔다.
‘이곳은….’
창고. 정확히는 서재라 말해야 할까.
있는 것이라곤 책장에 꽂힌 몇 개의 책과 용도 모를 기물이 끝인 공간이다.
마일석은 먼저 책장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찾았다!’
대법에 관한 서적이다.
목리원에게 행해진 바로 그 대법에 관한 서적 말이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제목이었다.
‘역성대법(逆星大法)…?’
직역하면 별을 뒤집는 대법이라는 말이다.
내용을 살피고 싶었으나 공간이 너무 어둡다.
대충 유추하자면… 그래, 목리원의 천살성에 어떤 의도를 담아내기 위한 것 정도를 들 수 있을까.
마일석은 서책을 품에 넣곤 다른 책도 뒤적였다.
대부분 진법과 강호에 존재하는 여러 대법에 관한 서적이었다.
‘이중 극마지체에 관해 기록한 대법도 있을 텐데….’
지난 혈사의 끝, 혈마전 전체에 있는 모든 것들 다 털어가면서도 끝끝내 그것만큼은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분명 이곳에 극마지체에 관한 서적도 있을 것이다.
없다면 역성대법에 그 방법이 기재되어 있거나.
‘일단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겨가야겠구나.’
마일석은 주섬주섬 품에 서책들을 넣었다.
그리고 목리원을 바라봤다.
마일석은 헛웃음을 흘렸다.
“뭐하는 게냐?”
“아.”
목리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의 손엔 웬 두개골이 들려 있었다.
“신기해서 잠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 두개골이 말이냐?”
“예, 걸왕님. 이걸 보십시오. 이곳이 드러나지 않았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18년 이상은 이곳에 방치된 백골일 텐데 그 어떤 마모의 흔적도 없습니다. 딱히 별다른 처리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신기하지 않습니까?”
“호오.”
마일석은 그제야 백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기이한 점이 있었다.
마일석이 보기에도 아무런 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뼈일진대 어찌 긴 세월 동안 어떤 풍파도 겪지 않은 것처럼 깔끔할까.
무심코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
덜컥, 마일석의 몸이 멎었다.
“음? 왜그러십니까?”
목리원이 순진하게 물었다.
마일석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정말 낮은 가능성, 하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 마일석의 머릿속에 떠오른 까닭이다.
‘원이는 제단에 있었다.’
갓난아이 상태로 덩그러니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하여 목선오와 마일석은 목리원의 부모가 누구인지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바로 제단 아래 지하실에서 그 흔적이 나왔다면 말이다.
마일석으로서도 미심쩍게 느껴지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원아.”
“예?”
“챙기거라.”
목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일석은 섣불리 다른 말을 더하지 않고 다만 그리 말했다.
“…혈천교의 만행을 생각하면 이분 역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일 수도 있는 일 아니더냐. 모시고 가서 묻어드려야지.”
“아!”
“찾을 건 다 찾았다. 따라 나오거라.”
괜한 기대를 심어줬다가 목리원이 실망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그걸 떠나서 생부모 중 누군가이리란 것을 알아도 문제였다.
천살성이 날뛸 것이다. 증오는 곧 살심으로 이어질 목리원이 가장 경계해야만 하는 감정이었으니.
‘…넋을 기리는 일 정도는 해드리겠소.’
대법에 관해 더 조사하다 보면 이 묘한 두개골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마, 마일석은 이 두개골의 정체를 알아내는 날이 오더라도 목리원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할 터였다.
마일석은 목리원이 지난 일에 슬퍼하는 일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
혈마전을 나와 하루를 내리 달렸다.
그제야 조금 도시다운 곳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목리원은 보자기에 싼 두개골을 아직도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무어라 해야 할까, 생전 만났던 일도 없고 만날 기회조차 없었던 이의 두개골임에도 묘하게 이끌림 같은 것이 있었다.
하여 그런 일에 관해 마일석에게 이야기했는데, 마일석은 침잠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목리원은 그제야 아차하며 표정을 굳혔다.
확실히, 혈사의 날에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을 앞에 두고 미소 짓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았다.
“…그런 것 아니니 신경 끄거라.”
“예?”
“아무것도 아니다.”
마일석의 표정이 조금 더 침잠해졌다.
목리원으로선 의아한 일이었다.
“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묘한 기대감 따위가 있었다.
혹시 이 천살성과 관련된 정보를 얻은 것이라면 그가 찾아낸 것에 이것을 없앨 방법도 함께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마일석은 답을 주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서방의 문자로 쓰여있는 부분이 왕왕 존재하더구나.”
“아아….”
“하지만 마교 놈들이 이것을 노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 이 속에 든 것은 그놈들의 약점이나 치부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어서 이걸 가져가 해독해보아야지.”
“해독할 방법은 있겠습니까?”
“진왕 놈에게 갈 것이다. 그놈이 그래도 제갈이라고 아는 것은 참 많거든.”
제갈벽이라, 목리원은 그 말에 의형인 제갈산을 떠올렸다.
본인은 참 싫어했지만, 용봉단이 뿔뿔이 흩어지며 제갈산은 제갈세가쪽으로 붙었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겠구나!’
이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면 청해다.
목리원은 제갈산과 재회할 생각에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
목리원은 바로 다음 날부터 경공까지 사용해가며 달렸다.
거리가 짧으니 청해에 도착한 것은 무한에서 운남으로 향할 때만큼이나 빨랐고, 제갈세가가 맡은 청해 중부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고생하고 있구나.”
제갈벽과 마일석이 인사를 나눈다.
장소는 거대한 장원이다.
사실상 무림맹의 사령부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인 만큼 그 웅장함이 이루 말할 데가 없는 수준이었고, 그 장원 전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이질감은 과연 이곳이 제갈세가의 진이 두텁게 깔린 장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목리원은 입을 떡 벌린 채 장원을 보다, 이내 제갈벽의 시선이 닿는 것을 느끼곤 바로 포권을 취했다.
“진왕님을 뵙습니다. 저는….”
“묵룡, 소개하지 않아도 안다. 내 걸왕님의 제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으니.”
목리원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자 제갈벽이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들의 의제라 들었다. 만나러 온 것이냐?”
“겸사겸사 그리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습니다!”
“장원 어딘가에 있을 터다. 찾아보거라.”
목리원은 마일석을 바라봤다.
마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다녀오거라. 내 이놈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는 참이니.”
“아, 예!”
“그리고 하나 더, 그 유골은 나한테 주고 가거라.”
목리원은 ‘아’하는 소리를 냈다.
내내 보자기에 싸서 들고온 유골이 그의 등에 매여 있었다.
묻어드릴 자리를 찾아야 함에도 길이 바빠 이곳까지 가져와 버린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목리원은 조심스레 보자기를 내밀었다.
그간 항상 몸에 이고 있어서인지 전보다 더 이 유골과 친숙해진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아쉬울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뭘 죽상이냐. 이놈아. 다녀와라.”
마일석은 조심스레 유골을 받아들곤 그리 호통쳤다.
목리원은 움찔하다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
장원의 안채, 마일석은 역성대법을 읽는 제갈벽을 가만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책을 덮은 순간, 몸에 긴장을 더했다.
“…이걸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제갈벽이 물었다. 마일석은 작게 놀라움을 토해냈다.
그가 말에 감정을 묻히는 일이 아주 드뭄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올 정도의 서책이란 말인가.
마일석은 주먹을 말아쥐며 말했다.
“…혈마전을 다시 찾았다. 내 개인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놈들이 혈마의 흔적을 쫓고 있더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일석은 혈마전에서 만난 마교의 4장로, 그리고 그곳의 제단을 부수니 드러난 지하공간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제갈벽은 입이 무겁고 타인의 일에 깊이 관심가지지 않는 사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단이라면 제가 아는 그 제단이 맞는지요.”
마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님이 천살성의 아이를 데려온 제단이다.”
“…천살성.”
제갈벽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그는 상념에 빠진 듯 멍하니 서책을 보며 침묵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마일석은 그것이 참 답답해 가슴을 퉁퉁 치며 말했다.
“야 이놈아.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빨리 말이나 해보거라. 대관절 그 역성대법이란 것이 무엇이란 말이더냐.”
마일석이 목리원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역성대법은 표지만 한자로 적혀있을 뿐 그 내용이 모두 서장의 언어로 쓰여 도통 마일석이 알아볼 수 없는 종류였다.
마일석은 많은 것이 궁금했다.
목리원의 천살성과 극마지체, 그리고 이 두개골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만 한다는 의무감까지 속에 차올라 있을 저도로 말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음?”
“별을 뒤집는 대법입니다. 그것을 위해 체질을 바꾸고, 주술을 이용하는 대법입니다.”
뚝, 마일석의 움직임이 멎었다.
제갈벽은 이어 말했다.
“걸왕님.”
“…왜 그러느냐.”
“제가, 우리가 틀렸던 듯합니다.”
제갈벽이 종이를 빼들었다.
손에는 어느새 붓이 들려 있었다.
빠르게 휘갈기듯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틀렸습니다. 그날, 우리는 검성님을 그리 보내선 안 됐습니다.”
그답지 않게 조급함을 담아 놀린 붓이 멈춘다.
“핵심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종이를 마일석에게 내밀었다.
마일석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마일석의 눈동자가 굴러간다.
천천히, 그리고 읽은 부분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며.
그렇게 마일석은 내용을 되새겼다.
그럴수록 손의 떨림이 심해진다.
호흡에서 뜨거운 기운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이윽고 모든 내용을 다 읽은 후에, 마일석의 고개는 어느덧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제갈아.”
“예.”
“이 이야기를 세상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거라.”
“….”
“알겠느냐?”
“걸왕님.”
“전해야 한다면.”
검색
마일석의 목소리에 거친 기색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이 조금, 처연했다.
“그것은 나의 역할이 될 것이다.”
마일석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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