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 십칠장 - 임무, 잠행 (3)
* * *
개판.
당화서는 현 상황을 그리 표현했다.
“더 없나? 쯧, 근성마저 없는 버러지들이었나.”
당화서의 정면, 남궁진천이 손을 털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는 련주의 호위무사들이 하나 같이 몸 한구석이 부러져 움찔대고 있었다.
임무가 임무이니 조금만 참아주면 될걸 서예 하나 사라졌다고 바로 난동이란 말인가. 당화서는 전생에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온 결론은 그랬다.
‘다 내 부덕함이구나.’
오늘부터 일운과 함께 불공이라도 드려야 할까.
생각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지.”
중후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당화서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흑색 무복을 입은 련의 무인, 하지만 다른 이들처럼 복면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직급이 높은 자인가?’
그리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공력이 범상치 않았다.
‘최소 초절정.’
당화서의 속에 긴장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네놈은 또 뭐냐.”
남궁진천이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답했다.
“그 전에 무슨 일이냐 물었다.”
“버러지에게 그걸 말해줄 이유는 없다.”
“버러지라, 무슨 자신감이지?”
사내의 흉터가 인상이 찌푸러짐에 따라 모양을 바꿨다.
당화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남천, 내가 설명한다.”
“뭘 이런 일 정도….”
“내가 한다고 했다.”
당화서의 눈이 부릅 뜨였다.
남궁진천이 흠칫했다.
꼭 이렇게 화를 내야 정신을 차리지.
당화서는 후일을 기약하며 남궁진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사내를 마주했다.
“…시험 도중 사고가 있었소.”
“이걸 사고라고 이를 텐가?”
“적이 너무 약한 문제지. 고작 우리 단원 하나를 못 이겨 박살이 날 정돈데.”
“그 단원이 자네보다는 강해 보이는군. 하오문은 약자가 강자를 부리는가?”
“보시다시피 성격이 저 모양이라 문주께선 나를 더 아끼시오.”
“우습군.”
사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이 상황을 어찌할 생각이지?”
당화서는 사내의 말에 잠시 머리를 굴렸다.
‘일단은 수습하고 시험을 이어가야 한다.’
뭐가 됐든 련주와 독대할 자리를 만들어야 함은 자명하다.
과정이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사실 크게 나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뭐가 됐든 련주의 앞까지 도달할 자격이 있다는 것 정도는 증명한 셈이니.
“강자존, 승자독식. 흑도의 법도가 아니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겔까.”
“약자가 나가떨어진 것에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묻는 게요.”
사내의 시선이 쏘아진다.
당화서는 그 속에 담긴 기세에 호흡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물러서선 안 된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임무에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당화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다음 시험은 어찌 되는 것이오?”
목리원이 당화서 앞으로 나와 그녀에게 쏟아지던 기세를 대신 받아냈다.
사내의 눈썹이 들렸다.
“…하나가 더 있었다라.”
경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무원….”
당화서가 목리원의 가명을 불렀다.
목리원은 괜찮다는 듯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있었다면?”
“초절정이나 된다면 하오문의 주요 병력일 텐데 왜 문주를 떠나 이곳에 온 것이지?”
“그것이 명령이기 때문이오.”
“문주는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본디 겁이 많은 이는 의심이 많지. 속이 좁은 사내로구려.”
목리원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당화서는 깜짝 놀랐다.
‘목 소협이 이리 연기를 잘했던가?’
하기야 근래 들어 마일석과 자문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것 같기는 했다.
그 배움에 연기도 포함되어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사내는 물끄럼 목리원을 바라봤다.
미간은 찌푸려지고 있었다.
“…련주님의 총 호위대장 연군옥이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무원. 별호는 없소.”
“좋다. 그리 원한다면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해주지.”
연군옥이 곁에 따라오던 부관에게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자 부관이 고개를 숙인 후 다른 곳으로 향했다.
“따라와라.”
그리 말한 연군옥이 몸을 돌렸다.
목리원은 그제야 당화서를 바라봤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게 칭찬이라도 바라는 태도였다.
당화서는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잘, 하, 셨, 습, 니, 다.’
목리원이 아주 흡족해했다.
*
흑사련 련주실.
서예는 여전히 그곳에 붙들려 있었다.
련주는 여전히 천막 뒤에 삐뚜름하게 앉은 자세였다.
‘하여간 의심 많은 인간….’
만악 도은강.
역대 흑사련주 중에서도 그 특이함 하나는 최고로 치는 기인.
굳이 자신을 이곳에 붙잡아두는 이유야 뻔하지 않나, 이곳을 나간 자신이 다른 수를 쓰려는 것을 막는 것일 테다.
게다가 자신의 지시가 없는 그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판단하려는 의도 또한 존재할 터.
‘여기서 정체를 까발려버려?’
그들은 백도 무림맹에서 나온 인물이며 당신과 독대하길 원하고 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예는 어렵지 않게 답을 낼 수 있었다.
‘믿지 않겠지. 믿어도 자격을 논할 거야. 맹에서 허튼 인물을 보낸 거라면 만날 가치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
그는 사람을 보며 꽤 많은 것을 고려하는 사내였다.
무림맹의 인물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맹에서 자신을 무시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무명이나 정체를 말한다 한들 련주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기준을 중시하는 사내였으니.
서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겠지?’
다른 것보다 남궁진천이 걱정이다.
목리원이야 당화서가 알아서 해주겠지만 남궁진천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사고를 칠 걸어 다니는 벽력탄이었으니 그가 잘 따라올지가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그가 사고를 치지 않길 하늘에 빌어야 할까.
생각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련주님.”
문지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오문도 중 하나가 흑비조를 전멸시켰습니다. 이름은 남천, 초절정입니다.”
서예의 이가 꽉 물렸다.
‘이 인간을 그냥!’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쳐버린 건가!
열불이 확 치솟는 순간 문지기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초절정 하나가 더 있다는 정보입니다. 총대주가 그들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끝으로 공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서예가 침묵에 목이 다 조여온다는 생각을 떠올릴 즘, 련주는 말했다.
“나가봐라.”
문지기에게 하는 말이었다.
문지기는 고개를 숙이고 련주실을 떠났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련주가 말했다.
“초절정이 둘. 네년이 나한테?”
서예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일찍 들켰는데.’
적어도 련주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독대한 이후이길 바랐다.
서예는 하나같이 뜻대로 안 되는 상황에 작게 숨을 내뱉었다.
‘빚으로 달아둘 거예요.’
이렇게까지 고생하는데 무상노동은 절대 사절이다.
“련에 소속 무인이 있다는 건 하오문에도 득이 되는 일이니까요.”
“련 내부의 정보라도 빼갈 생각인가?”
“련주님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요. 내부 정보라고 해봐야 다른 흑도들의 정보일 테니까요.”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믿지 않아야 할 이유는 있나요?”
“스승 등에 칼을 꽂고 문주 자리에 앉은 계집을 어찌 믿을까.”
“그런 계집이니 더욱 믿으셔야지요.”
서예는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말했다.
“독기가 있으니 쓸만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본신의 무력도 약하니 언제든 꺾을 수 있겠죠. 쓰기 좋은 도구일 텐데요.”
련주가 침묵했다.
서예는 더 설득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니까….”
“그만.”
련주가 말을 잘랐다.
“그만하면 됐다.”
성공인가.
서예가 간절함을 띄워 올렸다.
하나 역시 흑사련주는 그런 간절함을 들어줄 위인이 아니었다.
“여섯은 많다. 게다가 초절정 둘도 과하다. 딱 셋만 들이지. 그놈들끼리 붙여서 살아남는 셋.”
서예의 숨이 멎었다.
*
시험은 두 차례 더 이어졌다.
하나는 호위조 중에서도 수위에 든다는 조의 조원을 2대 1로 싸워서 이기는 것.
이 시험에서 목리원과 남궁진천은 제외됐다.
다행히 다른 네 사람이 어렵지 않게 그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두 번째 시험은 끝. 세 번째 시험이었던 암살자 색출 역시 여섯 모두가 어렵지 않게 통과해 다음 시험을 목전에 둔 상황이 왔다.
목리원은 발을 들인 공간을 유심히 살폈다.
특별한 장치가 없는 거대한 연무장.
연군옥은 팔짱을 낀 채 그들 앞에 서 있었다.
목리원은 물었다.
“다음 시험은 무엇이오?”
“보채지 않아도 말해줄 것이다.”
목리원은 눈을 좁혔다.
연군옥의 무력은 초절정에서도 평균치에 드는 값이다.
아직 그가 무기를 사용하는 꼴을 보지 못해 정확한 무력을 파악하긴 힘들지만, 굳이 싸운다면 이기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은 정도.
총괄 호위대장치곤 약한 무력이다.
‘무슨 이유일까.’
왜 련주는 저런 사내를 총괄 호위대장으로 앉힌 걸까.
목리원은 고민했다.
‘흑도에 인재가 없어서?’
그렇다기엔 당장 떠오르는 흑도의 고수가 몇 있었다.
그들 중 실제 흑사련에 있는 이들도 목리원이 알기론 적지 않은 수였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이유는 하나.
‘본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어서.’
흑사련에서도 이례적으로 오래 자리를 지킨 사내라 했다.
목리원이 생각하기로 그런 일을 해낸 사내라면 적어도 초월에 오른 사내이리란 결론이 나왔다.
‘기인이라 했던가.’
대체 이 시험의 목적이 뭘까.
생각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남궁진천이 기세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목리원 또한 인상을 찌푸렸다.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연무장 주변으로 적어도 수십 이상의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잔챙이 수준은 넘어서 있는 이들이었다.
이윽고 다른 단원도 그 기척들을 알아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포위당한 상황.
몰려든 흑도 무인들이 연무장을 둘러쌌다.
연군옥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련주님의 명이다.”
“명이라?”
“여섯은 너무 많다. 또한 초절정 둘은 많다. 거기 남천과 무원은 생사결을 치르라. 나머지 넷 또한 각자 생사결을 치르라. 살아남는 이들만이 련주님의 호위로 들어올 수 있다.”
목리원이 얼어붙었다.
연군옥은 이어 말했다.
“말했다. 생사결이다. 어느 한쪽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승패가 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화서가 곧장 나섰다.
“문주님이 그런 일을 허락….”
“하지 않으면 어쩔 텐가? 이곳은 흑사련이다.”
단원들의 말문이 턱 막혔다.
목리원은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그도 목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 잔뜩 화가 난 듯하다.
“…남천 형.”
“내가 얼마나 더 참아야 하나.”
무엇을.
그런 질문은 필요치 않았다.
남궁진천은 서예가 붙들린 이후 내내 분노에 차 있었고, 그것은 허락만 떨어진다면 난장판을 만들어서라도 그녀를 되찾고자 할 수준의 분노였다.
목리원은 그 감정을 이해했다.
정확히는 이 상황에 대한 불쾌함을 이해했다.
단원들끼리의 생사결이라니, 목리원은 그런 일을 흉내조차 내고싶지 않았다.
“단주님.”
당화서를 불렀다.
당화서는 골몰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쉰다.
“쉽게 가는 법이 없지.”
쯧, 혀를 차곤 말한다.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방침을 결정하는 말.
그것에 연군옥과 자리한 흑도 무인들이 적개심을 불태웠다.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문주님을 붙들어두고 이딴 놀이나 시키는데 우리가 얼마나 더 어울려줘야 할까.”
그와중에도 연기는 이어가는 것으로 당화서는 확실히 전하고 있었다.
“전원.”
지금 해야할 연기가 무엇인지.
“정면돌파하여 문주님을 되찾는다.”
충심 어린 문도를 연기하라.
명령이 내려지자, 누구보다 먼저 남궁진천이 칼을 뽑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눈깜짝할 새 남궁진천이 연군옥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연군옥이 놀라 검을 뽑기도 전이었다.
“꺼져라 추남.”
꽈직, 남궁진천이 칼자루 끝으로 연군옥의 코를 찍었다.
내력을 가득 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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