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7 막간 - 이별주
* * *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장소를 향했다.
그곳은 전각에서도 가장 고요하고 분위기가 좋은 연못 앞 마루였다.
술을 마실 일이 있거나 그 외에 대화가 필요한 순간이면 언제나 이곳으로 왔던 것이 어느 순간 하나의 약속으로 화해버린 것이다.
“오늘은 무슨 술이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당문이 숨겨둔 물건과 땅을 정리하던 중 발견되었다는 술인데, 향이가 이 술은 팔아봐야 이문도 별로일 테니 마시라고 주더군요.”
목리원은 백청색 술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화서의 말과는 다르게 병부터가 아주 값진 티가 나는 술이었다.
분명 당문 소유의 비밀 금고에 있었다면 보통 술은 아닐 텐데 겸양을 떠는 것일까.
직후 목리원은 품에 안고 있던 만두를 바라봤다.
괜히 멋쩍음이 떠올랐다.
“으음, 좋은 술에 그럴싸한 안주를 못 가져와 죄송하구려. 숙수님이 자리를 비우신지라 내 직접 만두를 빚었는데….”
혹 술맛이나 떨어트리는 것은 아닐까.
목리원이 걱정스레 묻자 당화서가 당장 부정해버렸다.
“세상 무엇보다 특별한 안주거리입니다.”
“그, 그정도까진 아니오.”
“제겐 그렇습니다.”
라고 말한 당화서가 덥썩 만두를 집어 베어물었다.
“맛있군요.”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만족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목리원은 푼수처럼 웃어버렸다.
고마운 마음 반, 뿌듯한 마음 반이었다.
“술잔, 받으시지요.”
딱! 당화서가 잔의 밀봉을 푸는 순간 공간 전체에 달콤쌉싸름한 주향이 가득 퍼졌다.
목리원은 화들짝 놀랐다.
“소저! 이것은…!”
“공청석유를 한 방울 탔니 어쩌니 하는 말을 듣긴 했습니다. 뭐, 그래봐야 한 방울 아닙니까.”
“겨, 겨우 한 방울이 아니지 않소!”
풍기는 향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사치의 극에 달한 술이라는 것을.
보통 공청석유라면 한 방울만으로 많게는 일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 있는 게 보통이다.
즉, 최대한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잘 정제하여 방울째로 먹어야 하는 게 이 공청석유란 말이다.
‘이 귀물을 술로…!’
물론 술로 빚어버렸다 한들 내공의 증진은 노릴 수 있다.
하지만 한 병을 다 마셔도 반갑자가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아까워도 이리 아까울 수 있을까.
목리원이 탄식을 흘렸지만 당화서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안 마실 겝니까?”
“마, 마실 거요!”
목리원은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혹시 조금이라도 흐를까 집중력은 그 어느때보다 짙어진 상태였다.
당화서가 쿡쿡 웃으며 잔의 반이 살짝 넘도록 술을 따랐다.
“하, 한데 말이오.”
목리원은 뒤늦게 걱정이 차올라 물었다.
“그래도 영약에 속하는 귀물인데 이런 것을 날 줘도 되는 거요?”
“목 소협이 아니면 누구에게 줍니까.”
“혼자 다 마실수도 있지 않소.”
“되었습니다. 저는 목 소협이 좋아하는 얼굴을 보는 게 더 가치있다 여겨지니.”
무슨 의미일까.
여하튼 심장을 설레게 만드는 말임은 분명했다.
목리원은 술을 마시기도 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시지요.”
본인의 잔에도 술을 따른 당화서가 재차 권했다.
목리원은 눈을 질끈 감고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좋구나!’
아, 이런 사치를 부린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공청석유를 탄 술은 그 풍미와 깊이가 목리원이 먹어본 어느 술보다도 엄청났고 그런 이유로 입을 빌어 나오는 것은 탄성이었다.
“괜찮군요. 맛은.”
당화서는 그 대단한 술조차 그리 평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참 술맛에 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야 당화서도 알려준 적이 없으니 잘 모른다.
상념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저가 술에 취한 것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구나!
목리원은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목리원의 속에 꽤 깊은 호기심을 떠오르게 했다.
‘일운 스님이야 술을 안 드시니 모르지만….’
다른 단원들의 주사는 목리원도 이미 아는 바가 있다.
혜운은 술만 마시면 주변 남자들을 맹수의 눈으로 훑는다.
제갈산은 배를 벅벅 긁다 어디론가 사라져 다음날 뺨에 손바닥 자국을 만들어 오고, 남궁진천은 취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대자로 누워 자버린다.
한데 가장 오래 함께한 당화서의 주사만 모르는 상황이라니.
목리원은 골몰을 시작했다.
‘구, 궁금하다!’
그렇지 않나.
주사라 함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상대방의 다른 모습, 혹은 본심이 아니던가.
오죽하면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잔뜩 취한 당화서에게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말을 들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목리원의 뺨이 조금 더 붉어졌다.
호기심은 이윽고 한 가지 결심에 달한다.
‘해, 해보자!’
“소저!”
“예.”
“이리 좋은 술이니 내공으로 취기를 밀어내는 것은 안 될 일이오! 오늘은 잔뜩 취해보는 것이오!”
“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소!”
목리원은 열의에 차 외쳤다.
당화서는 그 모습을 물끄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그렇게 해보지요.”
그렇게 딱 병이 바닥을 보일 시점, 목리원은 기절했다.
*
“우으으….”
당화서는 제 허벅지 위에 머리를 벤 채 끙끙대는 목리원의 모습에 쿡쿡 웃었다.
“그러게 술도 못 마시는 인간이 뭘 그리 무리하고 그러십니까.”
대충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다.
호기심이나 장난기로 반짝이던 눈, 그리고 묘한 기색이 꼭 자신의 주사를 알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평생 이뤄지지 않을 바람일 터다.
당화서는 취기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었으니.
“여하튼 참 아이 같으십니다.”
당화서는 작게 미소 지으며 목리원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보면 묘한 아쉬움과 걱정이 속에 혼재되었다.
이제 한동안 이별.
이 순진하기만 한 사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듯한 감상이 이는 것이다.
물론 걸왕이 함께 있다.
강호의 절대자 중 하나인 그라면 목리원이 사고를 쳐도 어지간해선 다 막아줄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걱정이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조금은 이기적인 이유일 테다.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이제 청해로 떠나야만 한다.
단원들과도 흩어질 것이다.
바로 오늘 낮, 각자 본래 소속으로 돌아가 전쟁에 지원하라는 명이 떨어졌으니 말이다.
그 없이 홀로 지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는 것에 얼마나 마음이 아파 오는지, 겨우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렇게까지 속 깊이 파고들어 온 사내가 괜히 야속하기만 하다.
“아마 소협께선 또 무거운 짐을 지러 가시겠지요.”
천살성을 이고 있단다. 그것도 모자라 극마지체까지 이루고 있단다.
게다가 이번 일에 대해 깊이 말해주지 못한다는 말인 즉슨 걸왕과 함께 떠나는 일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목리원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숨기려 드는 일이 천살성에 관련된 것이니 말이다.
“돌아오면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많이 걱정되어 그럽니다.
이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업을 지고 사는지 그게 참 마음 아파 그럽니다.
당화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 말을 연신 흘려내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던 중, 목리원이 뒤척였다.
“으음….”
안색이 안 좋다.
이리 밖에서 잠들면 배탈이라도 날 듯하다.
슬슬 보내줘야겠지.
당화서는 목리원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더 가까이에서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과 오똑한 콧대, 얇은 얼굴선은 남성미보다는 여성스러움에 가까운 형태였다.
기생오래비라는 욕이 이렇게 잘 어울릴 사람이 또 없을 것이다.
요사스러운 주제에 본인만 그걸 몰라 꼭 동네 똥개처럼 구는 게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여하튼 시선을 뺏는 아름다운 외모.
당화서는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다, 문득 생각해버렸다.
‘…조금 오래 떨어져 있을 테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딱, 되새길 수 있는 추억 하나를 늘리는 것 말이다.
당화서는 쿵쿵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아주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행위를 멈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취기 탓이다.’
취하지도 않는 주제에 그런 변명을 떠올리며 당화서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쪽, 입술이 맞닿았다.
당화서는 배덕감에 몸서리가 처지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슬쩍 실눈을 뜨니 여전히 잠든 목리원이 보인다.
괘씸하여라, 이렇게까지 바보 같아서 마음도 몰라주니 괜히 벌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당화서는 목리원의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목리원의 잇새가 벌어지자 술냄새가 확 풍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야릇한 기분을 들게 한다.
더 오래 이러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해선 목리원에게 실례가 되겠지.
무엇보다 분위기를 타서 선을 넘어버릴 것만 같았다.
순진한 시골 청년을 마구 범해버릴 수는 없는 법이겠다.
그것 흑도도 안 하는 추잡한 짓거리가 아닌가.
“오늘만 봐주는 겁니다.”
앙큼하게 아녀자를 취하게 하려 한 목리원에게 주는 벌.
어느새 합리화를 마친 당화서가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떼어냈다.
그녀의 얼굴 위론 흡족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자, 이제 갑시다.”
당화서는 목리원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잠드는 숙소로 들어갔다.
“으응, 누님…?”
제갈산이 웬일로 숙소에 처박혀 있었다.
“목 소협이 술에 많이 취했더구나.”
“아, 그렇소? 이리 주시….”
다가오던 제갈산의 발걸음이 멎었다.
시선은 목리원의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쩌적 굳은 꼴이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눈치만 빨라선.’
제갈산이 흉악한 마인을 목도한 양민처럼 덜덜 떨며 당화서를 바라봤다.
당화서는 죄의식을 느꼈다.
하나 그런 중에도 입은 부지런히 거짓말을 토해냈다.
“모기가 있더구나.”
“…이 추운 날씨에 말이오?”
“모기.”
“….”
“모기.”
당화서가 눈을 부릅 떴다.
제갈산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알겠느냐? 모기다.”
제갈산이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당화서는 그제야 제갈산에게 목리원을 넘겨줬다.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떠나신다 하니 바로 눕히거라.”
당화서는 숙소를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닫힌 문틈 사이로 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하는 제갈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 아우! 내가 미안하네! 다 내 잘못일세! 이 못난 형님을 용서하시게에에!!!”
별 지랄을 다 하는구나.
당화서는 코웃음치며 자신의 숙소로 떠나갔다.
당화서의 양심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만이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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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길을 떠나는 목리원에게 마일석이 물었다.
“입술 꼴이 왜 그렇느냐?”
“으음? 아, 모기에 물린 것 같습니다! 어제 잔뜩 취해버린 탓에.”
목리원은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하여간 눈을 뜨니 아랫입술이 퉁퉁 불어 얼마나 깜짝 놀랐던가.
동경으로 살피니 다른 부위보다 유독 색깔도 빨개 부어오른 게 바로 티가 나는 정도다.
이런 날씨에도 모기는 있구나, 목리원은 세상이 어찌되려나 싶은 마음을 떠올렸다.
“…모기가 맞느냐?”
마일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목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기 외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마일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목리원은 생각했다.
마일석이 왜 저럴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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