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67화 (167/334)

EP.167 십육장 - 집결, 회의 (9)

* * *

회의가 길어질수록 곤란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목리원이었다.

걸왕과의 관계, 그는 모르는 곽칠의 선동, 그리고 이제껏 무림에 나와 보인 행적이 겹쳐 온갖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니 목리원의 가는 길은 한순간도 평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현 강호의 유력 인사들의 방문은 물론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목리원의 배경과 무력을 칭찬하며 연을 대고자 찾아왔다.

그리고 전대의 고수들.

누군가의 선동으로 목리원이 검성을 대신할 이라 판단하게 된 그들은 목리원이 과연 그 자격이 있는 사내인지를 알아보겠다며 무리 지어 몰려와 용봉단의 전각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떠났다.

“흐, 흥! 꼴에 협은 좀 아는구나!”

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목리원은 피로했다.

암만 사람을 좋아하는 목리원이라고 해도, 혼자만의 시간은 가질 틈도 없이 사람 사이에 휩쓸려 다니니 슬슬 진절머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쉬고 싶구나.’

그로선 드물게 그런 생각까지 떠올리던 중이었다.

“음?”

전각의 구석진 곳을 지나던 중, 목리원은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목리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갈 형!”

“음? 목 아우?”

제갈산이었다.

그는 흙바닥에 핀 들풀을 멍하니 바라보다, 목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회의가 시작된 이후로 두문불출 숙소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제갈산에 목리원은 여느 때보다 반가운 마음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 계셨구려.”

“음, 오늘따라 사색이 고파 들풀을 바라보고 있었네.”

제갈산이 씨익 웃었다.

목리원은 감탄했다.

‘사색이라…!’

뭔가 멋있어 보였다.

“나, 나도 해보겠소!”

목리원이 들풀을 노려봤다.

손톱보다도 작은 아기자기한 이파리들이 서늘한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목리원은 이런 걸 봐도 별다른 감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제갈산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내 어릴 적엔 이런 들풀을 보는 걸 좋아했거든.”

“그, 그랬소?”

“어머니와 함께 화단에 나오면 꽃보다 들풀을 더 많이 봤다네. 어머니께선 말씀하셨지. 들풀이라 해서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들은 이 강호로 따지자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내달리는 자유로운 낭인들과 같다고.”

“오오….”

목리원은 작게 탄성을 토해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갈 형의 가족사를 듣는 것은 처음이구나.’

제갈산은 좀처럼 제갈세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무림의 명가에 관심이 많은 목리원이 오대 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가 궁금해 운을 띠면 항상 말을 돌렸었다.

그걸 눈치챈 목리원 또한 어느 순간부터 제갈세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됐으니, 둘 사이에 이런 화제는 꽤 어색한 종류였다.

“…누님이 화가 많이 나셨던가?”

제갈산이 물었다.

목리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으음, 조금. 그렇소.”

“으하핫, 또 똥간에 들락날락하게 생겼구먼.”

제갈산은 유쾌하게 웃었다.

오래가진 못했다.

미소에 묻어 있던 유쾌함은 서서히 그 형상을 희미하게 만들더니, 어느 순간 씁쓸함으로 형태를 바꿨다.

“…목 아우는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나?”

갑작스레 무슨 말일까.

목리원은 곧장 답했다.

“무슨 소리요. 제갈 형은 내 의형제가 아니오. 나는 형제를 멍청하다 흉보는 이가 아니오.”

“말이라도 고맙네.”

“진심이라오.”

“그렇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야.”

제갈산이 손을 뻗어 들풀의 잎을 매만졌다.

“음, 이런 얘기가 부끄럽지만 말일세. 가족과 사이가 안 좋다네. 물론 누님처럼 불구대천의 원수냐 하면… 그리 말하긴 또 애매한 정도로 말일세.”

“아….”

“그래서 가주님의 얼굴을 볼 엄두가 안 나더군. 내 일방적인 화풀이라 더욱 그렇네.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끼워선 안 된다. 제갈가의 모두가 그걸 알지만 나는 사람이 이렇지 않나. 감정적이고 본능적이라 그 일이 잘되지 않는단 말일세.”

들풀을 쓰는 제갈산의 손길이 멎었다.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됐어. 하지만 무를 생각은 없다네.”

제갈산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특유의 족제비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 역시 그리 밝아보이진 않았다.

“누님께는 미안하단 말을 전해주시게. 나는 또 가봐야겠어. 맹은 어딜 가도 보는 눈이 많지 않나.”

목리원은 그의 자세한 사정을 파고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갈산이 숨기는 일이라면 분명 그 이유가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나.

얼핏 보기에 유부녀나 보며 침흘리는 색골이지만, 목리원은 그가 사실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눈이 밝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갈산은 목리원이 아는 사람 중에서도 타인을 가장 잘 배려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화서만큼이나 말이다.

“믿고 맡겨 주시오.”

목리원은 가슴을 퉁퉁 치며 씨익 웃었다.

“내가 소저에게 잘 말해 보겠소!”

“목 아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나?”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아니오?”

“…그렇긴 하네.”

“그렇다면 묻지 않소! 이 목리원은 이 강호에서도 가장 참을성이 좋은 사람이오. 또한 비밀이란 것이 얼마나 말하기 두려운 것인지도 아는 사람이오. 그러니 제갈 형께서는 걱정마시오. 나는 제갈 형이 용기가 날 때까지 오늘 일을 잊겠소!”

제갈산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거 목 아우는 말을 할 때 조금 수줍어 하는 법도 배워야겠군! 그런 얘기를 아녀자에게 했다간 고백으로 들은 아녀자가 자네를 덮칠지도 모르네.”

“괜찮소! 소저에게도 이런 말을 해본 일이 있는데 아직도 안 덮쳐졌소!”

제갈산도 참, 별 걱정을 다 한다는 생각에 목리원은 해사한 얼굴을 만들었다.

제갈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이내 아주 안쓰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목리원을 바라봤다.

“음? 왜 그러시오?”

“…가엾게도.”

그리 중얼거린 제갈산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돌렸다.

“목 아우.”

“음?”

“기억하시게.”

“무엇을 말이오?”

“믿으니까 배신당하는 것이네. 강호의 그 무엇도 믿지 마시게. 특히 혼기가 찬 아녀자는 더욱 더. 내가 보기에 목 아우에겐 마인보다 그들이 더욱 위협적이라네.”

그럼 가보지.

라고 말한 제갈산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목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 형이 할 말이오?”

아녀자를 가장 조심하지 않는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라 신빙성이 없었다.

*

당화서는 목리원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여하튼, 나보고 아녀자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데 할 말이 턱! 없어지더구려!”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화서는 양심의 가책을 잔뜩 느꼈다.

아무렴, 어떻게 그를 자빠트릴 수 있을지를 틈만 나면 고민하는 당화서가 아니던가.

제갈산처럼 살지 않겠다.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버텨온 당화서란 말이다.

그것조차 요즘은 힘들었다.

목리원이 갈수록 요망해진다.

마침 마일석의 허락까지 떨어진 참이다.

이젠 슬슬 건드려도 되지 않나.

속에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차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참 다행이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저가 옆에 있으면 지나가던 아녀자들이 내 눈을 피하더구려! 나는 소저가 너무 든든하오!”

견제를 했으니 그렇지요.

저는 제걸 나눠 먹는 취미는 없습니다.

“아! 아녀자들 뿐만이 아니오! 소저가 나타나면 혼사 생각은 없냐는 지역 무관주들도 사라진다오!”

예, 그 사람들도 학습이란 걸 할 텐데 또 설사가 하고 싶진 않을 것 아닙니까.

변비가 있는 게 아니라면요.

“나, 나는 소저에게서 독립하지 못할 것 같소.”

지금 평생 같이 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인가.

지금 덮쳐도 무죄가 성립하는 것인가.

뺨을 붉히는 꼴 좀 보라.

얼마 전부터 이렇게 은근슬쩍 표현하기 시작했다.

당화서는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마음이 없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걸 그대로 자빠트리자니 너무 과한 건 아닌가 싶다.

이런 쪽에서조차 순진한 목리원이 화들짝 놀라 도리어 무서워하게 되면 어떡하나 고민이 드는 것이다.

당화서는 영혼없는 미소를 유지하며 결국 그런 결론을 냈다.

‘지금은 아니다.’

군자는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법.

무릇 사랑이라 함은 더 간절해지는 쪽이 비참해지는 법.

목리원이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듯하니, 당화서는 그의 마음이 좀 더 무르익을 때까지 인내할 심산이었다.

하여 말을 돌렸다.

“…여하튼 제갈산이 안 오는 이유는 대충 알겠습니다. 집안과의 불화. 그 정도로 정리해두지요.”

“미안하오.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모르고… 알아도 소저한테는 말하면 안 될 것 같소.”

“이해합니다. 두 분이 오죽 친하십니까.”

“이해해주어 고맙소.”

“못 할 이유야 없지요. 집안과의 불화라면 저도 뭐.”

당화서가 피식 웃었다.

조부고 친족이고 할 것 없이 죄다 폐인으로 만들어 축출했으니 가정 내의 불화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람에게 당화서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럼 일단 그리 알고, 바로 가시지요. 회의가 남았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날의 회의가 끝난 후, 맹 안에 작게 모셔져 있는 불당에 일운이 들어섰다.

먼저 온 불성 원명이 눈을 감은 채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멈췄다.

일운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왔느냐?”

“예.”

일운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만남은 일운이 청한 것인 까닭이다.

속에 차오른 번뇌.

무를 향한 갈망과 그사이 비워야만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일운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하여 곧장 입을 떼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조급해하고 있구나.”

원명이 먼저 말했다.

“무엇이 두려운 게냐?”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노인의 것이라 하기엔 깊은 울림과 청아함이 묻어났고, 아이의 것이라기엔 세월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일운은 언제나 생각했다.

원명의 목소리엔 참 묘한 공력이 깃든 것 같다고.

“…무(武)를 향한 집착이 떨어져 나가질 않습니다.”

“투기가 문제더냐.”

“향상심이 속에서 사라지질 않습니다.”

“욕망이 문제더냐.”

“강해지고 싶습니다.”

“인간됨이 문제로구나.”

원명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일운은 의아해져 그를 바라봤다.

“…제자가 우둔하여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듯합니다.”

“번뇌는 인간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더냐. 운아, 너는 당연한 것에 괴로워하고 있구나.”

“부처가 되기 위해선 무욕해야 한다 이르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욕이 아니란다.”

원명이 일운을 바라봤다.

그는 깊게 가라앉는 눈으로 말했다.

“무욕(無慾)이 아닌 무감(無感)이다. 차오르는 욕망을 흘려보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게지.”

원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내 오랜만에 수련에 어울려주마.”

순간, 일대의 공기가 돌변했다.

원명은 그저 불공을 드리는 자세로 서 있을 뿐일진대, 일운은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위기감과 압박감을 느꼈다.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느냐. 내게 보여보거라.”

일운은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주먹을 뻗고 싶었고.

“…가르침을.”

그 감정에 몸을 맡겼다.

다음화 보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