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3 십육장 - 집결, 회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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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모인 사성육왕 중 이제 오지 않은 것은 모용세가의 태상가주인 권왕(拳王) 모용걸이 끝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리 주변이 시끄럽건만, 진짜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번 회의는 사성육왕만이 오는 회의가 아닌, 중원 무림의 모든 유력 문파가 다 모이는 회의인 까닭이다.
“남궁세가는 가주님이 늦게 오시는 게 맞습니까?”
“맞다. 가주께선 가문의 일을 다 처리하고 오시느라 시일이 더 걸린다 하셨다.”
“좋습니다. 백봉, 아미파는 어찌 되었습니까?”
“…내일 도착이시라네요.”
용봉단의 단주 집무실.
남궁진천은 평온한 낯이었고 혜운은 죽상이었다.
당화서는 그들의 보고를 끝으로 용봉단 몫의 일을 다 끝맺어 안도할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회의 준비도 끝이구나.’
애초에 회의가 시작되면 각자 소속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단인지라 일이 몰리지 않은 게 주효했다.
당화서는 그저 단주로서 단원들의 소속만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좋아요. 두 사람 다 나가 보십시오.”
“알겠다.”
“수고하세요오….”
터덜터덜 두 사람이 나가자 당화서는 바로 새 서류를 꺼내 들었다.
빠르게 붓을 놀려 기입하는 것은 사천당문의 가주로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었다.
‘애초에 장로고 뭐고 다 갈아엎은 판이다. 세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약하겠고… 회의 내에서의 입지는 기대하기 힘들겠지.’
딱히 그 사실이 아프진 않았다.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트린 가문인 만큼 이제와서 그런 일로 후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자리만 지키다 나온다.
그것을 위해 당화서는 회의에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상황이나 각 가문 유력 인사들의 명단을 달달 외웠고, 집중이 깨진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소저! 안에 있소?
문 밖에서 목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화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늦은 시간엔 어인 일이실까.’
벌써 잠들어야할 시간에 이리 찾아온 것에 의문이 차올라 당화서는 말했다.
“예,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렸다.
목리원은 품에 삶은 감자를 끌어안은 채 헤헤 웃고 있었다.
“시장하실 듯하여 준비해왔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목리원이 감자를 내밀었다.
당화서는 당황을 토해내며 그것을 받곤, 이내 ‘푸흡!’ 하고 웃어버렸다.
“감사합니다. 마침 시장하던 참이었습니다.”
어찌 이리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할까 싶다.
목리원은 의자를 끌고 와 당화서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어떻소. 회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어여쁘다.
당화서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예, 저야 크게 의견을 제시할 이유가 없는 만큼 흘러가는 상황만 파악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고생이시겠구려. 나는 이런 일은 도통 머리가 아파서 못할 것 같소.”
“목 소협은 평생 이런 일에 신경 쓰실 일이 없을 겁니다.”
제가 다 맡아서 해드릴 테니까요.
라는 의도로 무심코 말해버린 당화서가 아차 했다.
목리원의 고개가 기울었다.
“음?”
“…아니, 말실수를 했군요.”
마일석의 허락을 받은 것에 들떠버린 걸까.
당화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보다 목 소협도 이번 회의에 참석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걸왕님의 제자 신분으로 가는 것 말이오?”
“예, 따로 준비할 것은 없으십니까?”
목리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뭔가 떨떠름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것 때문에 고민이 있어서 그렇소.”
“음?”
“사실 말이오. 거짓말을 하는 거지 않소. 다름 아닌 스승과 사문에 대한 거짓말 말이오.”
목리원이 뒷목을 긁었다.
당화서는 단번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목리원이 그간 보인 스승에 대한 애정이 좀 깊었던가.
목선오는 죽어야 했을 목리원을 살려주고 무공과 정도를 가르친 인물이다.
또한 사랑을 가르친 인물이다.
부모이자 스승이자 은인.
그런 사람을 저버린다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라고 한들 목리원에겐 부담스러운 일일 테다.
하지만 이 경우에선 당화서도 마일석의 의견에 동감했다.
“목 소협.”
“말하시오.”
“제가 이런 말을 드려도 될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목리원이 눈을 끔뻑였다.
당화서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감정을 조금은 억눌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뭣보다 이 강호를 살아감에 뒷배가 필요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목리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당화서는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
“…제 경우로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사천당문. 저는 이 집안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등에 이고 있으면 따라오는 이득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은 제 개인적인 감정으로 털어내기엔 꽤 큰 이득입니다.”
무와 협, 의와 도리를 중시하는 백도 무림이라 한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사회다.
가진 힘과 배경이 그 사회 안에서 개인을 규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임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것이지요. 목 소협의 경우로 말해보자면, 이런 거짓이 검성께 더욱 이로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목 소협의 안전을 걸왕님께서 보호해주는 상황이니, 목 소협을 사랑하는 검성께서도 안심하시지 않겠습니까.”
부드러운 어조로 이어간 말에 목리원이 생각에 빠졌다.
여전히 납득한 기색은 아니다.
그럼에도 목리원은 웃었다.
“…그건 알고 있소. 그래, 그게 옳겠지.”
“괜한 참견이었다면….”
“아니오. 좋은 지적이었소.”
목리원이 얼굴을 밝게 만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소! 일단 밤이 늦었으니 슬슬 가봐야겠소! 소저도 쉬엄쉬엄하고 주무시오!”
목리원은 그리 말하곤 집무실을 나섰다.
당화서는 작게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과정에서 무림맹이 더욱 번잡해지고 그에 따라 곳곳에서 사고가 일었지만, 그것들이 당화서와 목리원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이르자면 딱 그 정도의 일이라 말하는 게 좋겠다.
“구파와 세가는 사이가 참 안 좋구려.”
구파와 세가의 사이가 안 좋다.
현 무림맹에서 일어나는 여러 마찰은 대부분 그런 성질에 기인한 것들이었다.
어느 문파와 어느 세가가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이 번지며 비무대가 남아나질 않게 됐다.
당사자들이야 그것들이 아주 골이 아픈 일이겠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선 재밌기만 한 것이다.
그렇게 꽤 남다른 구경거리가 있었던 준비 기간이 끝나고, 마침내 회의 당일이 되었다.
“저 사람이 권왕입니다.”
당화서의 말에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회의 당일이나 되어서야 무림맹에 도착한 것은 모용세가의 인사들이었다.
하나같이 기도가 날카롭고 포악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개중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권왕 모용걸.’
목리원이 스스로와 비교해보면 머리 하나 정도는 차이가 나는 거구였다.
비단 키가 큰 것 뿐만 아니라, 소매를 뜯어낸 무복 탓에 보이는 근육 또한 흉악했다.
주름진 얼굴의 인상은 호랑이 같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칼은 꼭 갈기 같다.
무엇보다 기도.
‘숨이 턱턱 막히는구나.’
분명 초월에 달하면 스스로의 기도를 숨길 수 있게 될 텐데, 모용걸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는지 과시하듯 기도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것에 그를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었다.
목리원은 과거 마일석이 일러준 그에 대한 것을 되새겼다.
-권왕? 미친놈이다. 주먹질에 단단히 미친놈이지. 일단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주먹부터 나간다. 마음에 드는 놈이 있어도 주먹부터 나간다.
-…보이는 사람은 다 때리는 건가요?
-그 말이 딱 맞다. 워낙에 성격이 불같은 놈인데다가 싸우기는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마 그놈이 조금만 운이 안 좋았다면 비무 중 목숨을 잃어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대, 대단하신 분이네요.
-운이 대단한 놈이지.
마일석이 평하기로 이 강호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내.
그는 목리원의 생존에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었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기껏 혈사를 끝냈는데 이걸 살려두면 뒷맛이 찝찝하다. 권왕 놈은 그런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딱히 네놈에 대한 사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찝찝함이 이유인 게다. 그마저도 순간적인 감정이지. 그 단순한 놈은 이제 네 존재조차 잊고 있을 것이다.
꽤 씁쓸한 이유다.
하지만 사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터.
목리원은 우울한 생각은 모두 지우고 모용걸을 이어 바라봤다.
“권왕을 뵙습니다.”
그를 마중 나온 백검대주 권표월이 포권을 취했다.
모용걸이 멈춰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오, 범생이.”
모용걸이 씨익 웃자 누런 이가 드러났다.
“꽤 봐줄만 하게 자랐구나.”
“과찬이십니다.”
권표월이 어색하게 웃자 목리원이 깜짝 놀라 말했다.
“세상에! 소저! 백검대주님이 권왕님과 면식이 있는 사이인가 보오!”
“예, 꽤 유명한 얘기입니다. 백검대주님이 혈사가 있던 때 권왕님의 휘하 부대에서 싸우셨었지요.”
“그, 그렇구려…!”
목리원이 한껏 호들갑을 떨며 말하자 당화서가 쿡쿡 웃었다.
와중 권표월과 모용걸의 대화가 이어졌다.
“좀 더 회포를 풀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회의가 곧이라 먼저 그곳을 찾으셔야 할 듯합니다.”
“으응? 내가 늦었나?”
“회의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늦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럼 된 거지 뭘. 바로 가자꾸나.”
모용걸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몸이 다부진 중년의 사내가 함께 움직였는데, 당화서는 그를 현 모용가의 가주라 말했다.
“가주라….”
목리원은 저 가주와 비무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내가 이기는구나.’
백이면 백, 일부러 지려고 하지 않는 이상 목리원의 필승이었다.
가주씩이나 되어서 무력이 모자란가?
‘아니다.’
그만큼 자신이 강해진 것이다.
오대세가의 가주와 맞붙어도 승기를 점칠 수 있도록, 이 강호초출행은 목리원에게 많은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
뿌듯하다면 뿌듯한 일이었다.
‘더 정진해야겠구나.’
언젠가, 용봉지회까지만 해도 초절정이던 창성검 남궁운을 보며 벽을 느꼈다.
필패를 떠올려야 하는 수준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벌써 따라잡은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초월도 따라잡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이 곧 상승심이 되어 목리원의 속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목 소협?”
“아니, 아니오.”
목리원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갑시다.”
목리원은 당화서를 이끌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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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보다도 넓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리한 회의실은 넓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현 강호를 움직이는 거물 중의 거물들이었다.
구파와 세가의 수장들, 그리고 곳곳에 포진해있는 사성과 육왕… 아니, 이젠 삼성과 오왕이 된 이들.
그 한가운데 선 사백운이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모였구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온화한 기색이 간데없이 사라진 굳은 낯이었다.
“대회의를 시작하겠소.”
중원의 미래를 결정할 회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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