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3 십오장 - 임무, 추격 (3)
* * *
청해를 이제야 절반 정도 지났을 즘이었다.
내각주 견궐은 행렬의 앞에서 빠르게 내달리다 돌연 걸음을 멈췄다.
“내각주님?”
청룡대주 기태운이 물었으나 견궐은 입을 꾹 다물며 전방을 바라보기만 했다.
끈질긴 추격을 내내 이어 이제야 반나절 거리 정도로 좁혀진 것이 느껴진 상황.
견궐은 초월지경에 오른 마인의 마기와 함께, 하나의 기운이 더 느껴지는 것을 포착한 것이었다.
“여기 계셨군.”
라고 말하며 견궐은 숲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내각주님?”
“전투가 코앞이다. 다들 내공을 회복하도록 하라.”
“추격은….”
“괜찮다. 막아줄 분이 계시니.”
견궐은 그리만 말하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내내 추격과 감지에 내공을 쓰느라 지금 상태로 전투에 돌입했다간 자칫 ‘그’의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이었다.
선발대의 입장에서야 도대체 영문을 모를 소리다.
하나 견궐이 허튼 말을 하는 사내가 아님은 알기에 기태운은 말했다.
“운기조식을 시작하라! 빠르게 내공을 회복한다!”
그것은 목리원의 일행이 도착하기까지 사흘이 남은 시점의 일이었다.
*
위광천은 골목을 틀어막은 채 바닥에 앉아있는 한 사내를 바라봤다.
따라오던 다른 마인들은 모두 위광천의 뒤에 멈춰 서있는 상황.
그 누구도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지금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초월(超越)의 무인이었으니.
“…누구냐.”
위광천이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중년과 노인의 경계에 있는 사내였다.
검은 머리 사이로 흰색 새치가 절반을 덮은 말총머리.
입은 흑색의 무복은 온통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남루했고, 인상은 꼭 한량의 것처럼 나른하고 뺀질거리는 형태였다.
사내가 품에 도를 끌어안은 채 입꼬리만 비틀며 웃었다.
“진건.”
그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요 근처에서 유랑이나 하던 중에 거슬리는 기운이 느껴져서 따라와 봤지. 한데 말이야. 어찌 이 중원 땅에는 있어선 안 될 썩은 내가 폴폴 나는 게 아니던가.”
위광천은 짜증이 묻은 숨을 내쉬었다.
‘진건.’
위광천이 아는 이름이었다.
그는 중원이 혈사라 이르는 전쟁에서 단천화의 목을 베기 위해 앞장 서서 나섰던 전대의 고수.
사성육왕(四星六王)의 도왕(刀王) 진건이었다.
“그런데 얼씨구? 웬 마인 놈의 새끼들이 여기에 있을까?”
진건이 끅끅 웃으며 입에 물고 있던 이파리를 뱉었다.
그리고 스르릉, 하며 도를 뽑아냈다.
“남의 땅에 왔으면 땅 주인한테는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마인 놈의 새끼들은 하여튼 예의범절이 없다 이 말일세.”
위광천은 상황을 파악했다.
‘수적으로는 우세하다.’
하나, 한정적인 우위일 뿐이다.
이것은 당장 갈수록 빠르게 추격해오는 맹의 무인들이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그새 엎어질 우위였다.
다행인 점이라면 그 무인들이 지금 걸음을 멈췄다는 것 정도일까.
‘이 사내를 믿는 것이겠지.’
아마 전력을 회복하려 드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어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협공으로 그 사이에 뚫고 나간다?’
아니, 그랬다간 도리어 이쪽의 피해가 막심해진다.
상대는 도왕 진건이다.
사성과 육왕 중에서도 검성과 검왕 다음으로 치는 강자 중의 강자.
초월에 오르지도 못한 이것들에게 돌격을 이르는 순간 순식간에 그의 도에 썰려 나갈 게 분명하단 말이다.
위광천은 그것을 고려해 판단했다.
‘홀로 막는다.’
차라리 마인들이 도주할 시간을 번 후, 진건이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지면 따라 도주하면 될 터다.
이제까지 마인들과 맞춰 움직여주느라 마기가 꽤 비축되었다.
약기운도 어느덧 다 사라진 만큼 수를 나누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대충 반나절 정도의 거리. 한 시진 안에 끝낸다.’
“도주해라. 사방으로 흩어져 먼저 신교로 향한다. 그곳에 지원을 요청하라.”
위광천의 말에 패웅추가 답했다.
“소교주님?”
“방해되니까 꺼지라는 말이다.”
이어 내뱉는 말은 전음입밀을 통한 것이었다.
[교주님께서 폐관을 깨셨다는 말인즉슨, 신교의 장로들도 함께 그곳을 나왔다는 것일 테다. 그들이 직접 와야 한다.]
교주가 폐관에 든 지난 25년, 하나하나가 초월에 달하는 신교의 진짜 전력인 장로들 또한 교주의 폐관실 앞을 지키기만 했다.
그들 중 둘만 데려오더라도 청해를 빠져나가는 일은 아주 쉬워질 터였다.
시간을 버는 것?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곳의 초월, 뒤 따르는 초월.
상대가 둘이긴 하나 넓은 청해를 쏘다니며 도주한다면 보름은 족히 시간을 끌 수 있을 터였다.
“가라!”
위광천이 외치자 마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존명!”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순간까지 끅끅 웃으면서 지켜보던 진건이 나섰다.
“마인치곤 좋은 상관이군! 부하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말을 내뱉으며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허공을 긋는다.
마치 공간을 찢어발기는 형상으로 쏘아져 나간 기파가 사방을 점하기 시작했고, 그것에 위광천은 진각을 밟았다.
콰아아아아앙!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넓은 범위에 마기를 터뜨리는 수를 써서 진건을 막은 위광천이 앞으로 나섰다.
“거 발악이 심하군! 얼마 전 만난 기녀가 생각나! 앙칼진 맛이 아주 일품이었단 말이지.”
진건이 도 위로 기파를 뭉쳤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회전시켰다.
녹색의 기파가 압축되고 회전하며 점차 성난 기세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자! 문제일세! 그 기녀가 어찌 되었는 줄 아나?”
강기(罡氣)다.
진건은 미소를 진하게 만들며 도를 뻗었다.
“결국엔 밑에 깔려 앙앙대기 바쁘더군! 꼭 지금부터의 자네처럼 말일세!”
위광천은 달려드는 그를 마주하며 몸 위로 마기를 덧씌웠다.
마기가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다, 이내 고요히 가라앉았다.
“헛소리.”
꽈아아아아앙!!!
도와 권이 충돌하며 일대가 폭발에 휩싸였다.
*
도왕 진건.
그 이름을 표하기에 많은 단어가 필요할까.
강호 무림은 그를 딱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
한량이라고.
진건은 출신지가 어디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사내다.
그리고 고향 땅이랄 것조차 두지 않은 사내다.
그는 발걸음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사내였고,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 해서든 해내고야 마는 괴인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일 터다.
기막힌 우연이리라.
기루에서 열 명의 기녀와 잠자리를 하고도 돈을 내지 않은 일로 도망치던 진건은 마침 복잡한 머리를 식혀줄 상대가 나온 것에 아주 기꺼운 마음을 토해냈다.
아무렴, 살아있는 목적이 계집질과 쌈박질인 진건에게 이보다 기꺼운 일은 없었다.
“거 조금 더 발악해보시게!”
‘꽈아아아앙!’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전해진다.
이름 모를 초월의 마인이 이를 짓씹으며 또 한 번 주먹을 뻗어낸다.
진건은 느낄 수 있었다.
‘신공(神功)이구나!’
저것은 분명 신공이라 불러 마땅한 상승의 무공이었다.
그의 공력은 다만 초월에 이른 마기만이 아닌 저 신묘한 무공, 그 무공에 대한 이해로 완성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초월의 경지, 젊은 마인인데다가 사용하는 무공은 신공에 달한다. 천마가 여기서 알짱대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답은 하나로군!’
“소천마(小天魔)!”
순간 마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건은 폭소하며 도를 휘둘렀다.
“정답이구나!”
“말이 많다.”
마기가 마인의 손 안에 하나로 뭉쳐진다.
저것은 꽤 위험해 보였다.
진건은 생사를 오가는 위험한 승부에 더욱 흥분이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피를 나눌 상대를 알아야하지 않겠나!”
직후 마인이 뭉친 마기를 머리 위로 들었고, 그것을 땅으로 메다 꽂아버렸다.
오의에 해당하는 무공일 테다.
그 정도의 파괴력이 느껴졌다.
진건은 몸 전체에 강기를 둘러 충격을 상쇄했다.
“크하아아아아!!!”
꽝꽝 울리는 폭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낸다.
그리하며 자신의 생존을 알린다.
이윽고 폭음이 잦아들 즘, 진건은 곧장 앞으로 내달려 달아나려는 듯 주변을 살피는 소천마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가시나!”
손님이 다 오지도 않았다.
저기 멀리 맹의 것으로 보이는 병력이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것이 느껴진다.
그 한가운데 일렁거리는 기운은 분명 견가 놈의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힘껏 놀아봐야하지 않겠나.
견가 놈이 도착한다면 너무 싱겁게 끝나버리지 않겠나.
“자! 더 알려주시게!”
진건은 알고 싶었다.
마인의 이름, 생애, 그런 미적지근한 것이 아닌 이 사내의 한계와 그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수를.
그리하여 완성될 또 하나의 생사결에 붙일 이름을.
꽈아아아앙!!!
또 한 번 강기가 맞부딪친다.
마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다.”
무슨 말일까.
드디어 전력을 발휘하겠다는 것인가.
“좋아! 그럼 나도 한 번 전심전력을 발휘해보겠네!”
탁, 하고 진건이 발을 디디며 양손으로 도를 고쳐쥐었다.
그리고 전신의 공력을 다 도로 밀어넣으며 강기의 회전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진건이 바라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신.”
마인이 그리 조소하더니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달아나버렸다.
“얼레?”
진건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다리에 공력을 집중시켜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기, 기다리시게!!!”
그 애절한 목소리는 마치 집을 떠나는 마누라에게 매달리는 못난 남편과도 같았다.
*
견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채 막지 못하신 건가.’
아니, 아직 추적 중에 있으니 금방 합류해 몰아가면 될 터다.
견궐은 판단을 끝마치고 말했다.
“홀로 가겠다. 마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너희들은 그들을 잡는데 주력하거라.”
“내각주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못할 이유가 무에 있을까.”
견궐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몸에서 푸른색과 흰색이 얼룩처럼 얽힌 묘한 기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간다.”
통, 가벼운 소리와 함께 견궐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제까지 회복한 공력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쏘아져 나간 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저기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추격전을 이어가는 두 사내의 기운을 견궐은 느낄 수가 있었다.
곧장 검을 고쳐 쥐었다.
기파를 검 위로 덧씌운 후, 그것을 바닥에서 하늘을 올려치는 동작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의 독문무공인 파랑(波浪)이었다.
쏴아아아 하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섬전처럼 쏘아진 기파가 거리를 격하고 나아간다.
그리고 추격하는 진건을 넘어, 이윽고 마인에게 도달했다.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마인의 걸음이 멎었다.
초월지경의 무인들 사이에서는 너무 큰 빈틈이었다.
“견가야! 오랜만이구나!”
마인을 곧장 바라보며 신나서 외치는 진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견궐은 짧게 숨을 내쉬며 속력을 더했다.
퉁!
그렇게 멈춰선 마인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간 견궐이 그와 대치하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는 것은 진건.
청해의 어느 숲, 세 초월의 무인이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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