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8 십육장 - 집결, 회의 (10)
* * *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던 회의가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
그간 끈질기게 이어온 조율이 마침내 끝을 맺었고, 그 외에 당장 청해 쪽을 틀어막을 인력은 먼저 그쪽으로 출발까지 한 상황이다.
출범식 같은 거창한 일은 하지 않았다.
전대의 고수들은 조용히 칼을 갈며 또 한 번 중원을 위협하는 적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회의가 끝난 직후.
“묵룡!”
권왕 모용걸이 목리원에게 다가왔다.
목리원은 의아해 하면서도 포권을 취하며 예를 다했다.
“권왕을 뵙습니다.”
“그런 건 됐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모용걸이 씨익 웃었다.
왜인지 불안한 미소였다.
“걸왕 놈이랑 비무 좀 주선해다오.”
참으로 갑작스러운 요청이다.
목리원은 순간적으로 멍해져 내뱉을 답을 고민했다.
다행히 도움의 손길은 늦지 않게 뻗어왔다.
“이놈아, 거기서 뭘 하고 있냐.”
마일석이 쯧쯧대며 다가왔다.
목리원의 얼굴이 해맑아졌다.
모용걸도 마찬가지였다.
“오! 거지!”
“비무 안 한다.”
“허어, 거 한번만 해주면 안 되남? 다른 놈들은 다 자리를 피해버리니 원.”
“나라고 다를 성 싶더냐?”
비무 요청을 다른 고수들에게도 했던 것이구나.
목리원의 입이 꾹 다물렸다.
와중 마일석은 목리원을 팔뚝을 잡아채곤 모용걸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기억해라. 멀쩡한 무기 냅두고 주먹질이나 하는 것은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들이다.”
순간 목리원의 머릿속에 일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음, 걸왕님께서도 틀릴 때가 있으시구나.’
목리원이 보기에 일운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
“광견이구나.”
원명이 말했다.
일운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원명과의 수련을 시작한 지 어언 일주일, 그간 일운은 어떤 공격을 해도 다 받아내는 원명 탓에 날이 갈수록 절제를 잃어만 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은 없다. 무릇 번뇌란 떨쳐내려 하면 할수록 더욱 진득하게 달라붙는 법이니.”
원명은 지그시 웃을 뿐이었다.
그것이 일운으로 하여금 더 큰 부끄러움을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운아.”
“예, 방장님.”
“털어내려 하지 말거라.”
일운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근 일주일 원명이 내린 가르침은 하나였다.
번뇌를 털어내려 하지 말라.
일운은 아직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받아들이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래, 흘려보내야 한다.”
“그것이 털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아주 다르지.”
원명은 그 이상 가르침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또 기파를 흩뿌리며 자리에 곧게 설 뿐이었다.
“다시 오거라.”
일운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하나 어쩌겠는가.
일운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권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
그것은 막 청해의 사건이 끝날 시기의 일이었다.
위광천은 마침내 청해를 빠져나갔고, 7장로와 대기 중이던 마인들을 대동한 채로 천마신교의 본단 앞에 섰다.
“자, 돌아왔군요.”
십만대산의 웅장함을 말하기엔 중원의 단어가 빈약하다.
천마신교에 입교할 적, 7장로가 위광천에게 건넨 말이었다.
“어떻습니까? 돌아온 십만대산은.”
글쎄,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위광천에게 십만대산은 그제나 지금이나 아득하기만 한 공간이었다.
그 풍광이나 위용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이곳에 오면 느껴지는 한 사내의 기운이 위광천으로 하여금 그런 아득함을 떠오르게 했다.
‘정녕 폐관을 끝내신 건가.’
위광천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도 복잡한 감정이었고, 진득한 감정이었다.
위광천은 한차례 심호흡하는 것으로 감정을 털어내곤 말했다.
“…들어가지.”
“존명.”
7장로가 부복했다.
동시에 본단의 대문이 열렸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음성은 교인들의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부복한 채 위광천을 맞이하고 있었다.
위광천은 무심하게 그들을 가로질러 갔다.
“먼저 몸을 깨끗이 하지. 상처를 가리고 운기조식에 들어가겠다. 교주님을 알현하는 것은 그 후다.”
“예.”
위광천은 15년 만에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왔다.
황량했다.
애초에 그는 물건이나 보화따위를 수집하는 취미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있던 물건조차 기억 속 형상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 관리에 꽤 힘써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하녀 둘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리고 젊은 것들이다.
“청과 홍은?”
“의복을 준비 중이십니다.”
“그들을 불러라.”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몸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천마신교는 강자존의 땅, 패배자가 되어 돌아온 자신에게 반감이 있는 이가 없을 수가 없었다.
위광천은 그들과 그들이 부릴 술수를 인지해야만 했다.
“…존명.”
하녀들이 떠났다.
위광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신이 맑아진다.’
이제 약 기운이 모두 빠진 듯하다.
운기조식을 통해 마기를 보충하고 피로를 쫓아낸다면 과거의 무력을 모두 찾을 수 있으리라.
‘달라진 것은 없다.’
별을 뺏겼으나 여전히 소교주다.
여전히 초월에 오른 마인이었고, 여전히 강자다.
이 신교에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사내뿐이었다.
‘별을 되찾으면….’
기필코 그를 넘으리라.
위광천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순간 청과 홍이 방에 들어섰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씻어야겠다. 준비하라.”
“존명.”
위광천은 알현을 준비했다.
*
세 시진의 시간이 흘렀다.
창밖으론 노을이 지고 있었다.
위광천은 참으로 오랜만에 그의 흑색 장포를 몸에 걸쳤다.
“가지.”
그리 말하자,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검마 연리건이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켜섰다.
대전으로 향하는 길을 적당한 거리였다.
딱 생각을 정리하기 좋을 정도로.
“육문(六門)은?”
“소교주님의 복귀를 반기십니다.”
“속내는?”
“오강악의 사망으로 검화문(劒火門)이 이를 갈고 있습니다.”
“병신들이군. 다른 쪽은?”
“일단은 침묵입니다.”
“좋다. 장로들의 상황은?”
“2장로와 3장로, 그리고 5장로의 낌새가 수상합니다.”
“여전한 인간들이군.”
대충 머릿속에 구도가 그려진다.
위광천은 그들을 대처할 방법을 떠올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쿠구궁, 소리와 함께 대전의 문이 열린다.
위광천은 호흡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장 먼저 피부 위로 닿는 것은 7개의 마기.
하나하나가 초월에 달한 괴물들의 시험이었다.
털어냈다.
그리하고 걸음을 내딛자 수십개에 달하는 초절정의 기운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그것은 대처조차 하지 않았다.
무가치했다.
위광천이 마침내 옥좌 아래로 이십 보를 남긴 자리에 다다랐다.
그제야 옥좌를 가리고 있던 천막이 걷어졌다.
위광천은 그 뒤를 보지도 않고 바로 부복했다.
쿵, 하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언제나 자신을 향했던 말을 내뱉는다.
하나의 다른 말을 덧붙여서.
“교주님을 뵙습니다!!!”
이어 침묵이 일었다.
위광천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저곳에 누군가가 있다.
한데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을 모르는 이가 앉아있는 것이라면 초라함이 느껴져야 할 텐데,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당연 떠오르는 답은 하나다.
‘초월을 넘었다.’
마공을 익혀 초월을 넘는다.
그 개념에 달한 이는 위광천이 알기로 천살성의 주인이었던 3대 천마 이무백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기어코 그 벽을 뚫어버린 것이다.
‘진정….’
그 어떤 별도, 운명의 가호도 받지 않은 채 스스로의 힘만으로 마(魔)라는 족쇄를 털어낸 것이다.
“…고개를 들라.”
조곤조곤한 음성이었다.
또한 어딘가 허무함이 깃든 음성이었다.
위광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있었다.
위광천의 기억 속에서보다 훨씬 젊은 모습을 한 천마신교의 주인.
11대 천마(天魔) 이선.
바로 그가.
‘환골탈태(換骨奪胎)!’
육신의 그릇을 새로 짜 더욱 완벽한 신체로 탈바꿈하는 환상 속의 경지였다.
옥좌에 턱을 괸 사내의 머리칼은 길고 윤기있었다.
인상은 중성적이었고 몸은 호리호리하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지니 마치 마왕을 눈앞에 둔 듯 공포심이 인다.
이젠 더 의심할 도리가 없었다.
“탈마(脫魔)의 지경에 오른 것을 경하드립니다!”
“허무하다.”
천마 이선이 말했다.
“모든 것이 무용해졌다. 그 무엇도 가치 있지 않다.”
그가 공허함이 가득 깃든 목소리로 이르니.
“경지의 구분조차도.”
위광천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이선은 이어 말했다.
“등선(登仙)을 준비할 것이다.”
위광천이 흠칫했다.
등선, 신선이 되어 선계에 오르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경우로 따지자면 마선(魔仙)이다.
즉, 그는 이 땅을 떠나겠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중원으로 간다.”
위광천의 주먹이 쥐어졌다.
도움을 주겠다는 것인가.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이선은 그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딱 하나, 중원에 있다. 무용하지 않은 자가.”
위광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선은 멍한 낯을 한 채 위광천과 눈을 맞췄다.
하지만 위광천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더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위광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 속에서 허우적대야만 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단천화의 배신도, 천살성의 강탈도, 그리고 중원에서의 일도.
이선은 그 무엇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제야 와닿았다.
‘더 이상 제게 가치를 두지 않으십니까.’
모멸감, 분노, 원망 따위의 감정이 떠올랐으나 이내 스러진다.
그런 것들을 토해내야 할 순간이 아니었다.
위광천은 손을 말아쥐어 떨림을 억제했다.
고개를 떨궈 망가진 표정을 숨겼다.
“…존명.”
그는 그저 충정을 말할 뿐이었다.
아직은.
*
대회의가 끝나고도 며칠 뒤, 현공은 돌아온 무당의 장문인을 맞이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그래, 공아. 자리를 비운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더냐?”
“예, 무당은 언제나 그랬듯 평온하였습니다.”
장문인이 지그시 웃었다.
“내 천존께 참 큰 은혜를 입고 말았구나. 너같은 아이를 제자로 두었으니 말이다.”
“과찬이십니다. 그보다 회의는 어찌 되셨습니까?”
현공이 묻자 장문인이 허허 웃으며 답했다.
현공은 그 이야기를 모두 귀기울여 들었다.
그럴수록 절대 드러낼 수 없는 환희를 속에 띄워 올렸다.
‘이제 곧이구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마침 신교의 첩보도 얻은 참이다.
‘교주님이 행차하신다.’
중원이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 빌어 처먹을 도사 행세를 그만두고 다시금 사마공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여 우리 무당은 청해 남쪽으로 향할 것이란다. 물론 너도 함께다. 힘내보자꾸나.”
현공은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예,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날, 당신들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역시 내뱉지 못하는 말이 속에 응어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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