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5 십사장 - 청룡비무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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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절정으로 치닫던 중 흐지부지 끝난 승부였다.
그것은 다만 당사자인 일운 뿐만 아니라 오늘의 승부를 기대한 수많은 관중을 불태우는 행위였다.
왜 아니겠는가.
현공이 마지막 순간 검을 떨구며 했던 말은 누가봐도 거짓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악했다.
비단 그의 남은 공력을 알 수 있는 고수들이 아니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현공은 너무 멀쩡했단 말이다.
당연 그날 하루 객잔은 전날과 다른 열기로 온통 소란스러웠다.
“신성한 비무를 욕보이는 행위요! 암만 선룡이라 해도 이런 행동을 묵과해선 안 되오!”
“옳소! 비무라는 것은 본디 서로의 무학을 겨루어 함께 나아가는 배움의 장이오. 또한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의식의 장이오! 선룡은 그것을 욕보인 것이란 말이오!”
주된 의견은 그랬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에 나서 반박하는 의견도 있었다.
“다름 아닌 선룡이지 않소. 승패에 휘둘려 목매는 행위를 꺼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보오.”
“나도 그리 생각하오. 다만 정도를 넘어서는 검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 아니겠소?”
“어디 그런 걸 무인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오! 말이 안 되오!”
“무인이 아니고 도사지 않소? 못 할 건 뭐요.”
의견이 충돌했다.
무인보다 도사로서의 본을 바로 세우니 그 의지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부류와, 그럼에도 맹의 무인으로서 부끄러웠다는 부류.
본디 이런 상황이라면 몰매를 맞아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그간 현공이 쌓아왔던 평판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지금 말 다했소? 진정 그리 생각한단 말이오?”
“말 다했으면 어쩌려고 그러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불만이라도 있소?”
“있지 그럼! 야! 너 나와!”
“옳지! 잘 걸렸다 이놈아! 어제부터 검룡이 최고니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누가 옳았는지 비무로 정하자!”
“와아아아아!!!”
곳곳 객잔에서 잔뜩 흥분한 무인들이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보는 이들에야 채 연소되지 않았던 열기를 해소할 수 있어서 좋았고 당사들이야 분을 풀 수 있으니 또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
이 상황에 슬픈 것은 그저 부서지는 객잔 기물을 걱정하는 객잔주인들 뿐이었다.
*
일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목리원은 단번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렴, 이해 못할 마음은 아니지 않은가.
목리원은 연공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만큼 일운이 오늘의 비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현공과의 그런 미진한 결말이 얼마나 허탈한지도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나름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일운 스님.”
목리원은 마루에 나와 달을 바라보는 일운에게 말을 걸었다.
일운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눈 밑이 거무죽죽했다.
“…아, 목 시주님.”
싱긋 미소를 짓지만 힘이 없다.
그것이 참으로 걱정되어 목리원은 일운의 곁에 앉았다.
“마음은 좀 괜찮으시오?”
일운은 답하지 못했다.
참으로 쓰라린 모양새로 얼굴을 찌푸리다, 이내 한숨을 툭 내뱉을 뿐이었다.
“…괜찮다면 거짓이겠지요.”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이리 위로를 위해 와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일운은 애써 웃곤 또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목리원은 침묵한 채 그런 일운이 말을 내뱉길 기다렸다.
목리원은 아는 것이다.
이렇게 곁에서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럴 때면 꼭 속에 있는 말을 내뱉어 후련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틀리지 않다는 듯, 이윽고 일운의 입이 열렸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말하시오.”
“저는 불자라는 업을 지고 있음에도 싸움을 좋아합니다.”
목리원은 눈을 크게 떴다.
일운이 그 기색에 웃었다.
“방장님께선 말하셨지요. 아주 꼴통도 이런 꼴통이 없구나. 라고.”
“전혀 그리 보이지 않소. 일운 스님은….”
“원만한 대화를 우선시해왔으니 당연 그리 보이실 겁니다. 실로 제가 잘 처신했다는 말이니 도리어 뿌듯하기까지 하군요.”
“….”
“하지만 근본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직 불자가 되기 전의 저는 부모가 없는 고아였고 틈만 나면 주먹질을 일삼는 폭력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방장님이 저를 좋게 봐 소림에 데려와주시지 않았더라면 흑도의 주먹패나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흑도 주먹패 일운이라.
목리원은 그것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일운의 말을 마저 들었다.
“여하튼, 그리 저를 숨기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곱씹을수록 위대하였고 그 가르침을 받드는 일엔 충만함이 가득했으니 싫을 수가 없었지요. 저는 참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랬구려.”
“그래서 외면하다 보니 이 꼴입니다. 결국 승부의 순간이 오니 저는 어느 순간 불자로서의 가르침보다 승리에 더 집착하고 있더군요.”
일운이 눈을 감았다.
“승부가 미진하게 끝나는 순간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더 싸우고 싶어 온몸이 들끓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부끄럽게도 선룡을 두들겨 패 바닥에 처박고 싶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과격한 말이 지나고 나서야, 일운은 쓰라린 어조로 말했다.
“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의 본성은 여전히 싸움을 좋아하는 왈패의 것이었습니다. 순간을 곱씹다 보니 그 사실이 너무 선명하게만 떠올라 참으로 아파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른 상황이다.
또한 다른 삶이다.
하지만 목리원은 저 말에 깊은 공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천살성.
목리원에게 내려진 살육을 바라는 별은 꼭 저런 마음처럼 매 순간 마음을 어지럽히기만 했으니.
그렇기에, 그런 목리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일운 스님은 틀렸소.”
일운의 고개가 목리원을 향했다.
의아함이 얼굴 위로 묻어있었다.
“예?”
“일운 스님은 틀렸다고 말했소. 나는 그것을 증명할 말을 아오.”
목리원은 웃었다.
이런 고민이 낯설지 않고, 이 상황 또한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이르자면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일운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기에, 목리원은 스승인 목선오가 그랬던 것처럼 일운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묻겠소. 마음속으로 온 세상을 불사르겠다는 악독한 생각을 하는 사내가 있소. 그 사내는 계획을 은밀히 수행하기 위해 일단 주변 평판을 좋게 만들었소. 선업을 연기한 것이오.”
일운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리원은 이어 말했다.
“그는 정말 착실히 연기했소. 물가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식량을 베풀고 사이가 어그러진 부부의 갈등을 풀어주는 등 협객이라 해도 모자랄 선업을, 마음속에 그리 악독한 것을 품고 있음에도 연기했단 말이오.”
목리원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 끝에서 그 사내는 결국 계획한 악독함을 실행하지 못했소. 그전에 객사해버린 까닭이오. 끝까지 선업을 연기하려다 산적에게 당하는 양민을 구출하고 죽어버린 게지.”
“…꽤 인상적인 이야기군요.”
“일운 스님, 스님은 이 사내를 악인이라고 말할 수 있소?”
일운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남들이 보기엔 협의가 넘치는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본성이 그렇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본성은 중요치 않다고 보오.”
“음?”
“결국 그는 선인으로 살아 선인으로 죽은 게 아니오. 또한 그 이야기의 결말. 그 속에서 사내가 떠올렸을 감정을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충족감이오.”
목리원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는 충족감을 느끼며 죽었을 것이오. 사람을 살리다 죽었으니.”
“…하나 연기를 위해 한 행동이지 않습니까.”
“처음엔 그랬으나, 마지막 순간은 아니지 않겠소?”
적어도 목리원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렇지 않소. 정말 선인을 연기하기 위해서 나선 것이라면, 사내는 제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오. 그 와중에 명의 보전을 신경 썼을 것이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본성이 어떻다 한들,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선한 행동은 사람을 선으로 물들이는 법이라고. 마지막 순간 사내가 희생한 이유는 평생을 쌓아온 선업에 이미 선인으로 젖어버린 까닭이라고.”
스승 목선오가 해준 이야기였다.
이것 외에도, 목리원은 강호협객전의 마협이나 목선오가 직접 만나기까지 했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그러니 믿는 것이다.
본성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라는 것을.
비록 운명이 가혹하다 할지라도 인간에겐 능히 그것을 이겨낼 힘이 있다는 것을.
“일운 스님 또한 그러리라 생각하오. 본인이 생각하는 스스로가 불자답지 않다고 한들, 세상이, 이 목리원이 바라보는 일운 스님은 참된 불자요. 그리고 더 불자다워질 사람이오. 일운 스님이 스스로를 놓지만 않는다면, 투쟁심에 빠져버리지만 않는다면 날이 갈수록 참는 것은 쉬워지리라 보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일운 스님이 보기에도 완벽한 불자가 되어있을 게 아니겠소?”
목리원은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일운은 눈을 크게 뜨며 눈빛을 일렁였다.
그 속에 감정이 요동치는 것만 같다.
그런 끝에서 일운은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직전보다 조금 나은 표정이었다.
이 한마디가 그를 완전히 위로한 것은 아니리라.
다만 아주 작은 파문을 일 정도는 되었으리라.
남은 것은 일운의 몫이었다.
그리고 목리원이 생각하기에, 일운은 이런 작은 위로도 충분히 양분으로 삼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었다.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일운이 힘없이 웃었다.
눈을 감고 무언가를 음미하는 듯 미소를 짙게 만들었다.
“목 시주님께 이런 위로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목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소?”
“예, 워낙에 천진하신 분이라.”
충분히 욕으로도 들릴 말이었지만 그런 기색은 아니었기에 목리원은 웃었다.
“그만큼 호탕한 면이 짙다는 뜻이겠구려! 이거 너무 남자답게 행동한 건 아닌가 모르겠소! 앞으로는 좀 더 진중한 면도 보여야 하겠구려!”
“크흡, 하하학!”
일운은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목리원도 그를 따라 웃었다.
한참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정원을 가득 울린다.
그런 일이 꽤 이어지고 나서야 일운은 삐죽 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내일은 목 시주님의 비무지요.”
“그렇소!”
“상대가….”
일운이 떠올리려 고민하는 것에 목리원은 힘차게 말했다.
“적운대주님이오!”
적운대주 강찬.
임무도 내팽개치고 이번 비무에 나온 중증의 비무 중독자.
목리원은 그와의 승부를 꽤나 고대하고 있었다.
일운이 놀라 말했다.
“강적을 만나시는군요. 아직 겨우 64강일진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어찌 이 험난한 강호에서 적이 내 수준이기만을 바랄 수 있겠소? 게다가 난 이길 자신도 있다오?”
목리원은 이번에 새로이 완성한 만련이검의 3식과 허리에 찬 흑야를 믿었다.
비무야 얼마나 험난하든 그 끝에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리라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 진한 미소에 일운은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는 마음 놓고 응원하겠습니다.”
목리원은 주먹을 꽉 쥐며 답했다.
“내 꼭 스님의 몫까지 위로 올라가보겠소!”
"목시주님, 저 아직 안 떨어졌습니다."
"앗차차."
목리원이 뒷목을 긁었다.
일운은 더욱 크게 웃었다.
그 뒤로도 목리원은 일운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돌아가 충분한 잠을 잤다.
그렇게 비무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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