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막간 - 성련(星聯)
* * *
-별이 되거라. 홀로 영광되어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어둠 속을 밝혀 약자들을 인도하는 별이.
목소리와 함께 목선오는 눈을 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정적 사이를 파고드는 허름한 방 안이었다.
“으음….”
목선오는 작게 침음을 흘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구나.’
목선오의 입가엔 흐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근래 들어 근심 걱정이 많아진 이유일까.
이렇게 지난 일을 꿈으로 돌아보는 일이 꽤 잦아졌다.
초월을 넘어 그 다음 경지.
강호에서도 전설이나 다름없는 경지에 올랐으나 그것이 완벽한 부동심까지 연결되진 않은 듯했다.
‘이 또한 번뇌겠구나.’
인간 되어 받아들여야 할 것임에도 왜인지 부끄럽게만 느껴진다.
먼 과거, 불성 원명은 번뇌를 다스리려는 행위는 무용한 일이라 일렀지만 불자가 아닌 무인 목선오는 그런 관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자, 일어나보자꾸나.’
목선오는 침구를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의 초가집.
강호에서 물러난 이후 내내 봐온 풍경이었다.
적적하다.
-스승님! 기침하셨습니까!
이리 눈을 뜨고 나오면 언제나 목리원이 해맑은 미소로 반기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느지막이 일어난 마일석이 ‘나한테는 문안 인사도 없는 게냐?’라며 툴툴대는 것도 생각난다.
언제나 곁에 있던 이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서야 그 빈자리를 실감하니 인간은 어찌나 우둔한 생물이던가.
목선오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우….”
내뱉음과 동시에 내공이 맑게 정화된다.
초월을 넘어서며 생긴 현상이었다.
이제 목선오에게 경지의 구분과 공력의 총량은 조금도 중요치 않은 일이 되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공을, 바란다면 어떤 경지의 공력도 완벽히 재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그 말이 옳았다.
사실, 육신을 다시 젊을 적으로 되돌릴 수도 있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더 긴 생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굳이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목선오가 순리의 중요성을 이미 아는 이유다.
억지로 부여잡은 삶이 무슨 의미가 더 있겠나.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삶이니, 목선오는 그 순리에 기꺼이 몸을 맡길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깨우쳐 신선이 되는 것도 좋겠다.
목선오에게 등선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이만 다 자란다면.’
완전히 독립하여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게 된다면 등선도 괜찮으리라.
목선오는 지그시 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일평생을 함께 해온 친우였다.
“오늘도 잘 부탁하마.”
우우웅―
검이 울었다.
목선오는 조금도 과시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검에 담아 기파를 만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었다.
*
검무를 끝내면 해가 하늘 위로 완전히 떠오른 시간이다.
목리원이나 마일석이 다 자리에 없으니 식사는 스스로 해결한다.
다행히 곳간은 풍족하다.
그저 채워져 있는 식량을 적당히 조리해 먹으면 그만이었다.
나물과 밥을 배부르지 않을 정도로만 상에 올려 식사를 마친다.
근처 숲의 동물들이 다가오는 것에, 그들에게도 식사를 나눠준다.
“녀석들아. 무서워하는 척이라도 하거라.”
목선오가 껄껄 웃었지만 그들은 목선오의 몸 위에 올라타 낮잠까지 자기 시작했다.
목선오는 작게 숨을 내뱉으며 가부좌를 틀었다.
명상이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세상의 일부로서 호흡하는 과정으로, 근래 목선오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행하는 일이었다.
-선오야.
그리하면 비치는 것은 과거의 풍경이다.
목선오는 그 풍경에 조금 더 집중을 더했다.
*
산속의 어느 공터.
산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도, 마치 신선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노인이 있었다.
“선오야.”
성련문(星聯門) 9대 문주 우림.
목선오의 스승이었다.
“그놈 참 재주는 있는데 말이다.”
우림이 씨익 웃으며 몽둥이를 들었다.
그리고 목선오의 정수리를 딱! 하고 내리쳤다.
“으악!”
“요령은 피우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 요놈아.”
이것은 한창 목선오가 스물일 적의 일이었다.
“말했지 않느냐. 경지의 성장보다 중요한 것이 내실이다. 무릇 뿌리가 깊어야만 쓰러지지 않는 법이다. 요놈이 벌써부터 뽐낼 생각만 가득하니 이 스승은 참 한숨이 나온다.”
그날의 목선오는 막 초절정에 오른 혈기 넘치는 후기지수였다.
꿈 많고 욕망은 더욱 많은 그런 젊은 무인 말이다.
당연했다.
스물에 초절정.
언제나 산골짜기에서 나가지 않는 목선오였지만 자신의 경지가 얼마나 높고, 재능이 얼마나 눈부신지는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겠나.
이리 대단한 업을 이루었는데 그걸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못한다니.
괜히 반발심까지 드는 것이다.
“스승님, 저는 언제 강호에 출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한참은 멀었다 요놈아.”
“제 나이에 초절정이면…!”
“초절정? 강호 천지에 백단위로 깔린 게 초절정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우림은 언제나 말했다.
초절정은 강호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만 교만함의 골짜기 어딘가에 있는 경지라고.
그러니, 그런 상태로 강호를 나서 성련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라고.
“저는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저라면 성련을 이 땅 가장 위대한 문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재능이 있지 않습니까!”
목선오는 실로 그럴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뿐이랴, 이리 되돌아보면 그때 한 말은 사실이 맞았다.
지금의 목선오는 초월 이후의 경지에 다다른 진정한 거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두 이놈이?”
딱! 하고 우림이 또 정수리를 때렸다.
코웃음까지 치며 우림은 말했다.
“성련에 무명은 필요 없다. 우리는 명예가 아닌 협을 쫓는 천치들이다.”
“하는 김에 명예도 얻으면 좋잖습니까.”
“안 된다.”
“이유가 뭡니까?”
“명예는 협을 갉아먹는 기생충과도 같은 까닭이다. 태양이 드높아질수록 짙어지는 그림자인 까닭이다. 매몰되기 쉽다. 그렇기에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우리는 겸허함을 본으로 삼아야만 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날의 목선오는 반발심에 그리 물었다.
위대한 것이 무엇이 나쁘던가.
명예를 좇는 것이 왜 그르다는 것인가.
혈기 넘치는 그는 도저히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리 물었고, 스승은 그에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답을 일러줬었다.
“우리가 별이기 때문이다.”
“별…?”
우림은 미소지었다.
그것은 목선오가 생각하기에 우림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멋들어진 미소였고, 목선오가 아직도 따라하지 못하는 미소였다.
“그래, 별. 저 밤하늘을 빛내는 작은 알갱이들.”
우림은 하늘을 가리켰다.
“아느냐? 명예를 좇는 것은 태양이 되는 일이다. 홀로 빛나 밝은 세상에 남는 일이다. 나쁘냐고?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우림은 끌끌 웃으며 목선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성련(星聯)이다. 가장 시린 밤을 빛내는 별이다. 비록 그 빛이 더욱 찬란하지 못할지라도 길을 잃은 누군가의 앞날을 조금이라도 밝혀준다면 족한 것 아니겠느냐. 그것이 협(俠)이 아니겠느냐.”
아마 목선오가 아직도 그놈의 협행에 목매는 이유는 우림의 말 탓일 터다.
“선오야.”
“…예.”
“별이 되거라. 홀로 영광되어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어둠 속을 밝혀 약자들을 인도하는 별이.”
이제와 목선오는 묻고 싶었다.
‘스승님.’
이리도 위대한 경지에 올랐으나 아직도 인간 됨이라, 세상은 미지로 남은 것이 너무 많은지라, 그리하여 스승의 그 혜안이 필요함이라.
‘저는 별이 되었습니까?’
그리움에 사무쳐 그리 물었다.
*
목선오는 명상에서 깨어났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런, 하루를 다 써버렸구나.”
늙으면 지난 일만 곱씹게 된다더니 조상들의 말은 좀처럼 틀린 게 없는 듯하다.
목선오는 배까지 드러내며 잠들어 있는 청설모의 배를 쿡 찔렀다.
청설모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이제 가거라. 요놈아. 밤이 되면 맹수가 돌아다닐 것이다.”
청설모가 후다닥 떠나갔다.
목선오는 또 한 번 심호흡으로 내공을 정화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를 준비해 먹고 청소를 끝냈다.
다시 검을 들었다.
“오늘은 별이 밝으면 좋으련만.”
느낌이 좋았다.
이리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이니 필시 환하게 밤하늘이 밝혀지리라.
예상은 맞았다.
노을이 다 저물고 난 자리, 어둡게 가라앉은 하늘 위로 총총 빛나는 별들이 목선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마침 보름이구나.”
달이 기꺼이 빛을 나눠준 듯하다.
“자….”
검무를 추자꾸나.
*
강호에 출두해 중원을 주유한 것이 20년.
강호를 떠난 지 18년.
목리원에게 무공을 가르친 지 13년.
그리고 목리원을 떠나보낸 지 반년.
강호인 검성(劍星) 목선오는 분명 다사다난했던 기행을 끝낸 이었다.
이제 강호인이 아닌 이 세상의 일부로서 살아온 날을 곱씹어야 할 노인이었다.
목선오 스스로도 그런 삶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세파라는 것은 좀처럼 바라는 일을 이루어주는 법이 없는 것이리라.
‘또….’
목선오는 참담한 낯을 만들었다.
여느 날처럼 명상에 빠져있던 중, 신경을 콕콕 찌르는 기운을 느껴버린 것이다.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이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며 의도를 전하고 있었기에.
“후우….”
목선오는 숨을 내뱉고 눈을 떴다.
고개가 향하는 곳은 서쪽, 호북 무한이 있고, 사천이 있고 청해가 있고 그것을 넘어 신강과 십만대산이 있는 방향이었다.
강호에서 은퇴했다곤 하나 왜 모르겠는가.
지금 강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마일석이 자리를 비우며 다 설명해주지 않았던가.
‘천마신교라….’
마지막으로 그들이 준동한 것이 수백 년 전의 일이다.
한데 그들이 다시 움직인다고 한다.
혈마의 혈사가 끝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어찌 이리 시련만 주시오.”
문득 세상이 야속해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다.
다만 기운이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한다.
거리는 중요치 않았다.
이미 초월을 넘은 목선오는 그걸 알고 있었다.
다만 의지.
그것만이 있다면 물리적인 모든 것은 극복이 가능한 얇은 벽에 지나지 않았다.
목선오는 오늘도 어쩔 수 없이 그 기운에 어울려줬다.
아니, 어울려 줬다기보단 그것을 쳐내려 마주 기운을 발했다.
그것은 일종의 논검(論劒)과도 같은 행위였다.
서로의 기파가 얽혀 드잡이질을 하며 누구의 의도가 더 옳을지를 끊임없이 대담하는 일이니 논검보다 어울리는 말은 없을 터였다.
대치는 긴 시간 이어졌고, 이내 끝이 났다.
그쯤, 목선오는 피로감을 호소했다.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구나.’
또한 그의 기에서 갈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기파의 주인이 누구인지와,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역시 걱정되는 것은 목리원이다.
목리원뿐만 아니라, 중원의 수많은 생 모두였다.
목선오는 흐린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강호야.’
중원 무림아.
너는 진정 나를 다시 그 땅에 불러들이려는 것이냐.
메아리쳐 돌아와 번뇌가 되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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