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78화 (178/334)

EP.178 십팔장 - 운남, 혈마전 (1)

* * *

무한에서 남서쪽으로, 목리원은 마일석과 함께 운남을 향한 여정을 떠났다.

키워준 부모와의 여행이라, 그것에 차오르는 감상이나 과정의 풍류가 있을 법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다름 아닌 혈천교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목리원에겐 제 근원이 되는 별과 태생의 비밀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온통 심각한 분위기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착했구나.”

마일석의 말과 동시에 목리원의 걸음이 멎었다.

고개를 든 목리원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불에 타서 새까맣게 물든 거대한 전각.

과거 혈천교가 둥지를 틀었던 자리였다.

“이곳이….”

“그래, 혈마전이다.”

목리원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불탄 전각은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지 못한 것인지 온통 썩어들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몰골이다.

하기야 18년이나 지난 과거에 몰락한 곳이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가자꾸나.”

마일석이 앞서 걸었다.

목리원은 그 뒤를 쫓으며 마일석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일석은 전각 깊숙이 파고드는 매 순간, 먼 과거를 되짚으며 감상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은 전선이 단번에 꿰뚫린 날이었다. 우리는 더 전쟁이 길어져선 안 된다는 생각에 역으로 혈마전을 칠 계획을 세웠지. 수많은 이들이 시선을 끌었고, 약 오십에 달하는 결사대가 그 틈을 타 혈마전에 발을 들였다.”

전각 입구에 보이는 것은 곳곳에 눌어붙어있는 검게 굳은 피다. 세월은 그 피에서 혈향조차 앗아갔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강시였지. 그것도 아주 지독한 강시 말이다. 그날, 권왕은 홀로 이곳에 남아 강시들의 발을 묶었다.”

과연 강시의 피였던 것인가.

목리원은 계속해서 걸었다.

이어 나온 곳은 양쪽으로 다 방이 나 있는 좁은 복도였다.

“이곳은 혈천교의 자객들이 곳곳에서 검을 찔러 들어오던 통로였다. 오십의 결사대 중 남은 마흔아홉, 개중 서른이 이곳에서 살수들을 상대했고, 그들을 지휘한 것이 진왕 제갈벽과 살성 염소소, 그리고 독왕 당무경이었다.”

복도를 지나자 또 거대한 공간이다.

“혈마의 최측근들이 다 이곳에 있었지. 혈마를 잡기 위해 남은 인원 중 형님을 제외한 모두가 그들의 발을 묶었다. 결국 대전에는 형님 홀로 들어갔다.”

그렇게 또 공간을 지나 도달한 대전.

“이곳에서 형님이 혈마 단천화의 목을 베어냈다.”

목리원은 가만히 대전을 바라봤다.

이제껏 봐온 공간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처참하기 그지없는 흔적을 품고 있었다. 세월이 채 지워내지 못한 아픈 역사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조차 이 자리의 흔적을 보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피가 이리도 많이 흘렀단 말입니까.”

“혈마의 무공이 그랬다. 피를 기공으로 가다듬어 쏘아내는 형태의 무공을 사용했지. 최후의 순간에는 선천진기까지 모두 뽑아내 사람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피의 한계를 넘어선 운용을 했다더구나.”

공간의 바닥 전체가 검다.

그냥 탄 자국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검게 굳은 피였다.

대전이 꽉 막혀있는 게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혈마의 피가 특별한 것일까.

이곳만큼은 천살성이 으르렁댈 정도의 혈향이 아직 남아있었다.

목리원의 시선이 공간 전체를 살폈다.

피가 튀어 굳은 형상, 그리고 밀도와 굳은 핏물 위로 흐릿하게 남아있는 발자국을 통해 이곳에서 있었던 전투를 유추해내는 것이다.

‘스승님께서 고전하셨구나.’

혈마는 많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무공의 형태가 형태인 만큼 같은 자리를 지키려 들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목선오는 쉼 없이 발을 놀려가며 발악한 게 보인다.

그리하여 결국 닿았을 것이다. 그러니 혈사가 끝난 것이겠지.

혈투의 수준은 또 어떠한가.

겨우 흔적이라 많은 걸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아득히 멀구나.’

무려 18년 전의 흔적임에도, 목선오의 수준은 목리원을 아득히 넘어 있었다.

같은 무공, 같은 심공을 쓰는데도 전혀 다른 무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또한 성련신공이 걸어야 할 길을 알려주는 희끄무레한 이정표였다.

목리원은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을 다 잊고 목선오의 흔적을 쫓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깨달음에 가까운 행위였다.

공간 곳곳에 남아있는 굳은 피, 파괴된 내부와 어딘가의 검흔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교보재였기에 어느새 호흡까지 멎어가고 있었다.

검로, 보법, 그것들이 아우러지며 점점 선명히 그려지는 목선오의 검무.

패인 바닥은 혈마의 혈기공에 의한 것이겠지.

좋다. 혈마의 공격 양상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일보 전진, 삼보 후퇴, 유성칠검의 5식이 이곳에서 발현됐다. 다음은 3식? 그래, 그 뒤로 다시 4식이 이어졌구나.’

목선오는 하나하나가 내공을 뭉텅이로 깎아내는 수를 고작 공격을 흘리는데 사용했다.

한데도 기세가 줄어드는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기세를 더하기 시작했다.

“…아!”

목리원은 탄성을 내뱉었다.

‘내공을 소모한 게 아니다!’

앞선 모든 수가 이어질 하나의 수를 위한 초석이었다.

그리 허공에 쏘아낸 초식들이 어떤 흐름을 만들기 위한 예비 과정이었다.

목리원은 그 순간, 유성칠검의 6식과 7식이 어떤 식으로 운용되는 것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걸왕님! 잠시만….”

잠시도 아까웠다. 목리원은 짓쳐든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많이 수습하기 위해 당장 가부좌를 틀어 명상에 빠지고 싶었다.

마일석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하거라.”

“감사합니다!”

목리원은 바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무아지경의 상태에 돌입했다.

지경에 빠지기 직전, 목리원이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괴물 같은 놈…’하는 마일석의 얼빠진 목소리였다.

*

현재 목리원의 성련신공은 6성에 그쳐 있었다.

그간 꾸준한 발전을 통해 이 경지까지 올리긴 했으나 목리원의 생애 처음 ‘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눈앞에 드리워진 것이었다.

물론 그 벽조차 목리원에게 그리 높은 수준의 벽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갖는다면 금방이라도 뚫을 수 있는 벽. 고로 천천히 뚫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하지만 목리원은 계획을 수정했다.

‘뚫을 수 있다.’

목선오의 흔적, 초월에 이른 성련신공과 유성칠검이 해낼 수 있는 일의 편린.

그게 눈앞에 드리워졌는데 굳이 성취를 미뤄둘 필요가 있겠느냔 말이다.

목리원의 단전에서 내공이 풀려나왔다.

전신의 혈도를 가득 채운 내공이 그의 뒤집힌 혈도를 따라 맹렬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극마지체가 일깨워진다. 천살성이 함께 울부짖는다.

성난 내공이 성장의 기회를 반긴다.

목리원은 그것들의 고삐를 쥐었다.

‘너희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성련이 이르는 길은 포악함에서 만리는 떨어진 형태였다.

‘성련은 곧 조화, 순환, 탄생과 소멸을 이르니.’

별이 떠오르고 지는 일과 그들이 영원불멸하게 이르는 형상을 쉼 없이 바라보는 일이니.

성련을 운용함에 있어 포악함은 절대 있어선 안 될 말이었다.

‘다만 필요한 것은.’

끈기와 평정, 그리고 이해.

인간의 의지를 바라보지 않고 내도록 흐름을 이어가는 별의 도도함이 곧 성련을 완성하는 핵심이었다.

목리원은 혈도 위를 내달리는 내공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며 심상을 바라봤다.

이제 겨우 여섯의 별이 그 위로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별이 앉은 자리에 미약한 빛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저기다.’

저곳으로 가는 길을 잇자, 저 별을 완성하여 이 흐름에 새로운 규칙을 얹자.

목리원의 집중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검은 밤하늘을 닮은 심상, 그 위로 서서히 새로운 별의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별과 별을 이어 세상을 밝히는 무공이기에 성련신공(星聯神功).

그 이름의 뜻대로 별 길이 뚫리면 뚫릴수록 목리원은 내공의 크기가 점점 불어나는 것을 느꼈다.

‘굴려라.’

이 불어난 내공을 또 별 길에 더해보자, 그리하여 일곱 번째 별에 닿아보자.

목리원의 의도는 곧 결실을 맺었다.

‘닿았다.’

번쩍, 목리원의 눈이 뜨였다.

뜨인 눈에 찬연한 별빛이 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와중 그의 주변에 요동치던 묵색의 기파가 주변을 다 잠식했다.

“어이쿠, 이놈 보게?”

마일석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목리원은 그제야 아차하며 기파를 수습했다.

“아! 죄송….”

“되었다. 성취가 있었다면 된 일이다.”

“있었습니다!”

목리원은 아주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성련이 7성에 닿았습니다! 이제 한 계단만 더 올라가면…!”

“어허.”

마일석이 딱! 하고 목리원의 딱밤을 때렸다.

목리원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악!”

“초월은 성급함으로 다다를 수 있는 지경이 아니다. 이놈아, 거기까지 빨리 갔으면 이젠 느긋할 줄도 알아야지.”

쯧쯧 혀를 차며 내뱉는 말에 목리원은 머쓱해져 뒤통수를 긁었다.

마일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혀를 차다, 이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그럼 이제 가도 되겠느냐?”

“가다니….”

“말했지 않느냐. 네놈은 성취에 미쳐서 이곳에 온 목적도 잊은 게냐?”

우뚝, 목리원의 몸이 멎었다.

그제야 목리원은 잊고 있던 사실을 되새겼다.

‘그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천살성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함이었다.

목리원의 시선이 대전 끝자락, 반쯤 무너져 있는 쪽문을 향했다.

마일석에게 들은 대로라면 저곳이 바로 예의 제단이 있는 자리일 터.

목리원의 목 뒤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럼 들어가자꾸나.”

마일석이 말했다.

목리원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뺨을 짝짝 친 후에 마일석을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흠칫, 안에서 풍겨오는 진한 혈향에 코를 틀어막았다.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이게 대체….”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마일석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놈의 제단이 뭔지 아는 놈이 없어서 이곳을 방치한 채 나왔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는 생각 탓이었다.”

목리원의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혈향에 천살성이 더 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알아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겠지.”

뿌드득, 마일석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목리원은 그제까지도 멍하니 제단을 바라봤다.

붉다. 제단 주변에 잔뜩 고여있는 피는 붉었다.

분명 18년 전, 그날 이후 누구도 이곳을 찾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이곳의 피만이 굳지 않고 그날과 같은 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목리원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비키거라.”

“거, 건드려도 되겠습니까?”

“느껴지지 않느냐?”

목리원의 눈이 좁아졌다.

마일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곳의 피가 그날의 피일 리가 없지 않느냐.”

그리 말한 마일석이 목리원을 지나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직후.

꽈아아아아아앙―!

하는 폭음이 일었다.

목리원은 화들짝 놀라 밖으로 따라 나섰다.

그리고 발견했다.

“마인 놈이 예까지 와서 또 무슨 수를 쓰려는 겔까.”

“거지. 초월. 네놈이 걸왕이구나.”

노인이었다.

마일석보다도 늙었다 느껴지는 노인이 마일석과 주먹을 맞대고 있었다.

그의 장포는 온통 검었으며, 몸은 다부지고 얼굴은 흉측했다. 꼭 난도질이라도 당한 듯한 상처가 가득한 것이다.

등 뒤에는 웬 사내의 시체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목리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단의 피가….’

저 노인이 받아놓은 피라는 것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곧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