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4 십육장 - 집결, 회의 (6)
* * *
목리원은 가만 회의장을 둘러봤다.
‘이들이….’
그날 혈사의 끝에 자리했던 이들.
하나하나가 초월에 달하는 현 중원의 절대자들.
“거지! 오랜만이군!”
모용걸이 마일석에게 인사했다.
마일석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건지 무시로 일관했고, 그에 모용걸이 껄껄 웃으며 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제갈벽이 옆 자리에 앉은 모용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아암! 그럭저럭 지냈다!”
“시끄럽다.”
남궁혁이 팔짱을 낀 채로 읊조리자 모용걸이 그의 등을 팍팍 쳤다.
“자네도 오랜만일세!”
남궁혁의 인상이 구겨졌다.
험악한 기파가 새어 나오려는 순간, 사백운이 눈짓으로 제지했다.
그 광경을 보던 목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 형은 어딜 간 게지?’
제갈벽의 옆엔 제갈산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한데 그는 이 회의에 불참할 생각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오대 세가의 자리에 앉아있던 당화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제갈 형.’
아무쪼록 목숨만큼은 붙어있길 바란다.
목리원은 이번엔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은 도왕 진건이 앉아있는 자리였는데, 옆자리엔 염소소가 복면을 쓴 채로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었다.
얼굴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이제….’
다음으로 목리원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지근거리였다.
구파가 앉아있는 자리.
멀지 않은 곳에 불성 원명과 일운이 있다.
그 옆으로는 아미파의 장문인으로 보이는 노파와 거무죽죽한 낯의 혜운이 있었다.
혜운의 이마는 조금 붉은 기가 올라와있었는데, 아무래도 딱밤을 맞은 것 같았다.
분위기에 맞지 않게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 중이었다.
“혀, 형님?”
마일석의 옆자리.
복코가 인상적인 거지가 마일석을 불렀다.
그는 마일석이 자리를 내려놓은 후 개방의 방주 자리를 이어받은 노인이었다.
개방주라는 직위에도 불구하고 딱히 위엄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는데, 목리원은 그것에 ‘참 개방답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왜.”
마일석이 답했다.
개방주는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이 묵룡은 왜 여기 서 있는 것인지….”
목리원의 몸이 조금 굳었다.
마일석은 코웃음치며 개방주에게 말했다.
“이유가 있어서 세워둔 것이니 참견 말거라.”
개방주가 바로 깨갱했다.
목리원은 그 속에서 마일석이 개방에 어떤 의미인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스스로의 입으로 그리 칭찬하던 입지가 거짓은 아닌 모양새였다.
와중 목리원이 떠올린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 개방패!’
강서성 산골을 나설 적 마일석에게 받은 패가 있었다.
이 패가 있다면 개방에 한 번쯤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말하며 쥐여 주었는데, 목리원은 이제껏 그 패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다.
당연 당화서가 있는 까닭이다.
어지간한 일은 당화서가 다 처리하니 개방의 도움까지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으음….’
잃어버리진 않았을 터다.
용봉단에 입단하며 숙소의 보관함에 잘 모셔둔 기억이 있으니.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하는 괜한 불안감이 목리원의 속에 차오르던 중이었다.
“바로 본제로 들어가겠소.”
사백운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공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직전까지 투닥대던 오대세가의 일원들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구파의 일원들도 심지어 염소소에게 말장난을 건네던 진건까지.
모두가 표정을 굳힌 채 사백운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혈사 이후 정확히 18년이 지났소. 그간의 강호는 참 평화로웠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소.”
사백운이 회의장 한 가운데 선 채로 힘 있는 목소리를 이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그날 흘린 피는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에 취해있었는지도 모르겠소.”
사백운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짧은 순간 목리원에게 닿기도 했다.
“…그래, 취해 있었다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겠구려. 이리 마교의 주구들이 중원 땅에 숨어든 것도 몰랐으니 말이오.”
누군가가 침음을 흘렸다.
사백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오. 이것은 온전히 맹주라는 직위에 있음에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내 탓이오. 마교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나의 부덕으로 인해 희생당한 것이라 말하는 것도 옳겠지. 크게 책임을 통감하오.”
목리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그것들이 노리는 것은 접니다.
목 끝까지 말이 차올랐으나 차마 내뱉을 수는 없음이었다.
그런 중에도 사백운의 말은 이어졌다.
“하나 멈춰서 있을 수는 없소.”
목소리에 결연함이 깃든다.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가 되어 외적을 물리쳐야만 하오. 그것이 약속이었으니까. 또한 그것이 우리가 지킨 강호를 후대에도 물려줄 방법이니까.”
목리원은 입술을 앙 물었다.
“천마신교와의 전쟁을 할 것이오. 이것에 반대하는 자가 있소?”
그 누구도 반대를 말하지 않았다.
“그럼 빠지고 싶은 이들이 있소?”
그 역시,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함께 할 이들은 손을 들어주시오.”
전원이 손을 들었다.
이 회의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반목하던 구파와 세가도, 그리고 그 시절 혈사를 끝내고 은퇴한 이들도 다시, 전장에 나서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지켜냈던 것을 다시 한번 지키기 위해서.
사백운의 얼굴 위로 주름이 깊어졌다.
“그렇구려.”
이윽고 떠오르는 것은 희미한 미소였다.
“그 누구도 등 돌리지 않는구려.”
그것은 분명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는 미소였다.
“고맙소. 이리 나서주어서.”
사백운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어진 한 차례의 심호흡.
사백운이 기색을 가다듬곤 눈을 떴다.
“그럼 세부 사항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보겠소.”
당화서의 말을 빌리자면, 꽤 지독한 아귀다툼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
중원의 미래를 위해 하나가 되어 외적을 물리친다.
좋은 취지였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만, 모든 이가 그 일을 앞에 두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이나 언제나 그랬듯 전쟁이란 것은 그 이후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 종류의 거사였다.
즉, 병력의 배치나 작전에서의 지휘권을 둔 아귀다툼은 예견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곤륜은 이번 사태에 입은 피해가 막심하오. 외람되오나 많은 무인을 지원할 수 없소.”
“이해하오.”
“화산은 이십사수매화검을 지원하겠소. 그 밑, 이대 제자들과 장로들이 함께 참전할 것이오. 화산의 무학은 무인끼리의 호흡이 중요한 면이 있소. 독립적인 조를 짜고 싶소.”
“그리 말하면 모든 문파와 세가가 독립적인 조로 짜여야 하오. 불가한 요청이오.”
“하나…!”
“불가하다지 않나. 장문인, 그 이상 추해지지 마시게.”
화산파 장문인의 말을 하북팽가의 가주가 끊어냈다.
그는 날개짓을 하는 새처럼 휘어진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화산파 장문인이 이를 갈았다.
그 곁의 화검, 일전 청룡비무회에서 목리원과 맞붙었던 화산의 대제자는 어색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당화서는 그 모든 상황을 면밀히 파악했다.
‘당문은 약하다.’
약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문에 남겨둔 것은 그나마 믿을 만한 수족들.
즉, 병력을 부리게 된다면 그들을 희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다른 말을 할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당문은 자원 가능한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제발 화살이 이쪽으로 돌아오지만 않기를.
당화서는 그리 간절하게 빌었고, 결과는 조금 처참했다.
“당문은 얼마나 많은 병력을 지원할 수 있소?”
종남파 장문인의 물음이었다.
당화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외람되오나, 현 당문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부덕한 일을 저지른 이들을 모두 쳐내며 가용할 수 있는 무인이 십분지일도 남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여….”
“상황은 모두가 어렵소.”
“…알고 있지요.”
함께 하겠다 이르고도 쏙 빠져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다.
당화서는 머리를 굴렸다.
‘병력지원은 불가.’
이미 무너져가는 집안이다.
여기서 사람을 더 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 뜻을 거절할 수는 없다.’
전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상황, 무엇도 잃지 않고 이름만 올리는 염치없는 일은 당화서로서도 사절이었다.
‘그렇다면.’
계획한 일을 이곳에서 발표해야겠지.
“…당문은 물자 지원을 맡고 싶습니다.”
종남파 장문인의 눈썹이 들렸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자리한 구파와 세가가 모두 당화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게 최선이다.’
생각하며 당화서는 말을 이었다.
“당문의 사업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현 당문의 상황으로선 소화가 불가능한 사업체들이기에 저희 규모에 맞게 한창 땅과 가게들을 팔아치우고 있지요. 그 자금을 전쟁에 대고 싶습니다.”
돈은 많다.
사천당문은 비단 세가라는 이점을 제외하고서라도 독과 약을 제조한다는 특성 탓에 돈이 나올 구석이 많은 세가였다.
그것은 망해가고 있는 지금조차 그랬다.
‘전쟁에 쓸 돈 정도야 얼마든지 보탤 수 있다.’
당장이야 힘들겠지만, 가문의 비전만 품고 있는다면 자금줄은 전쟁을 끝내고 언제든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도 그것을 알 터다.
하지만 거절하진 못할 터였다.
자금 문제라 함은 명문, 특히 구파에겐 꽤 예민한 문제인 까닭이다.
‘구미가 당기겠지. 특히 청성, 점창, 아미.’
같은 사천 땅에 삼킬 수 있는 사업체가 대거로 풀려나는 상황이다.
저들로선 당문의 몇 없는 병력을 지원받겠다고 그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이 달갑지 않으리란 말이다.
‘자, 수락하십시오.’
인력만큼은 지키기 위한 발버둥.
아주 잘 먹혔다.
“…그렇다면 인력의 문제는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점창의 장문인이 나섰다.
이어 청성파의 장문인도 나섰다.
아미의 장문인은 지그시 미소 짓는 것으로 의견을 대신했다.
성공이다.
당화서는 상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근처에 있던 남궁진천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금지의 영물은 잡아 팔아선 안 된다. 그건 아껴… 윽!”
헛소리나 하기에, 당화서는 남궁진천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그 모습을 착잡한 얼굴로 바라봤다.
당화서는 그를 동정했다.
그런 와중이었다.
“그래, 돈 문제야 저쪽이 해결해준다고 하니 슬슬 내 얘기좀 하자.”
마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유의 심드렁하고 신경질적인 얼굴.
회의가 시작하고 내내 조용하던 그가 나선 것에 당연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따로 움직인다.”
“…걸왕, 괜찮겠소?”
사백운이 걱정스레 물었다.
마일석은 말했다.
“찾아볼 것이 있다.”
“찾아볼 것이라 함은….”
“이 내가 말이다. 그래도 개방의 전 방주 아니더냐.”
“…그렇긴 하오.”
“냄새가 난단 말이다. 왜인지 마교의 이런 움직임 뒤에, 지난 혈사가 관련되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아.”
곳곳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거는 있소?”
“감이다. 내가 이 강호의 정보를 긁어모으면서 체득한 감.”
마일석의 말엔 묘한 힘이 담겨있었다.
단순히 직감에 기댄 개인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함에도, 그의 말에 담긴 힘 탓에 그것이 아주 타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나는 따로 움직이겠다.”
마일석이 목리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 제자 놈이랑.”
목리원이 바짝 굳었다.
긴장한 낯이었다.
당연, 이 상황과 저 맥락 없는 말에 정적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어….”
비교적 상식인인 남궁세가의 가주가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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