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66화 (166/334)

EP.166 십육장 - 집결, 회의 (8)

* * *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서예는 그 이유를 되새겨봤다.

‘분명 독봉을 피해 거리로 나왔었지.’

괴룡이 회의에 불참한 것에 잔뜩 화가 난 독봉이 식당에서 독기를 줄줄 흩뿌려댔다.

일운과 혜운이 자리를 뜨자마자 남궁진천이 자신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라고 묻자, 남궁진천이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며 데려온 곳이 이곳이다.

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원.

남궁세가의 숙소 말이다.

“그래, 하오문주라고 하셨소?”

“…예.”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앞, 눈앞에 남궁세가의 가주가 있다.

그는 검왕이나 남궁진천과는 다르게 서글서글한 인상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허허, 우리 진천이가 강호에 나서 이런 인연을 만났다니. 참 기이한 일이오. 그렇지 않소?”

가주가 창성검 남궁운에게 물었다.

남궁운 역시 묘하게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왔다.

“그래그래, 진천아. 둘이 어쩌다 인연을 맺게 됐는지 어디 설명이나 좀 해봐라. 응? 요녀석, 검 휘두르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보이더니…!”

가주와 남궁운의 기색에서 흐뭇함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서예는 깨작깨작 식사를 입에 넣으며 그 표정들을 외면했다.

그런 중이었다.

“손자.”

“예, 조부님.”

“…아니다.”

검왕이 말을 흐리더니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괜히 저 멀리 창밖을 바라보는데, 서예가 보기엔 추억에 잠겨있는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묘했다.

싫으냐 하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럽단 말이다.

꼭 그렇지 않나.

분위기가 무슨 상견례 같단 말이다.

남궁진천을 바라보니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데리고 오고 싶어서 데리고 왔다 정도겠지.

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그래, 우리 진천이가 많이 답답하지요?”

가주가 존대까지 해오는 것에 서예는 불편함을 느꼈다.

“…시원시원하십니다.”

칼질은요.

뒷말을 삼키며 답하자 가주가 심히 흡족해했다.

“녀석, 그래도 사람 대하는 일은 제대로 하나 보구나!”

“가주! 진천이가 그래도 머리는 좋은 편이지 않소!”

“아암, 우리 진천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학업에 뜻이 있었다면 대 학자가 되었을 인재 아니더냐!”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서예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느라 진을 빼야만 했다.

아니, 그 와중에 검왕은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건가.

눈빛은 또 왜 저렇게 우수에 차있는 건가.

뭔가 이상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서예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서예는 곧장 입을 열었다.

“흐, 흑도의 인물이 이리 남궁세가에 초대받아도 될런지요.”

그래, 이게 문제였다.

서예는 엄연한 흑도의 사람이었다.

한데 남궁세가가, 정파의 기둥 중 하나가 자신을 환대하는 게 맞는 건가.

이 상황은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단 말이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우리는 출신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파렴치한이 아니오! 우리 진천이가 마음을 준… 크흠! 하여튼 그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소.”

가주가 기겁했다.

아, 그제야 서예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이리 자신을 좋게 보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인간이 혼인은 할 수 있을까 걱정했겠지.’

아마 반쯤은 포기해오지 않았을까.

남궁진천은 이미 혼기가 차 있는 상태인데, 이 인간 성격상 그간 여자에 관심을 두진 않았을 듯하다.

가주는 속된 말로 똥줄이 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녕 남궁세가의 핏줄이 끊길까 걱정했을 수도 있고.

‘누구라도 좋은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중, 마침 자신이 나왔다.

흑도라곤 하나 하오문 정도면 그리 인식이 나쁜 편까지는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서예는 본인이 꽤 어여쁜 편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환대를 받는다는 것은.

“…묻었다.”

남궁진천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서예의 소매에 묻은 밥알을 떼어냈다.

그 순간 가주와 남궁운의 입에서 기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속삭였다.

“가주, 이 녀석이 그래도 제 여인은 챙길 줄 아나 보오.”

“아암, 그래. 생각해보면 우리 진천이가 소아한테만은 참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더냐.”

“그래, 저게 진짜 남자지.”

다 들린다.

서예는 남궁진천과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다짜고짜 납치부터 시행하고 심문을 하겠다 길길이 날뛰었었지.

“진천이가 그래도 여인에겐 따뜻한 남자인 게요!”

절대 아닙니다.

서예는 또 말을 삼켜야만 했다.

*

묘하게 불편하던 식사자리가 끝났다.

정원으로 나온 서예는 더부룩한 속 탓에 배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런 중이었다.

“음?”

나무 뒤에서 누군가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져, 서예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만두머리가 인상적인 어여쁜 여아가 있었다.

입고 있는 비단옷이 꽤 상등품이다.

매무새나 꾸민 정도도 어른의 손을 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늦지 않게 서예는 알 수 있었다.

‘아, 검룡의 남매.’

남궁세가의 금지옥엽 남궁소아.

하오문의 정보망에 있는 이름이었다.

서예는 피식 웃었다.

“거기서 뭐하니?”

남궁소아가 움찔 떨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귀여워라.’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이 아주 순진해 보여 묘하게 호감이 갔다.

남궁진천과 같은 핏줄이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다.

“이리 와보련?”

서예가 손짓하자 남궁소아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서예는 그것을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남궁소아가 다가오자 품에서 간식거리를 꺼내 남궁소아에게 건넸다.

“흐에에…!”

남궁소아가 뺨을 붙잡으며 홍조를 띄웠다.

“주는 거야?”

“그럼, 너 주는거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자 남궁소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곤 한입에 간식을 넣곤 행복한 얼굴을 만들었다.

“너도 무한에 왔나보구나.”

“나 알아?”

“그럼, 검룡의 여동생이 아니니.”

“검룡?”

“너희 오라버니.”

“웅! 나는 오라버니의 여동생이야!”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며 말한다.

서예는 그 꼴이 참 어여뻐 보여 남궁소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라버니 보러 온 거니?”

“아니! 서방님 보러!”

서방님이라, 서예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세가에 이 애만 한 직계가 있던가?’

먼저 떠오르는 가능성은 그것.

하지만 서예가 알기로 남궁소아와 비슷한 나이대의 직계는 없었다.

그나마 가장 나이대가 가까운 이조차 하북팽가의 팽지월인데, 그치는 여아인데다가 나이도 15살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서방님이 누구니?”

호기심이 차올라 묻는 순간이었다.

“소아야.”

남궁진천이 나타났다.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오라버니!”

남궁소아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남궁진천에게 안겼다.

남궁진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궁소아를 안아들곤 등을 두들겼다.

“왜 여기 있느냐.”

“언니야랑 놀았어!”

남궁진천의 시선이 서예에게 닿았다.

서예는 작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셨어요.”

“가자.”

“어딜요?”

“용봉단의 전각으로.”

아, 돌아갈 생각이구나.

하긴 지금쯤이라면 당화서도 진정했을 것이다.

‘묘하게 눈치를 잘 본단 말이지.’

서예는 그리 생각하며 일어섰다.

“그럼 소아랑은 헤어져야겠네.”

“언니야 가?”

“응, 나는 너희오라버니랑 같이 가야할 것 같아.”

“그럼 나도 갈래!”

“응?”

“나도 갈 거야!”

남궁소아가 신나서 외쳤다.

서예는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상관없다. 다시 데려오면 될 일이니.”

정말 눈곱만큼도 상관이 없는 듯했다.

서예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남궁소아의 미소가 짙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라버니가 좋나?’

서예는 그런 생각을 했고, 늦지 않게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용봉단의 전각까지 오는 길은 별 일이 없었다.

그저 남궁소아를 안은 남궁진천과 함께 걷다보니 시선이 몰렸다 정도.

그조차도 남궁소아가 ‘오라버니!’하고 크게 외친 덕에 오해의 시선이 있진 않았다.

꽤 색다른 경험이었다.

서예의 감상은 그게 끝이었고, 그랬던 만큼 마침내 돌아온 용봉단의 전각에서 서예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서방님!”

남궁소아가 펄쩍 뛰어내려 한 방향으로 내달린다.

그 끝에 있는 것은 목리원이었다.

‘…아?’

남궁소아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긴, 용봉지회가 안휘에서 열렸으니 목리원을 이미 한 번 봤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목리원이라하면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소름이 끼치도록 잘생긴 인간이다.

그에게 별 마음이 없음에도 한 번씩 시선이 마주치면 절로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의 외모인데 아이에겐 어떻겠나.

아마 아이의 작은 세계에서 목리원은 하늘이 점지해준 서방님처럼만 느껴졌을 것이다.

‘어리긴 어리구나.’

서예가 피식 웃었다.

그런 중 남궁소아를 발견한 목리원이 환한 얼굴을 만들었다.

아이를 반가워 해주는 걸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아! 소아구나!”

“서방님!”

“나는 네 서방님이 아니란다!”

목리원이 환하게 웃으며 남궁소아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미안하구나! 너는 너무 어려서 내 아내가 될 수 없단다!”

세상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남궁소아가 벙쪄선 얼어붙었는데, 목리원은 그게 신경도 안 쓰이나 보다.

“아! 그리고 나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니 너는 가능성이 없단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려무나!”

남궁소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확인사살까지.

세상에 저렇게 악독한 살귀가 있을까 싶다.

서예가 안쓰러움이 가득 묻은 눈으로 남궁소아를 바라봤다.

“어쩜….”

탄식을 흘렸는데, 남궁진천을 바라보니 그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동생이 차였는데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솔직히 묵룡이 아깝다. 소아는 머리가 나빠서 좋은 집안으로 시집보내는 게 맞다.”

남매라는 것은 원래 이렇게 서로에게 잔인한 것인가.

서예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런 중이었다.

“음? 무슨 소란입니까?”

당화서가 나타났다.

서예는 갑자기 흥미진진해지는 기분이었다.

‘소아가 어떻게 나오려나?’

그래도 서방님이라며 좋아하는 상대가 마음에 둔 사람이 나타난 상황이다.

지금 환하게 밝아지는 목리원을 얼굴을 보니 소아도 대충은 눈치챘을 터다.

“소저!”

목리원이 주인님을 만난 강아지처럼 당화서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꼬리가 있다면 빙글빙글 돌고 있지 않을까.

당화서가 웃었다.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검룡 형의 동생이 왔소. 자, 여기 남궁소아라고 하오!”

남궁소아가 멍한 얼굴로 당화서를 바라봤다.

“서방님?”

하고 말하는데, 순간적으로 당화서의 눈썹이 들렸다.

이내 당화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목 소협은 이런 어린아이와 혼인을 약속하신 겁니까?”

“아,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하는 순간, ‘턱’하고 목리원의 말문이 막혔다.

목리원이 낑낑대며 당화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남의 애절한 표정이라, 나름의 맛이 있었다.

방관자의 입장에 있음에도 다 설레는 기분이었다.

당화서의 입꼬리가 삐뚤삐뚤 솟았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심호흡을 하는 것 같다.

“…뭐,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요.”

“지, 진짜요!”

“일단 갑시다. 걸왕께서 목 소협을 찾고 있어요.”

당화서가 목리원의 팔을 붙잡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우아한 미소로 남궁소아에게 말했다.

“자, 미안하구나. ‘서방님’ 놀이 중에 방해해서.”

잔인하여라.

놀이라는 말에 남궁소아가 격침당했다.

당화서와 목리원이 떠났다.

“소아가 걱정이군. 눈을 좀 낮춰야 할 텐데 주제에 안 맞게 너무 얼굴을 따져.”

그런 말할 시간에 가서 위로나 해주는 게 어떨까요.

서예는 남궁진천의 냉철한 평가에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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