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1 십칠장 - 임무, 잠행 (2)
* * *
거처의 정리를 마치고 이어진 일은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는 것이었다.
전각의 가장 큰 방, 한데 둘러앉은 단원들을 보며 당화서는 말했다.
“일단 저희가 흑사련주를 만났다는 것은 절대 알려져선 안 됩니다. 그러니 흑사련에 들어가 련주를 만나기 전까지 저희는 변장을 유지해야만 하지요.”
“변장이라면….”
“예, 저희는 낭인 행세를 하며 흑사련에 들어갈 것입니다.”
단원들이 이곳까지 오며 취한 위장 신분은 다름 아닌 ‘낭인’이었다.
허름한 옷과 무거운 봇짐은 그 신분을 위해 내내 유지해온 것.
당화서는 말했다.
“련주를 만나기 직전,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련주의 수족들을 만날 때까지는 계속 이 신분을 유지해야 합니다.”
“누님 말을 들어보니 대충 대면할 방법을 고안한 것 같소만.”
여하튼 제갈산의 눈치 하나는 알아줘야 할 듯하다.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히 우리에겐 흑사련과 연결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당화서가 서예를 바라봤다.
서예는 바로 말했다.
“하오문 소재의 무인을 흑사련에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왔다. 대충 그런 식으로 말할 생각이에요. 물론 보통 직위로는 안 되죠.”
흑사련은 흑도 최대의 문파 연합이다.
당연 그 규모가 규모인 만큼, 또한 흑도의 폐쇄성을 고려하면 련주와 대담하기 위해선 보통 직위로 들어가는 정도는 안 된다.
당화서가 서예의 말을 받았다.
“련주의 직속 호위대. 우리는 그걸 위한 시험을 치를 것입니다.”
당화서는 긴장한 낯이 역력한 목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분은 하오문주가 보증해주지요. 실력만 증명할 수 있다면 련주에게 닿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목 소협이라면요.”
제갈산이 손을 들었다.
당화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발언을 허했다.
“한데 굳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있소? 하오문주와 련주의 대담에 문주의 호위로 왔다고 하면 그만인….”
“불가능하다.”
당화서는 서예에게 미리 들은 말이 있는지라, 제갈산에게 대신 설명을 더해줬다.
“련주와 대면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인정한 사람뿐이다. 또한 그들을 대면하는 자들은 절대 호위나 무장 같은 것을 두어선 안 된다더구나.”
“거 련주라는 양반이 참 겁도….”
“흑도잖느냐.”
제갈산의 입이 꾹 다물렸다.
남궁진천은 코웃음 쳤다.
“본디 약자들이 암살을 두려워하는 법이지. 진정한 강자라면….”
“당신은 입 좀 다물어요.”
“….”
서예가 남궁진천을 침몰시켰다.
당화서는 그 웃기지도 않는 촌극에 헛웃음을 흘리다,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아무튼 출발은 내일 아침입니다. 어떤 종류의 시험이 이어질지 모르니 다들 몸상태를 정비하는데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가 끝났다.
*
다음 날, 하나 같이 낭인의 꼴을 한 용봉단이 흑사련의 성채 입구에 당도했다.
그들의 선두 한가운데, 서예는 검은 면사가 달려 얼굴이 가려지는 죽림을 쓴 채로 문지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서예가 패를 꺼내들었다.
흑색의 반들거리는 패였는데, 그걸 본 흑사련의 문지기가 흠칫하며 고개를 숙이곤 작게 말했다.
“…문주를 뵙습니다.”
“련주님과 상의드릴 일이 있어 왔다.”
“안쪽으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뒤 분들은?”
“문도들이다.”
“아시다시피….”
“너에게 조언을 구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서예는 고개를 슬쩍 떨구며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문지기가 짧게 몸을 떨었다.
“…드시지요.”
“가자꾸나.”
서예는 용봉단에게 그리 이르고 흑사련 안으로 향했다.
참 오랜만에 찾는 성채.
온통 검은 건물들과 흑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짜증스레만 느껴진다.
이미 서예가 그들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게 문제였다.
‘승냥이 같은 놈들.’
저들 모두가 뒤통수칠 생각에 가득 차 서로의 약점을 찾아내려는 승냥이였다.
아무렴, 마도에 의해 하오문이 몰락 직전까지 갔을 땐 어땠던가.
각자 하오문의 빈자리를 대신하겠다며 정보를 규합하는 단체를 련주에게 선보이려 했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하오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서예는 숨을 길게 내뱉곤 성채를 가로질렀다.
꽂히는 시선들은 무시했다.
서예가 신경써야 할 것은 이제부터 만날 련주였으니.
“문주를 뵙소.”
내각으로 들어오자 내각 문지기가 서예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장을 해제하시오. 호위들은 이곳에 두고 가고.”
“무장은 없다. 호위는 그리하지. 이 앞에 대기하고 있거라.”
“예, 문주.”
당화서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녀는 흑색 무복에 풀어 헤친 상태에 얼굴은 독사처럼 눈꼬리를 세운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흑도의 무인이라할 만한 흉악한 얼굴.
서예는 ‘저 얼굴이 성격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렸다.
“확인됐소. 들어가시오. 문주.”
문지기의 말에 서예는 고개를 끄덕인 후 내각 안으로 들어갔다.
‘껄끄럽네. 정말.’
내각에 들어오자마자 들러붙는 시선, 또는 살기가 있었다.
정말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기는 아니었다.
이것은 련주의 고약한 수법 중 하나였다.
자신을 대면하고자 하는 상대의 기를 미리 죽여버리는 조잡하다면 조잡한 수라고도 할까.
서예는 들러붙는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결국 련주전까지 다다랐다.
“문을 열거라.”
이곳 역시 문지기가 있었다.
련주전 문지기의 경지는 절정 끝자락.
서예가 그걸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의 무력이 그 정도라는 말이다.
서예가 확신하기로 그의 실제 무력은 이미 초절정에 달하는 정도일 터였다.
쿠구구궁―
문지기가 말없이 문을 열었다.
그것에 서예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거대한 련주전.
그 끝에 천막 뒤로 사내의 인영이 흐리게 비치고 있었다.
서예는 앞으로 걸어들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련주를 뵙습니다.”
*
한창 내각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목리원은 흘긋 시선을 돌려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그는 전처럼 눈두덩이가 다 내려앉을 정도로 추한 사내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가릴 수 없는 벽안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검룡 형이 기분이 참 언짢아 보이는구나.’
서예가 홀로 내각 안으로 들어간 이후 내내 저 상태다.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서서 발끝으로 바닥을 친다.
인피면구가 다 일그러질 정도로 인상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문주와 유독 친하게 지내셨지.’
혹시 사랑 타령이나 하던 대상이 바로 서예가 아니었을까.
이쯤 되니 눈치없는 목리원이라 하더라도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와중이었다.
“안으로 들라.”
문지기가 말했다.
그의 곁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검은 무복의 사내가 있었다.
가슴에는 흑사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 내각의 무인인 듯했다.
“시험이 있을 것이다.”
경계심과 짜증이 서린 목소리.
목리원은 서예가 련주를 설득하는데 성공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문주는 어딨나.”
남궁진천이 복면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가 답했다.
“련주님과 다과를 하고 계신다.”
“웃기지 마라. 문주를 가둬둔 것 아니….”
“나… 형님!”
제갈산이 빠르게 남궁진천을 붙잡았다.
“무, 문주님 말씀 잊으신 것은 아니리라 믿소?”
제갈산의 뺨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예가 사라지자 마자 바로 시작되는 남궁진천의 돌발행동.
목리원으로서도 꽤 당황스러웠다.
“…남천, 경거망동하지 마라.”
당화서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안그래도 사나운 인피면구를 쓴 상태에서 저러니 더욱이 두려운 마음이 든다.
목리원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남궁진천에게 말했다.
“그, 그렇소. 남천 형, 문주님은 괜찮을 거요…!”
남궁진천이 그제야 ‘쯧’ 혀를 차며 복면인에게 말했다.
“…그놈의 시험이고 뭐고 빨리 끝내지.”
“따라와라.”
복면인은 남궁진천의 태도에 코웃음치며 등을 돌렸다.
‘저러면 안 될 텐데.’
복면인은 절정 끝자락이다.
남궁진천에 비해선 한참이나 밀린단 말이다.
또한 목리원이 아는 한, 남궁진천에게 저런 태도를 보인 적 중 살아남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목리원은 복면인을 동정했다.
*
도착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엔 꽤 많은 흑도의 무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하나하나가 최소 절정에 달하는 고수들이었다.
“첫 번째 시험이다.”
복면인은 팔짱을 낀 채로 잔뜩 무게 잡으며 말했다.
“련주님의 직속 호위 자리를 탐한다 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쯧, 하고 혀를 찬다.
목리원은 자연히 시선을 남궁진천 쪽으로 향했다.
그의 처진 눈두덩이 아래, 흰자위에 핏발이 서 있었다.
“증명하라. 현재 련주님의 직속 호위 수는 이십. 이 숫자는 고정이다. 네놈들이 이 자리에 낄 방법은 오로지 호위 중 누군가보다 뛰어남을 증명하는 것뿐. 이들과 비무를 하여….”
“말이 많다.”
남궁진천이 앞으로 한발 나섰다.
그의 주먹에 짙푸른 기파가 맺혔다.
검도 뽑지 않고 그대로 허공에 권을 내질렀다.
꽝―!
“끄허억!”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진 기파가 호위 중 누군가의 명치에 정확히 틀어박혀 그를 실신시켰다.
털썩, 눈을 까뒤집으며 주저앉는 호위의 모습에 복면인이 흠칫했다.
남궁진천은 말했다.
“이딴 조잡한 것들을 통해서 뭘 증명하란 건가.”
잔뜩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남궁진천이 말했다.
“보아하니 네놈이 호위들의 우두머리로 보인다. 잔챙이는 관심 없다. 덤벼라.”
복면인의 유일하게 드러난 눈이 멍해졌다.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목리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화서를 봤다.
“휴우….”
당화서는 손으로 눈가를 쓸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
목리원의 목 뒤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허…!”
복면인이 검을 뽑아들었다.
“주제에 한 수는 있는 듯하군. 하지만 교만하다. 또한 생각이 짧다. 우리는 호위대 중 그저 하나의 단에 지나지 않을 뿐. 고작 그 단 하나의 단원을 무찔렀다고….”
목리원이 아는 말이 있었다.
자고로 혀가 긴 무인은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
“시끄럽군.”
남궁진천이 검을 뽑아들었다.
검기가 맺혔다.
이윽고 그것이 쏘아져 복면인의 검에 정확히 맞았다.
쩌어어어엉―!
소리와 함께 단번에 복면인의 검이 두동강난다.
복면인이 당황을 수습하기도 전이었다.
남궁진천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검은 어느새 검집으로 돌아가있었고, 이번에 쏘아지는 것은 그의 주먹이었다.
주먹이 복면인의 명치에 틀어박힌다.
“꺼억…!”
남궁진천은 멈추지 않았다.
뺨을 갈기고 정강이를 걷어찬다.
갈빗대에 주먹을 갈기고 한번 더 뺨을 후려쳤다.
그 네 번의 공세에 복면인이 털썩 쓰러졌다.
남궁진천은 복면인의 머리를 짓밟으며 멍하니 서있는 호위들을 바라봤다.
“이딴 병신을 우두머리로 모시는 집단의 수준. 알만하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시시하군.”
남궁진천의 기세가 포악해졌다.
“다 덤벼라. 썩어 빠진 쓰레기들.”
참 무어라 해야할까.
목리원은 복면인을 짓밟으며 폭언을 내뱉는 남궁진천의 모습에 무심코 그런 생각을 떠올려버렸다.
‘음, 참으로 흑도 같구나.’
남궁진천은 흑도가 어울리는 사내가 아닐까.
못생긴 인피면구까지 쓰니 아주 찰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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