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76화 (176/334)

EP.176 십칠장 - 임무, 잠행 (7)

* * *

련주실을 나온 목리원을 기다리는 것은 용봉단과 서예였다.

“무원아!”

당화서가 말했다.

아,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구나.

목리원은 바로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무사히 독대를 끝내고 왔소!”

“그래, 잘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안에서 다른 변고가 없음을 묻는 말이겠지.

목리원은 문 너머의 도은강이란 사내에 관해 되새겼다.

‘변고는 없다. 오히려 호재라 해야겠지.’

그와의 계약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해낸 일이 아니었다.

분명 목리원은 그런 일을 해낸 이유가 있었다.

‘협의 가치를 증명하라니, 세상에 이것보다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천살성을 타고난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 협이다.

살귀의 별을 타인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협이란 말이다.

조화, 그 개념을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협은 이미 충분한 가치를 다 하는 것이 맞았다.

‘물론 아직은 그 일을 말할 수 없겠지.’

6년이라, 꽤 긴 시간일 터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때까지도 자신이 무사히 협객으로 살고 있다면 협의 가치 증명에 더없이 어울리는 사내가 되어 있을 터였다.

목리원의 속엔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때서야 몰래 도은강에게만 말해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천살성에 관한 것을 말이다.

“다친 데는 없소! 오히려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왔소!”

목리원이 환히 웃었다.

그것에 당화서는 의아함과 답답함을 동시에 띄워 올렸다.

목리원은 킥킥 웃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

“자, 갑시다! 아무래도 련주님께선 우리를 호위로 들일 생각이 없나 보오!”

목리원이 당당한 걸음으로 련주전을 나섰다.

뒤를 따라 당화서가, 외의 다른 단원들과 서예까지 련주전을 나섰다.

련주전 앞에는 아직도 수많은 련의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

서예가 목리원을 지나쳐 선두에 서며 무인들에게 말했다.

“비켜라.”

그녀는 심기불편함을 연기했다.

아무렴 하오문도를 호위 병력으로 꽂아 넣는 일에 실패한 ‘연기’를 해야 했으니 그녀의 연기는 참 상황에 걸맞는 연기라 말할 수 있겠다.

련의 무인들은 서예의 기색으로 안쪽의 일을 대충 짐작했는지 조소하며 비켜섰다.

“그러게 쥐새끼 따위가 어딜 련에 발을 들이나.”

누군가가 서예를 향해 비아냥을 흘렸다.

물론 무사하진 못했다.

따아아아악―!

남궁진천이 손끝에 기를 모아 탄지공(彈指功)을 날렸다.

맞은 사내는 그대로 기절, 주변의 무인들은 히끅 딸꾹질을 시작했다.

“입조심 해라.”

그의 험악한 기색에 공간의 분위기가 묘해진다.

서예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되었다. 남천아, 그냥 가자꾸나.”

서예의 말에 남궁진천이 곧장 ‘흥!’하며 무인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목리원은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연기가 아니구나!’

남궁진천은 이미 뼛속까지 서예에게 복종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왜인지 오늘따라 남궁진천이 한심하게만 보였다.

물론 입으로 내뱉진 못할 마음이었다.

‘남자라면 마음에 품은 여인을 이끌 줄 알아야지!’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하던가, 목리원은 스스로의 처지에 관해선 조금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

흑사련을 나와 그대로 이동을 시작했다.

흑도의 본거지인 광동 땅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 본 이유였다.

바삐 걸음을 옮겨 마침내 광동 땅을 벗어난 날, 서예는 이별을 고했다.

“저는 이만 이곳에서 찢어질 게요.”

“아….”

당화서는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함께 지내며 정이 쌓였다곤 하나 그녀는 결국 흑도 하오문의 문주다.

이대로 함께 무한으로 향했다간 그녀의 행적이 밝혀지며 용봉단과 무림맹의 입지가 교묘해질 수도 있었다.

그녀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은혜는 잊지 않겠소.”

당화서는 포권을 취했다. 흑도고 말고를 떠나서 그녀는 정말 신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준 것이니.

“별말씀을요. 그냥 빚 갚은 거로 치세요. 당신들이 아니었으면 하오문도 못 되찾았을 테니까. 그리고….”

서예의 시선이 꽤 오래 남궁진천에게 머물렀다.

남궁진천은 묘하게 아쉬움과 불만스러움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당화서도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감정의 교류가 오가는 것인지 아는 것이다.

‘…사심이 있었다. 그리 보면 될까.’

당화서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 또 연이 된다면 봐요.”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안 봐도 알 수준이다.

서예가 등 돌려 떠나갔다.

남궁진천에게서 숨이 삐져나왔다.

“검룡 형, 힘내시오!”

목리원이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 남궁진천의 눈초리를 받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이 끝.

당화서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말했다.

“자, 저희도 더 빠르게 복귀합시다. 이제부터 변장도 바꾸겠습니다. 괜한 말이 나오면 곤란하니.”

그제야 인피면구를 벗은 당화서는 숨을 길게 흘리며 답답함을 털어냈다.

‘이제….’

전선으로 향해야 할 때다.

*

무한까지의 여정은 짧았다.

정확히는 짧게 느껴질 정도로 바쁜 걸음이었다.

이동 중 들려온 소문 탓이다.

“벌써 청해 끝자락에서 소규모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는군.”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해 끝자락으로 먼저 떠난 맹의 무인들이 그들과 교전하며 전선을 유지 중이었다.

그 사실이 남쪽까지 퍼진 상황인데 어찌 쉴 틈을 만들겠나.

그런 이유로 용봉단은 광동까지 왔을 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복귀하여 맹에 임무 완수 소식을 알렸다.

목리원은 곧장 마일석을 찾았다.

홀로 움직인다던 그는 어딜 돌아다니다 온 건지 목리원이 맹에 도착하고도 사흘은 더 지나서야 복귀했다.

“그래, 흑사련주가 그런 사내란 말이지.”

마일석은 새로운 정보에 꽤 흥미가 많은 것인지 목리원의 말에 깊게 주의를 기울였다.

하기야 그가 전대 개방주였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까.

“의외로 다루기 쉬운 놈이구나.”

“그렇습니까?”

“무력만 비등하다면 거래 상대로는 합리적인 놈이다. 스스로의 목숨을 내기판 위에 거는 놈이 아니지 않느냐. 한동안 흑도 쪽은 걱정할 일이 없겠구나.”

마일석의 말에 목리원은 크게 공감했다.

목리원 또한 확실히 도은강은 무력적 우열만 아니라면 대화 상대로는 꽤 적합하다는 생각을 떠올렸고, 그런 이유로 거래까지 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마일석이 말을 끊었다.

“광동의 일이 처리됐으니 너는 한동안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알겠느냐.”

“예, 한데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목리원은 아직 마일석의 목적지를 몰랐다.

그가 들은 것이라곤 마일석이 향하는 자리가 이번 마교의 침입과 작지 않은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것뿐이다.

마일석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운남.”

목리원의 몸이 바짝 굳었다.

작금의 강호에, 그리고 마일석의 세대에 운남이 의미하는 곳은 하나인 까닭이다.

“그래, 대충은 예상했나보구나.”

마일석은 곧장 긍정했다.

“혈천교의 근거지. 그것이 있던 자리로 갈 것이다.”

목리원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

꽤 오래전, 목리원은 자신을 어디에서 주워온 것인지 목선오와 마일석에게 들은 일이 있었다.

혈천교의 교주인 혈마 단천화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불길한 제단 위,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목선오는 말했다.

-그것은 대법의 흔적이었다. 나와 걸개는 그 대법이 네 몸에 극마지체를 심는 대법이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단다.

-아마 높은 확률로 맞을 게다. 천살성과 가장 궁합이 좋은 체질이 바로 극마지체이니 말이다.

자신이 갓난 아이일 적 극마지체를 심는 대법에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것이 천살성을 더 보채는 결과로 이어지리라고.

사실, 목리원은 그런 사실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뭐가 됐든 가슴 속에 품은 협만 있다면 그런 것들은 모두 이겨낼 수 있으리란 마음가짐이 있었고, 그 일을 자행한 혈천교는 이미 뿌리채 뽑혀 다 쓸려나갔기 때문이다.

한데 이제와서 마일석이 혈천교를 언급했다.

그들의 흔적을 쫓아야 함을 말하고 있었다.

-홀로 조사하며 알아낸 사실이 있다. 마교 놈들이 혈마의 흔적을 쫓고 있다는 것. 한데 그 기색이 심상치 않아. 꼭 불구대천의 원수를 쫓는 듯하단 말이지.

당장 떠오르는 것은 천마신교의 소교주였다.

초월에 오른 사내. 그는 분명 말했다.

-네놈이 가진 별의 원주인.

빠득, 목리원의 이가 꽉 물렸다.

순간 차오르는 가설, 그리고 감정이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자신이 혈천교의 본거지에서 당했다던 그 대법은 그저 극마지체를 위한 대법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혈마 단천화라는 인물이 이 몸에 천살성을 박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그리 고통스러웠던 세월은 뭐가 되는 건가.

왜 이런 별을 타고났느냐며 하늘을 원망했던 세월은 뭐가 되는 건가.

살심을 품지 않기 위해 고통스러워했던 그 순간들을 탓할 사람이 생겨버리는 것이란 말이다.

당연한 원망이다.

떠올린 가설이 옳다면 목리원이 떠올리는 분노와 증오는 참으로 합당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목리원은 그것에 매몰되어선 안 됐다.

‘살심이….’

목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심을 통제해야만 한다.

증오의 마음은 가장 살심에 가까운 것이니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면 천살성에 잡아먹히고 말 터였다.

목리원은 꽤 오랜시간 심호흡을 이어야 했고, 그것을 끝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무장을 나섰다.

“목 소협?”

마침 당화서와 마주쳤다.

당화서는 반가운 듯 미소지으며 목리원에게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걸왕님과 떠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리원은 잠시 물끄럼 당화서를 바라봤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고민이 떠오른다.

‘아니, 당장은 말하지 말자.’

섣부르게 말했다 괜한 기대와 괜한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목리원은 기대가 무너지는 슬픔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이미 처음 무공을 배우던 다섯 살의 날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목 소협?”

“…아, 그렇소. 길이 바쁘다고 내일 당장 떠나자고 이르시더구려.”

목리원은 애써 괜찮은 척 미소를 지어냈다.

하지만 당화서의 눈을 속이진 못했다.

당화서의 눈이 좁아졌다.

“고민이 있으시군요.”

목리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래 보였소?”

목소리를 가다듬어 보이지만 떨림은 어쩔 수 없이 묻어나고 있었다.

당화서의 미소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당장 말해줄 수는 없는 내용인가봅니다. 예, 걸왕님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으니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녀 나름의 배려일 테다.

목리원은 속깊이 감사함을 떠올렸다.

“고맙소.”

“별말씀을.”

분위기가 어둡다.

목리원은 이 떨떠름한 공기를 털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저께선 곧장 청해로 가시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당문은 그곳의 물자 지원에 힘을 써야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럼 한동안 이별이겠구려.”

“그래서 찾아왔지요.”

당화서가 품속에서 작은 술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별주 한 잔 어떠십니까?”

당화서의 미소에 목리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노을이 질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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