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십칠장 - 임무, 잠행 (4)
* * *
련주전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육안으로도 그 검은 전각이 보일 정도인, 한눈팔지 않고 달린다면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이곳에 몰린 련주전의 호위들.
“포박하라!!!”
어느새 몰린 그 수가 일백이 족히 넘는다.
하나하나가 절정에 드문드문 초절정 초입에 이른 이들도 느껴진다.
아마 정면 돌파가 그리 쉽진 않으리라.
‘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
목리원은 차라리 이런 위협을 감수했으면 감수했지, 저들의 의도에 따라주겠다고 단원들과 생사결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아주 드물게 남궁진천과 마음이 맞은 것이다.
“초절정이 있소! 내가 막겠소!”
“나다.”
남궁진천이 목리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쿠구구궁―!
터져 나오는 것은 남궁진천의 상징과도 같은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양의 내공.
남궁진천이 검을 높게 들었다.
“떨거지는 알아서 치워라!”
그대로 내리그었다.
꽈드드득, 전방에서 달려들던 십수 명의 흑도 무인들이 단번에 고꾸라졌다.
그나마 서서 버티고 있는 것은 초절정의 무인. 하나 그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당연했다.
목리원조차 기파 대 기파로 남궁진천과 정면승부를 한다면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을진대 어찌 갓 초절정에 오른 것처럼 보이는 저자가 남궁진천을 막겠나.
목리원이 남궁진천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목리원의 몸에 새겨진 별과 그것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기교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 역시 남천 형이오!”
제갈산이 신나서 남궁진천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곳이 제일 안전한 자리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무원!”
당화서가 외쳤다.
그 순간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흑야를 바닥에 튕겼다.
캉, 카강, 카가강.
튕기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검이 빨라진다.
그리고 속도 탓에 검의 형상마저 흐려질 지경이 되자 목리원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목표는 초절정!’
아직 셋이 더 남았다.
개중 당화서가 있는 방향으로 몰래 다가오는 이가 느껴졌다.
‘살수다.’
살객이 되어 초절정에 오른 독기는 인정할 만한 것이나, 무릇 살수라는 것은 살기를 들킨 순간부터 약자로 전락하는 법이었다.
툭, 가볍게 땅을 디디고 선 목리원이 살수의 코앞에서 칼춤을 췄다.
목리원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쾌검, 탈혼번쾌였다.
“끄극…!”
놀란 살수가 뒤늦게 방어에 나서며 치명상은 피했지만 이미 피는 사방에 튄 상태다.
천살성이 반응하며 목리원의 집중력이 한층 높아졌다.
목리원은 살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포착했다.
‘반격이다. 목젖, 명치, 오금. 비수를 통한 공격.’
살기가 닿는 부분이 저릿하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목리원은 곧장 몸을 뒤틀며 쏘아진 비수를 쳐내곤 그대로 칼춤을 이었다.
“목숨은 거두지 않겠소.”
급소를 피해 사지 근맥만을 정확히 2할만큼씩 잘랐다.
제대로 지혈하고 정양한다면 후유증 없이 나을 상처다.
쿵! 살수가 쓰러졌다.
목리원은 남궁진천을 돌아봤다.
“꺼져라―!”
드물게 고성까지 내지르며 난동을 부린다.
목리원은 감탄했다.
‘참 마음이 깊으셨구나!’
얼마나 서예가 걱정되면 안 하던 짓까지 할까!
목리원은 남자로서 남궁진천을 인정했다.
상황만 여유로웠다면 엄지라도 척 치켜세웠을지도 몰랐다.
“음, 미안하지만 느껴지오.”
와중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든 흑도 무인 하나를 더 벤 목리원은 그대로 남궁진천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서자 련주전까지 길이 뚫렸다.
*
예상보다 길을 뚫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 사실이 당화서의 속에 묘한 불안감을 떠오르게 했다.
‘이렇게 쉽다고?’
곧 죽어도 흑사련이다.
흑도 최고수들이 다 포진해있다는 흑도의 심장이란 말이다.
물론 목리원과 남궁진천이 규격 외의 무력을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렇게까지 쉽게 길이 뚫리는 것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함정.’
그 가능성이 떠오른다.
마냥 떠오르는 걱정도 아니다.
실제로 추격자의 수가 갈수록 줄고 있었다.
‘함정이라면 어디냐.’
어떤 자리에 어떤 형태로 어떤 수를 쓴 것인가.
아니, 련주전 안에 발이 묶인 서예를 이용하려는 것인가?
떠오르는 경우의 수가 꽤 많았다.
당화서는 길을 뚫는 와중에도 사고를 멈추지 않았고, 이윽고 련주전에 입구에 들어선 순간 내내 떠오르던 께름칙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입구 쪽에 다섯의 무인이 서 있다.
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 있는 흑색 무복의 중년들.
스스로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다 풀어헤친 공력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들 모두가 이미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있었다.
“무원! 남천!”
바로 목리원과 남궁진천을 불렀다.
두 사람 또한 이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는지 바로 전투 태세에 임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
초절정 다섯, 그것을 상대할 이쪽 전력은 초절정 둘과 절정 넷.
쉽지 않은 승부다.
기껏 두 사람에게 힘을 더한다 해봐야 자신의 독과 제갈산의 약식 진법이 끝일 테다.
“련주님껜 갈 수 없다.”
쿵! 가장 가운데 있던 무인이 언월도로 바닥을 찍으며 말했다.
화르르륵, 자주색의 기파가 그의 몸과 언월도를 휘감았다.
당화서는 상황을 파악했다.
‘나머지 넷은 나서지 않는다?’
어째서.
생각을 떠올린 순간 목리원과 남궁진천이 동시에 그에게 검을 뻗었다.
당화서의 기준에선 흠잡을 곳이 존재하지 않는 합격(合擊)이다.
콰아아아앙―!
막혔다.
사내가 홀로 막은 것이 아니다.
그제까지도 뒤에 서 있던 넷 중 둘이 튀어나와 목리원과 남궁진천의 합격을 함께 막아낸 것이다.
당화서는 그제야 눈치챘다.
“누님.”
제갈산도 눈치챈 듯 낭패어린 기색으로 당화서를 불렀다.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구를 막을 생각이다. 모든 공력을 방어에 집중하면서.”
이곳은 흑도 무림맹인 흑사련.
그곳에서도 가장 심부에 있는 련주전.
이들에게 시간이 끌린다면 이어질 일은 자명했다.
‘흑사련의 병력 전체가….’
이곳으로 몰려든다.
*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련주가 물었다.
서예는 섣불리 답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직전 문지기가 용봉단의 폭주를 보고한 참이다.
이제 어떤 변명을 하든 그들이 흑사련에서 활개 쳤다는 사실을 덮을 수 없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런 것인가.
아니,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단원들 간의 생사결이라니, 련주가 제안은 이런 수가 아니고서야 뚫은 도리가 없는 형태였다.
“침묵할 텐가?”
“…아니요.”
“그렇다면?”
“저들을 안으로 들이세요.”
이렇게 된다면 정면돌파다.
이제껏 련주의 성정을 고려해 밝히지 않았던 사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중원 무림에서 온 이들이에요. 무림맹에서 사절 자격으로 이곳에 보낸 사람들이죠. 섣불리 목을 벴다간 상황이 복잡해질 거예요.”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믿지 않아야 할 이유는요?”
“네년이 내 자리를 노리고 살수들을 데려왔을 가능성.”
“련주님을 해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를 불러올 능력이 제게는 없네요.”
“극독은 경지를 가리지 않지.”
“극독조차 초월을 넘진 못하죠.”
“초월조차 결국은 한낮 인간일 뿐이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보죠. 제 말이 진짜일 경우에 뒷감당이 가능하신가요?”
“적어도 내 목이 하루는 더 붙어있을 수 있겠군.”
의심병이 저리 심해서야.
서예는 짜증을 삼켰다.
어떻게 그를 설득해야 하는가.
고민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정적이 떠오른다.
련주가 슬그머니 살기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서예는 어깨가 내리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하나 더, 이런 사고를 친 네년을 내가 살려야 할 이유는?”
“…저를 쳐내시겠다는 말인가요?”
“중원 무림과 내통했다. 충분한 사유가 된다.”
숨이 턱턱 막힌다.
영약으로 겨우 일류에 오른 서예로선 이 기운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하는 일이라곤 또 머리를 굴리는 것.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는 순간.
‘…이거라면!’
서예의 비상한 머리는 꽤 그럴싸한 작전을 엮어냈다.
“흑도를 위해서예요!”
뚝, 련주의 기세가 끊겼다.
“흑도를 위해서라?”
“거래를 했어요! 저들을 들이는 조건으로 얻을 게 있어요!”
“허튼소리라면?”
“제 목을 치세요.”
서예는 할 수 있는 최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래도 한 번은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다.
“…들어는 보지.”
‘통했다!’
서예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제부터가 시작,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됐다.
“…중원이 마교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요.”
“안다.”
“그 전쟁에 현재 중원에 남아있는 모든 초월이 다 동원되고 있어요.”
“그것 또한 안다.”
“련주는 전쟁에서 누가 이길 것이라고 보나요?”
“중원.”
“예, 저도 마찬가지예요.”
20여년 전의 혈사는 지독했다.
그 전쟁에 중원 무림이 희생해야 했던 것들은 적지 않았다.
사람 또한 그랬다.
중원의 무림인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혈천교에 희생됐던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공을 더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 됐던가.
하지만 그것이 중원 무림의 약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단조와도 같았다.
그날의 혈사, 그날의 아픔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분명 존재했다.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들이 분명 존재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무림에서 활동 중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중원 무림은 그들이 살아 직접 후대를 양성하며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해져 있는 것이다.
서예는 그 점을 꼬집었다.
천살성이 반응하며 목리원의 집중력이 한층 높아졌다.
놀란 살수가 뒤늦게 방어에 나서며 치명상은 피했지만 이미 피는 사방에 튄 상태다.
목리원은 살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포착했다.
“전쟁 이후를 생각해야 해요. 전쟁이 중원의 승리로 끝나면 그들의 위세는 지금보다 더 높아지겠죠. 그런 만큼 저희의 위세는 약해질 테구요. 방도가 필요해요. 저 또한 하오문의 문주로서 하오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건 바라지 않아요.”
“흥미로운 말을 하는군. 그래서 거래는?”
“제가 백도 무림에 건넨 정보의 가치와 이 만남을 주선한 공로를 전쟁 이후 계산하기로 했어요.”
거짓말이다.
그런 약속은 없었다.
하지만 알 게 뭔가, 지금 그런 약속이 없더라도 나중에라도 약조를 받아내면 그만인 일이다.
서예는 현 무림맹주인 사백운과 꽤 우호적인 관계를 쌓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혹시 들어주지 않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많아.’
“묻지.”
련주가 물었다.
“그렇다면 만날 수는 있다. 하나 백도 무림이 떨거지들을 사절로 보냈다면 내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저들의 취급을 내가 기꺼이 감내해야만 하는가.”
이 또한 예상한 질문이다.
흑사련주 만악 도은강.
그는 남들이 무심코 넘어가는 일에서도 가치를 따지는 사내였다.
서예는 조금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검룡 남궁진천, 괴룡 제갈산. 묵룡 목리원.”
셋의 이름을 읊었다.
“그 셋이 각자 초월을 등에 업고 있어요. 죽인 이후를 감당하실 수는 있으세요?”
강짜부리기다.
하지만 서예는 이 방법이 통하리라 확신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계산을 통해 나온 가치.
그는 초월에 오른 위대한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리가 있군.”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소름끼칠 정도로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이 점이, 서예로 하여금 께름칙함을 느끼게 했다.
“저들을 들이지.”
여하튼, 성공했으니 그것으로 다행인 일일까.
서예는 뒤늦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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